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아이들을 살찌우는 문화예술 - 학교에서 예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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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2 19:16 조회 7,741회 댓글 0건본문
놀이 - 아이들 살리려면 놀리세요
교육은 가르치는 행위와 배우는 행위가 만나야 비로소 이뤄진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같은 비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자는 후자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기에 후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교육을 모두 책임지는 양 호도되고 있다. 국어 시간이니 국어책을 펴야 하고 쉬는 시간이니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음 수업 시간에 배울 교과서를 펴 놔야 한다.
이는 준비운동도 하지 않았고 마음도 없는데 자유형이니 평영이니 방법을 가르치고 물에 뛰어들라고 하는 꼴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많은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동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놀이는 가르치는 사람보다 놀이하는 아이들이 중심이다. 비석치기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재미를 느껴서 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그래서 놀이할 때면 교실에서와 다르게 눈빛이 반짝이고 아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우리 반 아이들은 짬만 나면 놀이를 한다. 아침 시간, 점심시간 후 남는 시간, 방과 후 집에 가기 전에 진놀이, 오징어, 긴줄넘기, 딱지치기, 비석치기, ㄹ자 놀이 등을 운동장에서 주로 한다. 또한 교실에서는 학습과 직접 관계되는 고누, 칠교, 같은 모양 찾기, 산가지 등을 즐겨 하다보면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도 한다. 물론 놀이가 단절된 요즘 동네 형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체육 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에 가르쳐준 것인데 재미있으니 수시로 하게 되고 어느새 우리 반의 놀이 문화가 되었다.
왕따 버르장머리 바로잡기도 놀이가 특효
이런 놀이들은 시험과 같이 평가하여 어느 정도 능력이 향상되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피부로 와닿은 효과를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5학년인 우리 반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가진 아이가 있다. 모든 아이의 동네북으로 소위 왕따를 당하고 스스로도 왕따 당할 행동을 한다. 장애우인데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기에 공공의 적이 되었고 이런 현상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쇠귀에 경 읽기다. 담임을 맡았던 전前 학년 교사들도 내게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대처하기 위해서 주로 격리하거나 억압하는 방법이 최선인데 효과는 별로 없다면서 걱정스런 눈빛을 보낸다.
‘왕따’는 당하는 사람은 물론 시키는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다. 당하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힘들지만 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불만이나 욕구, 잘못 등을 특정인에게 쉽게 전가시키거나 배출함으로써 일종의 부정적인 스트레스 풀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되풀이되면 이기심이 증가하고 점차 폭력 성향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학급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안으로 놀이가 최선이었다.
모둠으로 나누어 딱지치기를 했다. 한 모둠에 30장씩 딱지를 가지고 가장 많이 딴 모둠에게 밥을 먼저 먹는 권리를 주기로 하고 시작했다. 어떻게 터득했는지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잘했다. 그 아이와 같은 모둠원들이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했다가 하나둘 따오니까 처음으로 “와, ○○ 잘하는데!”라고 칭찬을 했다. 그 아이는 더욱 신이 나서 땀을 뻘뻘 흘리며 했고 결과는 그 모둠이 일등을 했다.
놀이를 통해 둥글게 둥글게 자라는 아이들
이후 몇 차례 더 했는데 그 때마다 그 아이의 활약이 눈부셨고 모든 아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딱지치기를 하면 그 아이는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고 이는 이후 교실 생활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진놀이에서도 달리기를 잘하는 그 아이의 역할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나와서 잡혀가더니 점차 언제 나가야 하는지, 우리 편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되면서 자기편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물론 한두 번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여럿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이후 생활에 큰 변화가 왔다. 물론 장애가 쉽게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의 노력과 주변에서의 도움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 밖의 놀이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 효과는 우리 반 모두를 날카로운 돌에서 둥글둥글한 자갈로 만들어 놓았다. “너 때문이야!”에서 “괜찮아”, “에이, 짜증나!”에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니?”로, 서로 상대를 배려하는 가운데 조금씩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웃음, 왁자지껄한 소란, 과잉 행동은 놀이할 때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는 곧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공부에, 학원에, 숙제에 찌든 아이들에게 잘 놀게 하는 것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방학 중에 우리 반 아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 학교 가고 싶어요!”
음악 - 음악 시간에 희망을 보았네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고 한다. 자연보다는 컴퓨터와 같은 첨단 기기와 더욱 친한, 그래서 어떨 때는 폭력성이 염려된다고 한다. 사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다보면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아이들의 문제만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폭력, 무절제, 분노,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음,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꽤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럴 때 문제 해결을 위해 교사들은 많은 애를 쓰고 있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교사의 노력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올해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져서 아이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가진 어려움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해보고 싶고, 또 비효율적인 담임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음악 교과 전담을 맡았다. 그런데 음악 교과를 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 또는 희망을 보았다고나 할까? 어쩌면 내가 너무 지나치게 좋게 해석하는 것일는지 모르겠지만 음악 시간이 행복하다는 느낌, 또한 그 안의 아이들도 행복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자.
음 악 수업 풍경 하나_ 온몸으로 느끼는 아이들“선생님, ‘동네 한 바퀴’ 노래 또 불러요?”
“어, 오늘은 다음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그래도 한 번만 더 불러요.”
“그럴까? 그런데 왜 그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일까요?”
“아름다워요.”
“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소리가 잘 어우러져요.”
소리가 잘 어우러져서 그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노래를 배우는 첫 시간의 아이들 표정이 떠오른다.
“자, 우리 도, 미, 솔, 세 가지 소리를 가지고 놀이를 해볼까요?”
내가 이렇게 제안하자 아이들은 게임인가요?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을 도 소리팀과 미 소리팀, 솔 소리팀으로 나누어서 자기 소리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예쁘게 소리를 내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자기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소리 지르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어느새 귀를 열고 친구들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나는 놀랐다. 아, 아이들이 느낀 것이다. 소리의 어우러짐을.
이 활동 뒤에 이어서 ‘동네 한 바퀴’ 노래를 연습하고 돌림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은 돌림노래의 묘미, 소리의 어우러짐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행복해 했다. 이런 일이!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실 아이들이 그만큼까지 가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노래 부르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음악실에 들어오면 어떤 노래든 흥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교사로서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음악 수업 풍경 둘_ 편안하게 즐기는 아이들
사실 노래를 즐긴다 하지만 어지간히 극성맞은 아이들도 있다.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있지 않고 늘 떠 있는 아이들도 한 반에 서넛은 된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음악 시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노래를 부르거나 리코더를 연주하거나 늘 몸을 흔드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수업에 끌어들이는 일이 어쩌면 음악 시간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리코더 이중주 연습을 하는데 그 아이는 리코더를 부는 것이 아니라 몸을 흔들면서 음악에 맞추어 지휘를 하고 있다.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앞으로 나와서 해보라고 했더니 거침없이 잘한다. 아이들도 놀라고 그 아이 자신도 놀라고. 조금 쑥스러운 듯이 지휘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아이 담임 선생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웃는다. 다른 수업 활동에서는 상당히 애를 먹이고, 아이들과 싸워서 힘든 아이라는 것이다. 그런 아이가 음악 시간에는 편한 얼굴을 하고 수업에 참여한다. 물론 엉덩이는 반 정도 허공에 떠 있지만 말이다.
음악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을 재발견하고 있다. 왜 학과 수업에 아이들이 일탈 행동을 하는지 또는 친구들과 싸우는지 생각해보면, 어쩌면 숨도 못 쉬게 아이들을 경쟁 교육시키고 있는 현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아이들이 음악 시간에는 마음의 긴장을 풀고, 음악을 하나하나 몸으로 느끼면서, 더러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나만 그랬을까? 사실 담임을 맡게 되면 다른 교과목 진도 나가기에 바빠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여유 있는 음악 수업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 내가 음악 교과 전담을 하면서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다. 초등 교육에서 예체능 교과의 중요함을 실감하면서 말이다.
연극 - 놀라운 세상, 정답은 없다
처음에 글 의뢰를 받고 몹시 난감했다. 하나는 이 글을 현장 작업을 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내가 청탁 내용에 맞는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직접적인 교육적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교육연극’이란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은 다른 답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분명, 얼마 전까지 글 쓰는 이는 예술(연극)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술의 공공성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연극)은 존재하는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 자체가 의미가 되는 연극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고 있다. 산업의 가치를 말하는 예술은 산업의 범주에 머물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육의 가치를 말하는 예술은 교육 안에 머물게 된다. 요즈음 ‘예술산업’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예술이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행위라면, 예술산업은 해바라기를 머그잔에 넣는 것이다. 예술산업을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머그잔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육을 강조하다가는 자칫 이러한 우를 범할 수 있다. 예술은 경제적 가치, 교육의 가치와는 별개로 스스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아 이들에게 세상의 경이로움을 보여주자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새소리나 물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다. 나무와 기암절벽만 바라보며 살 수도 없다. 음악을 만들어 듣고,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 이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 사람들 사는 세상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경이로움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 연극이다. 그래서 연극은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여러 사람이 더불어 보면서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정서적인 안정을 느낀다. 더군다나 연극은 꼭 글을 알아야 하는 법도 없고 난해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구나 최고의 심미안을 나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연극을 볼 수 있다면 아이들은 연극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다양한 가치를 알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많을수록 공동체성을 담보하는 예술 감상은 더욱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연극을 보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그 역할을 ‘가정’이 맡았다. 일부 관심 있는 부모, 엄마들만이 아이들이 연극을 보게 했다. 아니면 탁아 연극에 아이를 맡기든지. 아이들이 고루 연극을 보기 위해서는 연극이 학교로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밥을 먹듯이 연극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학교 급식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글 쓰는 이는 급식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아이들 먹을거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진정 잘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문화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굳이 ‘문화복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이것이 복지보다 우선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정답 찾지 마! 네 마음대로 즐기고 생각해
문제는 ‘학교로 찾아가는 연극의 조건’이다. 보통 학교로 찾아가는 연극은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교장선생님들은 예술가들에게 교과 과정을 이해하고 학교로 들어오라고도 하신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교육의 일부를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예술가들은 태생적으로 비교육적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육의 일부를 맡기겠다니!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사들 몫이다.
학교로 찾아가는 연극은 연극의 본질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예술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연극적 재미와 심미안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다만 극장에서 보는 연극과는 달리 극장주의적인 요소가 덜한 작품으로 아이들이 상상력을 통해 예술적 심미안을 완성하는 작품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학교에 강당이 있더라도 그곳은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술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교육의 잣대로 재려는 순간 아이들은 바로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예술 감상의 본질은 정답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오답을 써도 된다는 통쾌함에 있다.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극 후 활동을 할 때는 정답이 나오는 방법은 피해야 한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로 이야기하고, 이를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 본다. 낙서도 좋고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다. 모둠으로 발표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 반드시 각자의 생각이 들어갈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 자칫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그대로 따라가게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까. 어떤 아이는 바로 답을 쓰고 어떤 아이는 바로 답을 내놓기 힘들어할 수 있다. 그래도 연극은 누구에게나 의미를 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서 연극교육? 많이 보여주는 것이 방법이다!
문학 - 문학, 밥 먹고 똥 누듯 하자
우리 교육의 위기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은 북유럽 국가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전인全人과 학습의 양축이 고루 튼튼하다는 그 나라의 교육 바탕은 뜻밖에 예술과 노작勞作이다. 경험한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들은 학교 일과는 물론 공식회의 자리도 시와 노래로 시작한다고 한다. 왜 굳이 시와 노래일까. 감수성과 정서의 연대 아니겠는가. 나는 정서의 회복이야말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게 만드는 근간이라고 믿는 편이다.
문학예술이 교육의 시작일 터, 그래서 나는 미운 놈일수록 악착같이 책을 사주고, 손잡고 시를 읽는다. 어릴 때는 누구나 천사의 시심詩心으로 충만하다. 푸른 하늘에 감동하고 거짓말도 모르며, 비 맞는 새에도 눈물짓는다. 그러나 중고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더 많은 교양을 배우고 익힘에도 갈수록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아무 데나 침을 틱틱 뱉으며, 속임수에 능란하다. 결코 내 것을 내주지 않는다. 왜 이렇게 사나워지는가. 시심을 잃어서 그렇다. 눈물이 왜 짠지 몰라서 그렇다.
문학 작품을 읽으며 꿈꾼다는 것의 가치
시심의 복원은 가능한가. 나는 문학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중학생 친구들과 시를 읽으면서 그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봄바람 같은 아이들의 시심은 치열하되 따뜻하며, 솔직하되 겸손하다.
만원을 찾으려 서랍을 뒤지다보니, 귀하게 챙겨둔 백원짜리 동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의 고다니 선생님을 찾으려고 우리 학교를 돌아보니, 샘들의 단점만 눈에 들어온다. 강동원을 찾으려고 학교를 돌아보니, 그간 잘 지냈던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다 밥맛이다. 내 욕심이 눈을 멀게 한다. (중2 노희연. 유승하의 「사라진 것들」을 읽고)
시와 소설, 전기를 읽으며 꿈을 꾼다는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어교사로서 나는 ‘어쨌든 읽히고 보자’는 작금의 극성스런 독서교육 추세가 자못 염려스럽다. 논술을 위해서 문학을 읽고, 점수를 위해서 독서토론을 한다. 필독서라는 이름으로 적정 연령대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초등학생에게 「메밀꽃 필 무렵」을 권하고, 중1에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요구한다. 그런 경우, 작품 안에서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정신을 손톱만치도 맛보지 못한 채 지나치고, 정작 그 맛을 만끽할 무렵에는 전에 읽은 것이라며 젖혀버리기 쉽다. 이건 폭력이나 다름없다(그래서 도서목록은 철저하게 실명제여야 한다).
나는 문학교육이란 것이, 아이들이 스스로 즐겨 읽으며 성장할 수 있도록 그저 길을 터주고 손을 잡아주는 정도였으면, 그렇게 소박했으면 좋겠다. 문학교육만큼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감동의 소통이 없는 문학교육은 십중팔구 ‘공부’로 빠진다. 그 순간, 문학은 아이들에게 감동은 개뿔, 그저 골치 아프고 괘씸한 존재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일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교육이 도서실(관)과 궤를 같이 해야 하는 것도, 생활 속에 자리 잡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과 만나게 하고 나를 어루만지는 문학
얼마 전 지역교육 답사차 풀무학교가 있는 충남 홍동을 다녀왔다. 거기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스무 명 남짓이 다닌다는 어린이집 아이들의 산책길이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한 번 꼭 산책을 하는데, 그들의 산책 코스란 것이 논길 밭길을 거쳐 (동네 어른들이 돈을 모아 만든) 헌책방도서관에 들르는 것이다. 거기서 아이들은 방금 만난 벌레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동화도 읽는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과였다. 나는 그들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진실로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들은 자라서 책 읽는 농부가 될 터였다. 그렇다. 도서관도, 책을 읽는 것도, 밥 먹고 똥 누듯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겠는가.
돌이켜보면 20년 넘는 교직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사서를 겸해(당시 사서가 없었다) 도서관 담당을 하던 때였다. 작은 도서실은 늘 아이들로 복작거렸고, 엎드려 만화책도 보고, 소설책도 읽었다. 그런 중에는 친구들을 끌고 와서 손수 책을 권해주는 친구도 있고, 당사자는 손사레를 치는데도 부득부득 ‘너무 재미있는 책’이라며 손수 대출 수속을 밟아 친구 손에 쥐어주는 아이들도 있다. 그곳에서는 서로가 스승이었다. 교실에서 문학수업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기분으로 딱 반 뼘만 더 깊게, 반 뼘만 더 넓게 가르치는 것으로 족했다. 문학은 삶의 이야기다. 문학을 통해 남을 만나고 세상을 만난다. 그렇게 소통한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자신을 어루만지게 한다. 어찌 문학이 단순히 언어와 수사만의 문제이겠는가.
아, 이쯤에서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오프라인 시절, 책 뒤에 붙어 있던 도서대출카드- 개똥이도 읽고 말똥이도 읽었다는, 읽은 이들의 족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출카드는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시였다. 만나지 않았어도 만난 듯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듯한 정서의 소통,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속살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디지털도서관은 소중한 것을 몸에서 떼어버렸다. 어디 도서관뿐이랴. 나는 문학, 책에 관한 한 좀 촌스러웠으면 좋겠다. 도서실 문을 열 때 그 특유의 책 냄새와 전자책의 기민함을 어찌 바꿀 것인가.
교육은 가르치는 행위와 배우는 행위가 만나야 비로소 이뤄진다. 이 중에 어느 것이 더 중요할까? 같은 비중이라고 할 수 있지만 전자는 후자가 바탕이 되지 않으면 성립할 수 없기에 후자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교육자라는 이름으로 가르치는 사람이 교육을 모두 책임지는 양 호도되고 있다. 국어 시간이니 국어책을 펴야 하고 쉬는 시간이니 화장실을 다녀와서 다음 수업 시간에 배울 교과서를 펴 놔야 한다.
이는 준비운동도 하지 않았고 마음도 없는데 자유형이니 평영이니 방법을 가르치고 물에 뛰어들라고 하는 꼴이다. 이러한 맥락으로 많은 아이들이 공부에 재미를 느끼지 못하고 수동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놀이는 가르치는 사람보다 놀이하는 아이들이 중심이다. 비석치기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재미를 느껴서 하는 것은 아이들이다. 그래서 놀이할 때면 교실에서와 다르게 눈빛이 반짝이고 아이가 가진 모든 능력을 십분 발휘한다.
우리 반 아이들은 짬만 나면 놀이를 한다. 아침 시간, 점심시간 후 남는 시간, 방과 후 집에 가기 전에 진놀이, 오징어, 긴줄넘기, 딱지치기, 비석치기, ㄹ자 놀이 등을 운동장에서 주로 한다. 또한 교실에서는 학습과 직접 관계되는 고누, 칠교, 같은 모양 찾기, 산가지 등을 즐겨 하다보면 배운 것을 자신의 것으로 내면화하기도 한다. 물론 놀이가 단절된 요즘 동네 형들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체육 시간이나 자투리 시간에 가르쳐준 것인데 재미있으니 수시로 하게 되고 어느새 우리 반의 놀이 문화가 되었다.
왕따 버르장머리 바로잡기도 놀이가 특효
이런 놀이들은 시험과 같이 평가하여 어느 정도 능력이 향상되었는지 가늠할 수는 없지만 피부로 와닿은 효과를 직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다.
5학년인 우리 반에는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ADHD)를 가진 아이가 있다. 모든 아이의 동네북으로 소위 왕따를 당하고 스스로도 왕따 당할 행동을 한다. 장애우인데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기에 공공의 적이 되었고 이런 현상은 하루아침에 형성된 것이 아니다. 아무리 타일러도 쇠귀에 경 읽기다. 담임을 맡았던 전前 학년 교사들도 내게 그 아이가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대처하기 위해서 주로 격리하거나 억압하는 방법이 최선인데 효과는 별로 없다면서 걱정스런 눈빛을 보낸다.
‘왕따’는 당하는 사람은 물론 시키는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다. 당하는 사람은 직접적으로 힘들지만 시키는 사람은 자신의 불만이나 욕구, 잘못 등을 특정인에게 쉽게 전가시키거나 배출함으로써 일종의 부정적인 스트레스 풀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되풀이되면 이기심이 증가하고 점차 폭력 성향을 띠게 된다. 이런 상황은 학급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에 이를 효과적으로 극복하는 방안으로 놀이가 최선이었다.
모둠으로 나누어 딱지치기를 했다. 한 모둠에 30장씩 딱지를 가지고 가장 많이 딴 모둠에게 밥을 먼저 먹는 권리를 주기로 하고 시작했다. 어떻게 터득했는지 그 아이는 다른 아이들보다 월등히 잘했다. 그 아이와 같은 모둠원들이 처음에는 하지 말라고 했다가 하나둘 따오니까 처음으로 “와, ○○ 잘하는데!”라고 칭찬을 했다. 그 아이는 더욱 신이 나서 땀을 뻘뻘 흘리며 했고 결과는 그 모둠이 일등을 했다.
놀이를 통해 둥글게 둥글게 자라는 아이들
이후 몇 차례 더 했는데 그 때마다 그 아이의 활약이 눈부셨고 모든 아이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다른 때는 몰라도 딱지치기를 하면 그 아이는 돋보이는 존재가 되었고 이는 이후 교실 생활에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진놀이에서도 달리기를 잘하는 그 아이의 역할이 중요했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나와서 잡혀가더니 점차 언제 나가야 하는지, 우리 편에게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지를 터득하게 되면서 자기편을 승리로 이끄는 주역이 되었다. 물론 한두 번 해서 그리 된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어떻게 처신해야 여럿에게 도움이 되는지를 깨닫게 됨으로써 이후 생활에 큰 변화가 왔다. 물론 장애가 쉽게 극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아이의 노력과 주변에서의 도움으로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그 밖의 놀이에서도 눈에 보이지 않는 교육 효과는 우리 반 모두를 날카로운 돌에서 둥글둥글한 자갈로 만들어 놓았다. “너 때문이야!”에서 “괜찮아”, “에이, 짜증나!”에서 “이렇게 하면 안 되겠니?”로, 서로 상대를 배려하는 가운데 조금씩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모두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가는 것이다.
웃음, 왁자지껄한 소란, 과잉 행동은 놀이할 때 보이는 일반적인 현상인데 이는 곧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척도이다. 공부에, 학원에, 숙제에 찌든 아이들에게 잘 놀게 하는 것은 생명의 숨을 불어넣는 것과 같다. 방학 중에 우리 반 아이한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선생님, 학교 가고 싶어요!”
음악 - 음악 시간에 희망을 보았네
요즘 아이들은 다르다고 한다. 자연보다는 컴퓨터와 같은 첨단 기기와 더욱 친한, 그래서 어떨 때는 폭력성이 염려된다고 한다. 사실 학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다보면 그런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아이들의 문제만일까?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폭력, 무절제, 분노, 타인에 대한 배려 없음, 자기중심주의에 빠져 있는 아이들을 꽤 자주 접하게 된다. 이럴 때 문제 해결을 위해 교사들은 많은 애를 쓰고 있고 나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교사의 노력만으로 해결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올해는 아이들과 조금 떨어져서 아이들을 살펴보고 그들이 가진 어려움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해보고 싶고, 또 비효율적인 담임 업무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음악 교과 전담을 맡았다. 그런데 음악 교과를 하면서 나는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가능성, 또는 희망을 보았다고나 할까? 어쩌면 내가 너무 지나치게 좋게 해석하는 것일는지 모르겠지만 음악 시간이 행복하다는 느낌, 또한 그 안의 아이들도 행복해 보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자.
음 악 수업 풍경 하나_ 온몸으로 느끼는 아이들“선생님, ‘동네 한 바퀴’ 노래 또 불러요?”
“어, 오늘은 다음 노래를 불러야 하는데….”
“그래도 한 번만 더 불러요.”
“그럴까? 그런데 왜 그 노래를 부르고 싶은 것일까요?”
“아름다워요.”
“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을까요?”
“소리가 잘 어우러져요.”
소리가 잘 어우러져서 그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노래를 배우는 첫 시간의 아이들 표정이 떠오른다.
“자, 우리 도, 미, 솔, 세 가지 소리를 가지고 놀이를 해볼까요?”
내가 이렇게 제안하자 아이들은 게임인가요? 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아이들을 도 소리팀과 미 소리팀, 솔 소리팀으로 나누어서 자기 소리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예쁘게 소리를 내도록 했는데, 처음에는 자기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막고 소리 지르기에 바빴던 아이들이 어느새 귀를 열고 친구들의 소리를 듣고 있는 것이다. 나는 놀랐다. 아, 아이들이 느낀 것이다. 소리의 어우러짐을.
이 활동 뒤에 이어서 ‘동네 한 바퀴’ 노래를 연습하고 돌림노래를 하게 되었는데 아이들은 돌림노래의 묘미, 소리의 어우러짐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행복해 했다. 이런 일이! 가르치는 사람의 입장에서 사실 아이들이 그만큼까지 가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데 말이다. 노래 부르는 일이 즐겁고 행복하다. 음악실에 들어오면 어떤 노래든 흥얼거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교사로서 정말 행복한 일이다.
음악 수업 풍경 둘_ 편안하게 즐기는 아이들
사실 노래를 즐긴다 하지만 어지간히 극성맞은 아이들도 있다. 엉덩이가 의자에 붙어 있지 않고 늘 떠 있는 아이들도 한 반에 서넛은 된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음악 시간, 나름대로의 즐거움이 있다. 노래를 부르거나 리코더를 연주하거나 늘 몸을 흔드는 아이들도 있다. 그런 아이들을 긍정적으로 수업에 끌어들이는 일이 어쩌면 음악 시간에 필요한 것이 아닐까?
어느 날, 리코더 이중주 연습을 하는데 그 아이는 리코더를 부는 것이 아니라 몸을 흔들면서 음악에 맞추어 지휘를 하고 있다. 얼마나 예뻐 보이는지. 앞으로 나와서 해보라고 했더니 거침없이 잘한다. 아이들도 놀라고 그 아이 자신도 놀라고. 조금 쑥스러운 듯이 지휘를 하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 아이 담임 선생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했더니 웃는다. 다른 수업 활동에서는 상당히 애를 먹이고, 아이들과 싸워서 힘든 아이라는 것이다. 그런 아이가 음악 시간에는 편한 얼굴을 하고 수업에 참여한다. 물론 엉덩이는 반 정도 허공에 떠 있지만 말이다.
음악 수업을 하면서 아이들을 재발견하고 있다. 왜 학과 수업에 아이들이 일탈 행동을 하는지 또는 친구들과 싸우는지 생각해보면, 어쩌면 숨도 못 쉬게 아이들을 경쟁 교육시키고 있는 현실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아이들이 음악 시간에는 마음의 긴장을 풀고, 음악을 하나하나 몸으로 느끼면서, 더러 잘하지는 못하더라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나만 그랬을까? 사실 담임을 맡게 되면 다른 교과목 진도 나가기에 바빠 아이들과 함께 이렇게 여유 있는 음악 수업을 하기가 어렵다. 그런 내가 음악 교과 전담을 하면서 아이들에게서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다. 초등 교육에서 예체능 교과의 중요함을 실감하면서 말이다.
연극 - 놀라운 세상, 정답은 없다
처음에 글 의뢰를 받고 몹시 난감했다. 하나는 이 글을 현장 작업을 하는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하나는 내가 청탁 내용에 맞는 답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연극으로 직접적인 교육적 효과를 보기 위해서는 ‘교육연극’이란 것을 들여다보는 것이 빠를 수도 있다. 그래도 글을 쓰는 것은 다른 답을 쓰는 것이 의미가 있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다.
분명, 얼마 전까지 글 쓰는 이는 예술(연극)이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술의 공공성을 고민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생각이 달라졌다. 예술(연극)은 존재하는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지금은 존재 자체가 의미가 되는 연극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고 있다. 산업의 가치를 말하는 예술은 산업의 범주에 머물게 된다. 마찬가지로 교육의 가치를 말하는 예술은 교육 안에 머물게 된다. 요즈음 ‘예술산업’이란 말을 많이 쓰고 있는데, 예술이 고흐가 해바라기를 그리는 행위라면, 예술산업은 해바라기를 머그잔에 넣는 것이다. 예술산업을 강조하는 것은 예술가들에게 머그잔에 들어갈 그림을 그리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교육을 강조하다가는 자칫 이러한 우를 범할 수 있다. 예술은 경제적 가치, 교육의 가치와는 별개로 스스로 가치를 갖는 것이다.
아 이들에게 세상의 경이로움을 보여주자
자연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렇다고 사람들이 새소리나 물소리만 듣고 살 수는 없다. 나무와 기암절벽만 바라보며 살 수도 없다. 음악을 만들어 듣고,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 이보다 더 경이로운 것이 사람들 사는 세상이다. 사람 사는 세상의 경이로움을 예술로 표현한 것이 연극이다. 그래서 연극은 사람들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여러 사람이 더불어 보면서 공동체성을 확인하고 정서적인 안정을 느낀다. 더군다나 연극은 꼭 글을 알아야 하는 법도 없고 난해한 해석을 필요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고, 누구나 최고의 심미안을 나눌 수 있다. 어려서부터 연극을 볼 수 있다면 아이들은 연극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고 다양한 가치를 알게 된다. 특히 요즘처럼 혼자 자라는 아이들이 많을수록 공동체성을 담보하는 예술 감상은 더욱 필요하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어떻게 연극을 보게 할 것인가? 지금까지는 그 역할을 ‘가정’이 맡았다. 일부 관심 있는 부모, 엄마들만이 아이들이 연극을 보게 했다. 아니면 탁아 연극에 아이를 맡기든지. 아이들이 고루 연극을 보기 위해서는 연극이 학교로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누구나 밥을 먹듯이 연극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학교 급식만큼이나 중요한 문제다. 글 쓰는 이는 급식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아이들 먹을거리에 관심을 갖는다면 진정 잘키우기 위해서는 아이들의 문화적인 면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굳이 ‘문화복지’라는 말을 쓰지 않는 것은 이것이 복지보다 우선하는 문제라고 생각해서다.
정답 찾지 마! 네 마음대로 즐기고 생각해
문제는 ‘학교로 찾아가는 연극의 조건’이다. 보통 학교로 찾아가는 연극은 교육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어떤 교장선생님들은 예술가들에게 교과 과정을 이해하고 학교로 들어오라고도 하신다. 하지만 예술가들에게 교육의 일부를 맡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예술가들은 태생적으로 비교육적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육의 일부를 맡기겠다니! 이를 교육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교사들 몫이다.
학교로 찾아가는 연극은 연극의 본질을 갖추고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예술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연극적 재미와 심미안을 끌어올릴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다만 극장에서 보는 연극과는 달리 극장주의적인 요소가 덜한 작품으로 아이들이 상상력을 통해 예술적 심미안을 완성하는 작품이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학교에 강당이 있더라도 그곳은 공연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은 기본적으로 보는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예술을 통해 알게 된 것을 교육의 잣대로 재려는 순간 아이들은 바로 정답을 찾으려고 한다. 예술 감상의 본질은 정답에서 벗어나는 데 있다. 오답을 써도 된다는 통쾌함에 있다. 작품마다 다르겠지만 극 후 활동을 할 때는 정답이 나오는 방법은 피해야 한다. 충분한 시간을 갖고 서로 이야기하고, 이를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 본다. 낙서도 좋고 몸으로 표현하는 것도 좋다. 모둠으로 발표하는 것도 좋지만 그 안에 반드시 각자의 생각이 들어갈 수 있는 틀을 마련해야 한다. 자칫 다른 사람의 생각에 그대로 따라가게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으니까. 어떤 아이는 바로 답을 쓰고 어떤 아이는 바로 답을 내놓기 힘들어할 수 있다. 그래도 연극은 누구에게나 의미를 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학교에서 연극교육? 많이 보여주는 것이 방법이다!
문학 - 문학, 밥 먹고 똥 누듯 하자
우리 교육의 위기를 걱정하는 많은 이들은 북유럽 국가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전인全人과 학습의 양축이 고루 튼튼하다는 그 나라의 교육 바탕은 뜻밖에 예술과 노작勞作이다. 경험한 이들의 전언에 따르면 그들은 학교 일과는 물론 공식회의 자리도 시와 노래로 시작한다고 한다. 왜 굳이 시와 노래일까. 감수성과 정서의 연대 아니겠는가. 나는 정서의 회복이야말로 나와 타인을 이해하고 소통하게 만드는 근간이라고 믿는 편이다.
문학예술이 교육의 시작일 터, 그래서 나는 미운 놈일수록 악착같이 책을 사주고, 손잡고 시를 읽는다. 어릴 때는 누구나 천사의 시심詩心으로 충만하다. 푸른 하늘에 감동하고 거짓말도 모르며, 비 맞는 새에도 눈물짓는다. 그러나 중고생이 되고 어른이 되면서 더 많은 교양을 배우고 익힘에도 갈수록 ‘도덕적으로 타락’한다. 아무 데나 침을 틱틱 뱉으며, 속임수에 능란하다. 결코 내 것을 내주지 않는다. 왜 이렇게 사나워지는가. 시심을 잃어서 그렇다. 눈물이 왜 짠지 몰라서 그렇다.
문학 작품을 읽으며 꿈꾼다는 것의 가치
시심의 복원은 가능한가. 나는 문학으로 가능하다고 믿는다. 중학생 친구들과 시를 읽으면서 그것을 거듭 확인하게 된다. 봄바람 같은 아이들의 시심은 치열하되 따뜻하며, 솔직하되 겸손하다.
만원을 찾으려 서랍을 뒤지다보니, 귀하게 챙겨둔 백원짜리 동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의 고다니 선생님을 찾으려고 우리 학교를 돌아보니, 샘들의 단점만 눈에 들어온다. 강동원을 찾으려고 학교를 돌아보니, 그간 잘 지냈던 남자애들이 하나같이 다 밥맛이다. 내 욕심이 눈을 멀게 한다. (중2 노희연. 유승하의 「사라진 것들」을 읽고)
시와 소설, 전기를 읽으며 꿈을 꾼다는 것은 더없이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어교사로서 나는 ‘어쨌든 읽히고 보자’는 작금의 극성스런 독서교육 추세가 자못 염려스럽다. 논술을 위해서 문학을 읽고, 점수를 위해서 독서토론을 한다. 필독서라는 이름으로 적정 연령대조차 아무렇지도 않게 뛰어넘어, 초등학생에게 「메밀꽃 필 무렵」을 권하고, 중1에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요구한다. 그런 경우, 작품 안에서 사금파리처럼 빛나는 정신을 손톱만치도 맛보지 못한 채 지나치고, 정작 그 맛을 만끽할 무렵에는 전에 읽은 것이라며 젖혀버리기 쉽다. 이건 폭력이나 다름없다(그래서 도서목록은 철저하게 실명제여야 한다).
나는 문학교육이란 것이, 아이들이 스스로 즐겨 읽으며 성장할 수 있도록 그저 길을 터주고 손을 잡아주는 정도였으면, 그렇게 소박했으면 좋겠다. 문학교육만큼은 아이들과 어른들이 함께 읽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감동의 소통이 없는 문학교육은 십중팔구 ‘공부’로 빠진다. 그 순간, 문학은 아이들에게 감동은 개뿔, 그저 골치 아프고 괘씸한 존재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일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학교육이 도서실(관)과 궤를 같이 해야 하는 것도, 생활 속에 자리 잡아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과 만나게 하고 나를 어루만지는 문학
얼마 전 지역교육 답사차 풀무학교가 있는 충남 홍동을 다녀왔다. 거기서 내 눈길을 끈 것은 스무 명 남짓이 다닌다는 어린이집 아이들의 산책길이었다. 아이들은 하루에 한 번 꼭 산책을 하는데, 그들의 산책 코스란 것이 논길 밭길을 거쳐 (동네 어른들이 돈을 모아 만든) 헌책방도서관에 들르는 것이다. 거기서 아이들은 방금 만난 벌레에 대해 찾아보기도 하고, 동화도 읽는다. 아이들에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런 일과였다. 나는 그들의 산책길을 따라 걸으며 진실로 경배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들은 자라서 책 읽는 농부가 될 터였다. 그렇다. 도서관도, 책을 읽는 것도, 밥 먹고 똥 누듯 그렇게 자연스러워야 하지 않겠는가.
돌이켜보면 20년 넘는 교직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사서를 겸해(당시 사서가 없었다) 도서관 담당을 하던 때였다. 작은 도서실은 늘 아이들로 복작거렸고, 엎드려 만화책도 보고, 소설책도 읽었다. 그런 중에는 친구들을 끌고 와서 손수 책을 권해주는 친구도 있고, 당사자는 손사레를 치는데도 부득부득 ‘너무 재미있는 책’이라며 손수 대출 수속을 밟아 친구 손에 쥐어주는 아이들도 있다. 그곳에서는 서로가 스승이었다. 교실에서 문학수업은 그런 경험을 바탕으로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기분으로 딱 반 뼘만 더 깊게, 반 뼘만 더 넓게 가르치는 것으로 족했다. 문학은 삶의 이야기다. 문학을 통해 남을 만나고 세상을 만난다. 그렇게 소통한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 자신을 어루만지게 한다. 어찌 문학이 단순히 언어와 수사만의 문제이겠는가.
아, 이쯤에서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오프라인 시절, 책 뒤에 붙어 있던 도서대출카드- 개똥이도 읽고 말똥이도 읽었다는, 읽은 이들의 족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대출카드는 그것만으로도 한 편의 시였다. 만나지 않았어도 만난 듯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어도 많은 이야기를 나눈 듯한 정서의 소통, 이것이야말로 문학의 속살이 아니겠는가. 그런 점에서 디지털도서관은 소중한 것을 몸에서 떼어버렸다. 어디 도서관뿐이랴. 나는 문학, 책에 관한 한 좀 촌스러웠으면 좋겠다. 도서실 문을 열 때 그 특유의 책 냄새와 전자책의 기민함을 어찌 바꿀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