특집 행복의 주체는 일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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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8 21:56 조회 7,990회 댓글 0건본문
학교 교육을 마치는 순간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수능 시험이 끝나면 고등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여러 가지 특별수업을 합니다. 예비 대학생, 예비 사회인에게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지요. 어떤 날은 무대에 서는 배우나 패션쇼에 나서는 모델처럼 멋지게 화장을 하고 나서는 여고생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화장품 회사를 통해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미용교육을 한 겁니다. 자신을 꾸미는 일은 중요합니다. 화장을 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보다 소중한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는 데 화장이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밥벌이를 해야 합니다.
한 대학 인문학 포럼에서 강의를 하고 나서는데 한 친구가 쫓아옵니다. 할 말이 있답니다. 차를 한 잔 마시면서 하는 말이, “요즘은 대학생이 없어요. 취업준비생이어요.”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고등학교를 마치면 성인 대접을 받았지만 요즘은 대학을 마쳐도 취업을 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인, 어른이라는 말은 ‘인간 대접’을 받느냐 못받느냐의 기준입니다. 취업을 해야 인간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취업이 뭡니까? 바로 자신의 밥벌이를 자신의 손으로 한다는 말 아닙니까?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마주치는 밥벌이, 그 밥벌이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선생과 교수 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에 대학원을 끝내고도 밥벌이를 하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왜일까요? 초중고 12년에, 더하기 대학교육 최소 2년에서 석・박사과정까지 10년 넘게 배워도 누구도 당신은 노동자가 될 것이고, 노동자란 무엇이고, 노동자의 권리는 이거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존재와 삶, 권리를 가르쳐야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1천7백만 명이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다. 직장을 갖고 노동자가 되고 싶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아예 포기한 사람들이 3백만 명이 넘을 겁니다. 식당이나 상점, 공장을 경영하지만 노동자와 별반 다름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직장에 다니고 싶었지만 명예퇴직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구조조정으로 일터에서 나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장’이 된 사람들이죠. 결국 대한민국에 사는 열 가운데 아홉은 노동을 하며 노동자거나 노동자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한 해에만도 숱한 책이 나오는데 절대 다수의 사람이 겪어야하는 노동자의 존재와 삶, 권리에 대해 제대로 쓴 책이 없다니!
지난해에 한 출판사에서 청소년이 읽을 노동 교과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교육노동자들이 만든 출판사이기에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때를 비슷하게 해서 두 군데 출판사에서도 제게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흐뭇했습니다. 세 군데 출판사의 요청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라 처음 제안한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책을 썼습니다.
늘 안타까워하던 일이라 다른 책 작업을 포기하고 노동 교과서에 매달렸습니다. 한이 맺혔던 일이라 그런지 보름 만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지요. 초고가 넘어간 지 1년이 되었건만 아직 원고는 편집자의 손에서 검토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권, 생태, 뭐 이런 책들과 함께 시리즈로 기획된 책인데, 노동 원고 말고는 아직 집필이 완료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노동’을 먼저 내면 이 시리즈가 ‘뽐’이 나지 않아서가 아닐까…입니다.
노동자는 절대 다수이지만 ‘소수자’로 존재합니다. 노동자가 누구인지 배우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노동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존재를 규정하며 소수자로 여깁니다.
청소년이나 대학생을 만나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공사장에서 작업복을 입은 이와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도면을 들고 있는 사진입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사람이 노동자일까요? 아니면 안경을 쓰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이 노동자일까요?”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한국의 재벌을 대표하는 ‘왕 회장님’이라고 말해주면 ‘와!’ 하고 놀랍니다. 여기서 넥타이를 맨 사람은 공무원이고, 월급을 받는 노동자라고 하면 ‘어?’ 하며 더 놀랍니다. 공무원이 노동자라고?
노동자는 공장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을 말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는 승무 노동자는 ‘스튜어디스’고,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은 ‘과학자’이고, 야구장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는 ‘프로야구 선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은 ‘교수’고, 방송국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은 ‘앵커’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는 소수자도, 범죄자도, 노예도 아니다
다시 사진 한 장을 보여줍니다. 수배전단지입니다. 성폭력 피의자인데 생김새가 ‘노동자풍의 마른체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방송 뉴스에도 유괴범을 ‘노동자풍의 얼굴이 길고’라고 말합니다. 대한
민국의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범죄자풍’이라는 말입니다. 관공서나 공영방송에서 아무 생각 없이 ‘노동자’를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80년대에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에게 ‘학생운동’ 하지 말라고 말했지요. 요즘은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하는 자녀에게 ‘노동조합’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합니다. 노동조합은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3권 가운데 하나입니다. 노동조합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말은 회사에 출근하면 너에게 보장된 권리를 포기하고, 근대 이전 사회처럼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 일만 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과장되게 들립니까?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하면 네 명 가운데 두 명이 취업에 성공합니다. 축복받은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정규직 노동자고 나머지 한 명은 기간제, 인턴과 같은 명칭이 붙은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이러니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업을 하면, 그 옛날 시골에서 논 팔고 소 팔아 가르친 자식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난리법석입니다.
그런데 2년제 대학을 나온 자신의 아들이 세계 최일류를 꿈꾸며, 스티브 잡스와 특허권 소송을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업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은 잔업과 철야, 야간 작업에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에게 참으며 일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정신병원에 가야 했고, 끝내는 회사 기숙사에서 죽었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친구가 자신의 생각과 무관하게 잔업과 야간 근무를 했다는 겁니다. “힘들면 야간 잔업을 하지 않아도 돼.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어.” 자식에게 이 말 대신 부모님은 ‘참고 일해!’라고 말했습니다. 근로기준법 읽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조항만 골라서 읽힌다면 5분이면 족합니다. 이 5분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해주지 않았던 겁니다.
위험한 근무를 시키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상사의 지시를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취업을 하게 되면 회사는 안전하게 일하도록 노동자에게 ‘안전교육’을 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벌려고 철을 만드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안전교육은 형식이었고, 위험한 작업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알았습니다. 이 대학생은 쇳물이 이글이글 끓는 곳에 빠져 시신마저도 쇳물이 되었습니다. 이 친구의 근무 태만이고, 주의력 부족이고, 실수일까요? 아니잖아요. 작업을 지시한 회사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책임은 이 친구가 대학생이 되었지만 노동이 뭔지,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주어진 권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은 사회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에는 교육을 책임지는 선생님의 잘못도 분명히 있습니다.
노동교육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학교와 사회
KTX 승무원을 기억하십니까? 이들은 스튜어디스가 되려고, 그것도 공기업인 철도공사 직원이 되려고, 대학을 마친 뒤 무수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취직을 했습니다. 이들의 2년 뒤는 철도공사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자회사의 자회사 비정규직 노동자 신세였습니다. 스물네다섯 살, 한참 사회에서 꿈을 펼칠 나이에 입사한 이들은 비정규직으로 2년을 일하고 쫓겨날 처지가 되자 다시 2년 넘게 머리띠를 묶고, 단식을 하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경찰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스물의 청춘을 자신의 이력서에서 말끔하게 지웠습니다. 이 아픔을 겪은 지 6년이 지나서야 고등법원에서 이들은 철도공사 직원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려고 이들과 얼마 전에 인터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 말하더군요. 자신들이 입사할 때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걸 알았으면 자신의 이십대를 이리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법원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았지만 자신의 스물은 누가 찾아줄 것이냐고. 취업 당시 자신의 존재만 알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고통을 6년 넘게 겪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나는 개다!’를 복창하며 일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소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소설보다 끔찍스러운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한겨레 출판사에서 인물 이야기 시리즈를 내는데 ‘전태일’에 대해 써달라고 하더군요. 이미 전태일은 그림책으로 나왔고, 만화도 있으니 거부할까 하다가 승락했습니다. 왜냐? 근로기준법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노동이 뭔지를 이야기하고,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려고 말입니다. 대학생과 어른들이 보는 르포 『밥과 장미』(삶이보이는창. 2010)를 쓸 때도 각 장 끝에다 근로기준법이 뭔지, 노동조합이 뭔지, 감정노동이 뭔지를 상자 처리를 해서 달았습니다. 초등학생 책이나 성인 책이나 문체나 내용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교육의 정도를 떠나 대한민국 사람들은 한 번도 노동에 대해 제대로 읽거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사회에 진출할 이들이 행복하게 일하며 살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사회에 나가서 영어회화를 하거나 미적분을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사회에서 영어회화를 하며 사는 이는 ‘사람’이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이는 사람도 사회인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죽도록 공부시켜 토익 점수 높이는 게 옳은 교육법일 겁니다. 노동자가 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1%만을 위한 세상이라면 학교에서 근로기준법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노동자로 잠시든 평생이든 살아가야 할 99%가 존재하지 않고는 이 세상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노동, 부끄러운 이야기, 숨겨야 할 이야기인가?
배가 고프면 일을 할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지요? 밥, 아니 피자라도 좋습니다. 누가 만듭니까? 바로 노동자가 만들지요. 배달하는 알바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오토바이를 타고 전해줘야 피자 한 조각을 먹는 것 아닙니까. 노동이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은 직접 투표로 대통령이나 시장을 뽑든, 헌법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명시하든 독재국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청소노동자 옷을 입고 쓰레기를 나르는 쇼를 정치인이 왜 합니까? 작업복을 입고 국밥집 할머니와 사진을 왜 찍습니까? 노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정치인이어야 표를 많이 얻을 수 있고, 그래야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 아닙니까? 대통령 후보들이 너나없이 나도 한때 노동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지요. 세상의 다수가 노동자이고, 이들이 하는 노동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게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하라고 노동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파업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동을 말합니다. 죽지 않고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을 이루려면 노동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엊그제 한 고등학교에 강의를 갔습니다. 강의를 며칠 앞두고 담당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내 수업에 참관할 예정이니 ‘노동, 뭐 이런 이야기’는 자제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노동은 부끄러운 이야기도 숨겨야 할 이야기도 아닙니다. 진정 청소년을 사랑한다면 노동의 가치를 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반드시 알려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당신의 자녀나 제자가 ‘알바’를 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생명을 위협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평생 일을 하면서 불안하고 불행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 노동을 제대로 알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스펙’이나 출세, 경쟁 대신 존재를 깨우쳐줘야 합니다. 행복의 주체는 지위도 권력도 명예도 돈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 일하는 사람입니다.
수능 시험이 끝나면 고등학교 졸업생을 상대로 여러 가지 특별수업을 합니다. 예비 대학생, 예비 사회인에게 맞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지요. 어떤 날은 무대에 서는 배우나 패션쇼에 나서는 모델처럼 멋지게 화장을 하고 나서는 여고생을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학교에서 화장품 회사를 통해서 졸업생을 대상으로 미용교육을 한 겁니다. 자신을 꾸미는 일은 중요합니다. 화장을 한 자신의 얼굴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다면 이보다 소중한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성인이 되고, 사회인이 되는 데 화장이 반드시 필요한 일은 아닙니다. 고등학교든 대학교든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밥벌이를 해야 합니다.
한 대학 인문학 포럼에서 강의를 하고 나서는데 한 친구가 쫓아옵니다. 할 말이 있답니다. 차를 한 잔 마시면서 하는 말이, “요즘은 대학생이 없어요. 취업준비생이어요.”라고 합니다. 예전에는 고등학교를 마치면 성인 대접을 받았지만 요즘은 대학을 마쳐도 취업을 하지 못하면 어른이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성인, 어른이라는 말은 ‘인간 대접’을 받느냐 못받느냐의 기준입니다. 취업을 해야 인간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지요. 취업이 뭡니까? 바로 자신의 밥벌이를 자신의 손으로 한다는 말 아닙니까?
학교 문을 나서는 순간 마주치는 밥벌이, 그 밥벌이를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를 선생과 교수 들이 가르쳐야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고등학교가 아니라 대학에 대학원을 끝내고도 밥벌이를 하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권리를 지니고 있는지를 모릅니다. 왜일까요? 초중고 12년에, 더하기 대학교육 최소 2년에서 석・박사과정까지 10년 넘게 배워도 누구도 당신은 노동자가 될 것이고, 노동자란 무엇이고, 노동자의 권리는 이거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노동자의 존재와 삶, 권리를 가르쳐야 한다
대한민국에 사는 사람 1천7백만 명이 노동자로 살고 있습니다. 직장을 갖고 노동자가 되고 싶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거나 아예 포기한 사람들이 3백만 명이 넘을 겁니다. 식당이나 상점, 공장을 경영하지만 노동자와 별반 다름없는 이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직장에 다니고 싶었지만 명예퇴직이니 희망퇴직이니 하는 구조조정으로 일터에서 나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장’이 된 사람들이죠. 결국 대한민국에 사는 열 가운데 아홉은 노동을 하며 노동자거나 노동자처럼 살아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한 해에만도 숱한 책이 나오는데 절대 다수의 사람이 겪어야하는 노동자의 존재와 삶, 권리에 대해 제대로 쓴 책이 없다니!
지난해에 한 출판사에서 청소년이 읽을 노동 교과서를 써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교육노동자들이 만든 출판사이기에 흔쾌히 수락을 했습니다. 때를 비슷하게 해서 두 군데 출판사에서도 제게 같은 제안을 했습니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의아해 하기도 했지만 흐뭇했습니다. 세 군데 출판사의 요청을 다 받아들일 수 없는 노릇이라 처음 제안한 출판사와 계약을 맺어 책을 썼습니다.
늘 안타까워하던 일이라 다른 책 작업을 포기하고 노동 교과서에 매달렸습니다. 한이 맺혔던 일이라 그런지 보름 만에 초고를 완성할 수 있었지요. 초고가 넘어간 지 1년이 되었건만 아직 원고는 편집자의 손에서 검토도 되지 않고 있습니다. 인권, 생태, 뭐 이런 책들과 함께 시리즈로 기획된 책인데, 노동 원고 말고는 아직 집필이 완료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노동’을 먼저 내면 이 시리즈가 ‘뽐’이 나지 않아서가 아닐까…입니다.
노동자는 절대 다수이지만 ‘소수자’로 존재합니다. 노동자가 누구인지 배우지도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노동자’에 대해 자기 나름대로 존재를 규정하며 소수자로 여깁니다.
청소년이나 대학생을 만나면 한 장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공사장에서 작업복을 입은 이와 넥타이를 맨 사람들이 도면을 들고 있는 사진입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후줄근한 작업복 차림의 사람이 노동자일까요? 아니면 안경을 쓰고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이 노동자일까요?”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 한국의 재벌을 대표하는 ‘왕 회장님’이라고 말해주면 ‘와!’ 하고 놀랍니다. 여기서 넥타이를 맨 사람은 공무원이고, 월급을 받는 노동자라고 하면 ‘어?’ 하며 더 놀랍니다. 공무원이 노동자라고?
노동자는 공장이나 공사장에서 일하는 사람만을 말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비행기를 타는 승무 노동자는 ‘스튜어디스’고, 연구소에서 일하는 사람은 ‘과학자’이고, 야구장에서 공을 던지는 투수는 ‘프로야구 선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사람은 ‘교수’고, 방송국에서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은 ‘앵커’지, 노동자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노동자는 소수자도, 범죄자도, 노예도 아니다
다시 사진 한 장을 보여줍니다. 수배전단지입니다. 성폭력 피의자인데 생김새가 ‘노동자풍의 마른체형’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방송 뉴스에도 유괴범을 ‘노동자풍의 얼굴이 길고’라고 말합니다. 대한
민국의 절대 다수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범죄자풍’이라는 말입니다. 관공서나 공영방송에서 아무 생각 없이 ‘노동자’를 ‘범죄자’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80년대에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에 입학한 자녀들에게 ‘학생운동’ 하지 말라고 말했지요. 요즘은 대학을 마치고 취업을 하는 자녀에게 ‘노동조합’ 근처에도 가지 말라고 합니다. 노동조합은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3권 가운데 하나입니다. 노동조합 근처에도 가지 말라는 말은 회사에 출근하면 너에게 보장된 권리를 포기하고, 근대 이전 사회처럼 ‘노예’처럼 시키는 대로 일만 하라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너무 과장되게 들립니까?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내고 대학을 졸업하면 네 명 가운데 두 명이 취업에 성공합니다. 축복받은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정규직 노동자고 나머지 한 명은 기간제, 인턴과 같은 명칭이 붙은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 이러니 대기업 정규직으로 취업을 하면, 그 옛날 시골에서 논 팔고 소 팔아 가르친 자식 ‘사법고시(?)’에 합격한 것처럼 난리법석입니다.
그런데 2년제 대학을 나온 자신의 아들이 세계 최일류를 꿈꾸며, 스티브 잡스와 특허권 소송을 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재벌 기업에 정규직으로 취업했습니다. 자랑스러운 아들은 잔업과 철야, 야간 작업에 정신이 돌아버릴 지경이었습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들에게 참으며 일하라고 했습니다. 결국 그 아들은 정신병원에 가야 했고, 끝내는 회사 기숙사에서 죽었습니다. 자살인지 타살인지, 소문이 무성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친구가 자신의 생각과 무관하게 잔업과 야간 근무를 했다는 겁니다. “힘들면 야간 잔업을 하지 않아도 돼. 근로기준법에 나와 있어.” 자식에게 이 말 대신 부모님은 ‘참고 일해!’라고 말했습니다. 근로기준법 읽는 데 한 시간도 걸리지 않습니다. 최소한의 생명을 지킬 수 있는 조항만 골라서 읽힌다면 5분이면 족합니다. 이 5분을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해주지 않았던 겁니다.
위험한 근무를 시키면 자신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서 상사의 지시를 거부할 권리가 있습니다. 취업을 하게 되면 회사는 안전하게 일하도록 노동자에게 ‘안전교육’을 시킬 의무가 있습니다. 한 대학생이 등록금을 벌려고 철을 만드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습니다. 안전교육은 형식이었고, 위험한 작업은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 알았습니다. 이 대학생은 쇳물이 이글이글 끓는 곳에 빠져 시신마저도 쇳물이 되었습니다. 이 친구의 근무 태만이고, 주의력 부족이고, 실수일까요? 아니잖아요. 작업을 지시한 회사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책임은 이 친구가 대학생이 되었지만 노동이 뭔지,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주어진 권리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지 않은 사회의 책임입니다. 이 책임에는 교육을 책임지는 선생님의 잘못도 분명히 있습니다.
노동교육을 하지 않는 무책임한 학교와 사회
KTX 승무원을 기억하십니까? 이들은 스튜어디스가 되려고, 그것도 공기업인 철도공사 직원이 되려고, 대학을 마친 뒤 무수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취직을 했습니다. 이들의 2년 뒤는 철도공사 스튜어디스가 아니라 자회사의 자회사 비정규직 노동자 신세였습니다. 스물네다섯 살, 한참 사회에서 꿈을 펼칠 나이에 입사한 이들은 비정규직으로 2년을 일하고 쫓겨날 처지가 되자 다시 2년 넘게 머리띠를 묶고, 단식을 하고,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고, 경찰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스물의 청춘을 자신의 이력서에서 말끔하게 지웠습니다. 이 아픔을 겪은 지 6년이 지나서야 고등법원에서 이들은 철도공사 직원이라는 판결을 받았습니다. 축하한다는 말을 전하려고 이들과 얼마 전에 인터뷰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때 말하더군요. 자신들이 입사할 때 자신이 비정규직이라는 걸 알았으면 자신의 이십대를 이리 보내지 않았을 거라고. 법원에서 자신의 정당함을 인정받았지만 자신의 스물은 누가 찾아줄 것이냐고. 취업 당시 자신의 존재만 알았다면 당하지 않았을 고통을 6년 넘게 겪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에는 ‘나는 개다!’를 복창하며 일하는 노동자가 있습니다. 아, 내가 지금 하는 말이 소설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소설보다 끔찍스러운 일이 내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난해에 한겨레 출판사에서 인물 이야기 시리즈를 내는데 ‘전태일’에 대해 써달라고 하더군요. 이미 전태일은 그림책으로 나왔고, 만화도 있으니 거부할까 하다가 승락했습니다. 왜냐? 근로기준법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노동이 뭔지를 이야기하고, 노동의 가치를 이야기하려고 말입니다. 대학생과 어른들이 보는 르포 『밥과 장미』(삶이보이는창. 2010)를 쓸 때도 각 장 끝에다 근로기준법이 뭔지, 노동조합이 뭔지, 감정노동이 뭔지를 상자 처리를 해서 달았습니다. 초등학생 책이나 성인 책이나 문체나 내용에서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교육의 정도를 떠나 대한민국 사람들은 한 번도 노동에 대해 제대로 읽거나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사회에 진출할 이들이 행복하게 일하며 살 권리를 위해 필요한 것 아닐까요? 사회에 나가서 영어회화를 하거나 미적분을 하며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사회에서 영어회화를 하며 사는 이는 ‘사람’이고, 그것으로 밥벌이를 하지 못하는 이는 사람도 사회인도 아니라고 여긴다면 죽도록 공부시켜 토익 점수 높이는 게 옳은 교육법일 겁니다. 노동자가 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1%만을 위한 세상이라면 학교에서 근로기준법 가르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노동자로 잠시든 평생이든 살아가야 할 99%가 존재하지 않고는 이 세상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노동, 부끄러운 이야기, 숨겨야 할 이야기인가?
배가 고프면 일을 할 수도 공부를 할 수도 없지요? 밥, 아니 피자라도 좋습니다. 누가 만듭니까? 바로 노동자가 만들지요. 배달하는 알바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오토바이를 타고 전해줘야 피자 한 조각을 먹는 것 아닙니까. 노동이 없는 세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노동자가 행복하지 않은 세상은 직접 투표로 대통령이나 시장을 뽑든, 헌법에 자유민주주의 국가라고 명시하든 독재국가와 다를 바 없습니다.
선거 때가 되면 청소노동자 옷을 입고 쓰레기를 나르는 쇼를 정치인이 왜 합니까? 작업복을 입고 국밥집 할머니와 사진을 왜 찍습니까? 노동이 행복한 사회를 만드는 정치인이어야 표를 많이 얻을 수 있고, 그래야 권력을 잡을 수 있기 때문 아닙니까? 대통령 후보들이 너나없이 나도 한때 노동을 했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지요. 세상의 다수가 노동자이고, 이들이 하는 노동이 행복한 나라를 만드는 게 민주주의이기 때문입니다.
노동조합을 만들어 파업을 하라고 노동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파업을 하지 않아도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노동을 말합니다. 죽지 않고 행복하게 일하는 세상을 이루려면 노동자가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합니다.
엊그제 한 고등학교에 강의를 갔습니다. 강의를 며칠 앞두고 담당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교감 선생님이 내 수업에 참관할 예정이니 ‘노동, 뭐 이런 이야기’는 자제해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노동은 부끄러운 이야기도 숨겨야 할 이야기도 아닙니다. 진정 청소년을 사랑한다면 노동의 가치를 말하고 노동자의 권리를 반드시 알려주어야 합니다.
지금도 당신의 자녀나 제자가 ‘알바’를 하면서 고통을 당하고 생명을 위협받고 있을지 모릅니다. 평생 일을 하면서 불안하고 불행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일, 노동을 제대로 알면 인생이 행복해집니다. ‘스펙’이나 출세, 경쟁 대신 존재를 깨우쳐줘야 합니다. 행복의 주체는 지위도 권력도 명예도 돈도 아닙니다. 바로 사람, 일하는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