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폭력의 본질을 응시하는 두 시선 - <작은 연못>과『노근리 , 그 해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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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9 22:58 조회 9,864회 댓글 0건본문
1950년 7월, 노근리에서 벌어진 학살을 덮으려는 음모와 진상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우리 현대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한다. 1960년 4.19 혁명 직후 국회에서 민간인 학살
을 파헤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5.16 군사 쿠데타로 무산되자 노근리 생존자들은
수십 년간 숨죽여 살았다. 이토록 진실이 은폐된 것은 미국의 비호 아래 권력을 쥐고
반공을 국시로 삼은 정권에 의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기 때문이다.
영화 <작은 연못>의 홍보 필름에도 등장하듯 1999년 9월, AP통신의 특종 기사는
망각과 무관심의 늪으로 빠져들던 노근리의 진실을 전 세계에 알렸다. 당시 미국 기
자들과 함께 공동 취재로 이뤄낸 탐사보도로 2000년 퓰리처상까지 받은 최상훈 기자
는 “억울한 사람들의 사연을 무시하고 보도해주지 않는 것 또한 언론의 자유를 침해
하는 것.”이라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이처럼 국익을 앞세우는 국가 권력, 이와 결탁한 대중매체가 역사의 진실을 은폐
하거나 왜곡하려 들수록 그 역할이 중대해지는 것이 예술의 힘이다. 경술국치 100년,
한국전쟁 60년을 관통하는 2010년에 개봉한 영화 <작은 연못>, 그리고 을사늑약 100
주년이던 2005년에 창작동화로 재구성한 『노근리 그 해 여름』을 통해 전쟁 폭력의 본
질을 꿰뚫어보고 반전과 평화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져볼 때다.
‘전쟁의 궁극적 피해자는 민간인, 바로 우리!’들이 모여만든 영화 <작은 연못>
영화 <작은 연못>은 <JSA>(2000)를 만든 명필름에서 2001년 처음 기획했다. 4년에 걸친 현지답사와 생존자 인터뷰
를 통해 윤곽을 잡아갔다. 2003년 출간된 『노근리 다리』와 1994년에 나온 실화 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를
토대로 3년 넘게 시나리오 작업에 몰두했던 이상우 감독은 2006년 5월에 설립된 노근리 프로덕션에 142명의 배
우와 229명 스태프를 끌어모았다. “전쟁의 궁극적 피해자는 민간인이다. 바로 우리다.”라는 이상우 감독의 설득에
배우와 스태프들은 전적으로 공감하여 움직였다 한다.
연극 영화계에서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바쁜 스케줄을 쪼개어 촬영장에 나와 마치 자신들이 그날, 노근리에서 무
고한 죽음을 맞은 사람들처럼 죽어나가는 연기를 했다. 후반 작업에서도 뜻을 함께 하는 주위 사람들이 장비 대여 등
현물을 투자해 힘을 보탰다. 총 8년의 제작기간 동안 10억이라는 초절정 저예산으로 영화를 완성해 화제를 모았다. 하
지만 문제는 배급, 작은 영화 <작은 연못>은 단관 개봉, 단기상영에 그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해 여름, 노근리에 존재했던 모든 사람들이 역사의 주인공이었음을 강조하려는
듯 대부분의 장면들은 롱테이크(하나의 컷을 오래 지속시키는 촬영 방법) 롱샷(카메라를
멀리 위치시켜 전경을 잡음으로써 각각의 피사체를 작게 보이게 하는 카메라 기법)으로 잡았다.
영화 <작은 연못>을 본 영화평론가들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전쟁의 맨 얼굴’, ‘전쟁영화 아닌
재난영화’, ‘한편의 연극 같고 동화 같지만 이것은 실화’, ‘서사 없는 영화, 논리 없는 전쟁’이라는
단평을 남겼다.
정신없이 짐을 싼 마을 사람들은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하늘 위로 지나가는 헬기를
보며 미군이 남쪽으로 피난을 시키기 위해 도라꾸(트럭)를 몰고 올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듯 미 전투기에서는 무고한 양민들을 향해 폭탄이 쏟아
진다. 무차별 떨어지는 폭탄 세례로 누군가는 머리가 날아가고 누군가는 온몸이 갈기
갈기 찢겨나간다. 모두가 피 흘리며 쓰러져간 쌍굴 다리 위 철로변, 혼자 남은 어린 아
이 뒤로 미군이 총을 들고 압박해온다. 갑작스레 부모를 잃고 공포에 질린 아이는 울
부짖지만 그 울음에 답해줄 이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노근리나 이태원, 양주에서의 살인사건 모두 피해자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가해자의 실체와
과오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거나 가려져왔다. ‘미국에 의한’, ‘미국(미국 병사)을 위한’, ‘미국의’
조사와 평결만이 유효할 뿐이라는 걸 영화와 현실이 잘 보여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미군의 인도에 따라 쌍굴에 들어가 몸을 숨긴다. 뭔가 잘못된
게 아니냐며 미군을 향해 “We are innocent people!”, “Help me!”라고 호소해보지만
먼저 소리를 내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은 한발 앞서 총알받이가 된다. 얼마 안 있어 굴
안쪽으로도 기관총 난사가 이어지고 굴 안은 아수라장, 생지옥으로 변한다.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어둠 속에 쭈그리고 앉아있는 젊은 아버지의 뒷모습을 클로즈
업으로 잡은 장면이다. 아기 울음소리 때문에 총알이 날아든다고 사람들이 원망하자
아버지는 아기를 밖으로 데리고 나와 질식사시킨다. 아이의 울음소리는 그치지만, 아
버지의 속울음은 애절하기만 하다.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묘사되진 않았지만 시체로 바리케이드를 쌓아 총알을 피해
다니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응고된 물로 갈증을 달래면서까지 살아남으려 발
버둥친 끔찍한 역사, 이런 어처구니없는 전쟁 폭력은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 2000
년을 전후해 쏟아져 나온 노근리 관련 연구물과 다큐멘터리, 소설에서는 공통적으로
미국의 패권주의와 뿌리 깊은 인종차별 의식을 지적한다.
이태원 햄버거가게에서 발생한 살인사건 범인을 추적해보지만 미궁으로 빠져든
<이태원 살인사건>(2009), 주한미군의 무책임한 환경오염물 방류사건을 모티프로 삼
은 <괴물>(2006) 그리고 2002년 6월의 여름, 신문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던 여중생 장
갑차 살인 사건의 재판 과정과 평결 역시, 헌법상 주권국가이면서도 소파협정, FTA 등
에서 드러나듯 미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불평등 조약으로 일관해온 우리의 현
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다.
노근리나 이태원, 양주에서의 살인 사건 모두 피해자는 엄연히 존재하는데 가해
자의 실체와 과오는 정확히 드러나지 않거나 가려져왔다. ‘미국에 의한’, ‘미국(미국
병사)을 위한’, ‘미국의’ 조사와 평결만이 유효할 뿐이라는 걸 영화와 현실이 잘 보여
준다. 이런 힘의 질서에 따르자면 미국인의 무기에 의해 희생된 피해자와 유족에게는
‘살인’과 범죄로 기억되지만, 총이나 칼, 장갑차 등 무기를 휘두른 가해자와 이를 비호
하는 세력에겐 불가피하거나 우발적인 실수 심지어 ‘청소’1)에 불과한 사건으로 기억
되는 두 개의 시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1) 미군이 우리나라 사람을 호칭하는 ‘국(kook)’이라는 단어는 ‘찌꺼기’라는 뜻이다. 이런 용어를 사용하는 미군의 집단 무의
식 속에는 건국 초부터 자신들이 압살해왔던 인디언과 흑인에 대한 배타적 시선이 들어있다. 인민군이나 남한의 민간인이나
미군의 입장에선 인디언과 다름없는 똑같은 황인종이며 이런 유색인종은 제거해야 마땅한 쓰레기, 짐승, 찌꺼기로 취급되어왔기에 그들을 죽이는 것은 단지 청소로 여겨질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하다.(권석우,<인종주의와 문학적 재현-노근리에서 미이로> 376쪽, 역사비평, 2007년 봄호)
‘여자, 아이’의 시선으로 전쟁의 참혹 성과 후 유증을 그린 창작동화 『노근리, 그 해 여름 』
한편 문학으로 재현된 『노근리, 그 해 여름』은 어린이를 대상으로 역사소설 쓰기에
주력해온 김정희 씨의 작품으로 사계절출판사에서 아동문고로 나왔다. 1994년에 나
온 실화소설 『그대, 우리의 아픔을 아는가?』(정은용 지음), 2002년에 나온 만화 『노근
리의 진실』(정은용 글, 박건웅 그림) 그리고 AP 탐사보도를 토대로 2001년과 2003년,
영문판과 번역본으로 출간된 『노근리 다리』(최상훈 외 지음)와 정은용 씨의 친아들
정구도 씨가 2003년에 펴낸 『노근리는 살아있다』 등이 모두 ‘남자, 어른’의 시선으로
1950년 전쟁의 폭력성을 고발했다면 『노근리 그 해 여름』은 ‘여자, 아이’의 시선으로
전쟁의 참혹성과 후유증을 심도 있게 그린 창작 동화라는 점이 돋보인다.
은실이는 폭격으로 눈이 빠진 수옥이가 눈알이 덜렁거려 뛰지 못하겠다며 자기 손
으로 주먹만 한 눈알을 떼어 던져버리는 장면을 목격하는가 하면(『노근리 그 해 여름』,
48쪽) 쌍굴 안에서 갈증을 달래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시체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응고
된 물을 목으로 넘긴다.(같은 책, 68쪽) 시체가 널린 죽음의 굴 안으로 들어온 파리 떼를
보며 마음대로 굴을 드나들 수 있는 파리 신세를 부러워하며 “내가 파리였다면 마음대
로 총알을 피할 수도 있고 굴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나갈 수 있을 텐데.”(같은
책, 57쪽)라며 파리 목숨보다 더 못한 대접을 받는 노근리 사람들을 부각시킨다.
“시체는 썩어서 시퍼렇게 부풀어 오르고 파리가 날고 구더기가 바글댔다. 시체 썩
는 냄새와 피비린내에 숨이 막혔지만 이제 은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시체로 빙
둘러가면서 벽을 쌓아놓은 뒤 은실이는 할머니와 시체 사이에 들어가 솜이불을 덮고
죽은 사람처럼 누워있었다.”(같은 책, 75쪽) “동무들 이제 해방되었소!”라는 인민군
의 목소리에 눈을 뜬 은실이는 한쪽 옆으로 밀쳐진 엄마의 시신 위로 파리 떼와 구더
기 떼가 잔뜩 붙어있는 것을 보고(같은 책, 86쪽) 어쩔 줄 몰라 하지만 할머니의 재촉
에 따라 시체 무더기를 밟고 굴 밖으로 빠져나온 후 실어증에 걸린다.
『노근리 그 해 여름』은 양민 학살의 참혹한 장면만이 아니라 전쟁의 상흔과 후유
증을 보여주는 데에도 세심한 공력을 기울이고 있다. 폭격으로 학교가 날아가고 임시
천막 교실에서 담임선생님이 죽은 아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울음소리가 터져 나
온다. “우리 민족을 전쟁의 지옥으로 몰아넣은 삼팔선은 결코 우리가 원한 것이 아니
야. (중략) 미국과 소련이 제멋대로 우리나라를 갈라놓고 점령군으로 들어와 전쟁까
지 치르게 했지.”라고 역사의 비극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고 이를 되새기는 여자 선
생님의 모습(같은 책, 190~191쪽)은 우리 아이들이 올바른 역사를 배워야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역설하는 작가의 모습과 겹쳐진다.
하지만 이토록 비극적 사건이 일어난 배경과 원인에 대해 소신껏 이야기를 들려주
던 선생님은 다음 날 느닷없이 학교에 들이닥친 경찰에게 질질 끌려간다. 아이들이 또
한 번 울음을 터뜨리자 옆 반 선생님이 들어와 아이들을 달래며 “애들아 미군이 와서
한 일은 절대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말 한 마디 때문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라며 말
조심을 시키는 모습(같은 책, 192쪽)은 우리 현대사에서 빈번히 발견되는 좌우대립의
소용돌이와 후폭풍을 두려워하는 무기력한 어른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일들이 벌어지기에 앞서 담임선생님은 출석을 불러도 대답을 못하는 은실이
를 따로 불러 “넌 벙어리가 아냐. 충격이 너무 커서 잠깐 말을 잃어버렸을 뿐, 마음속
으로만 고통을 안고 살지 말고 그걸 풀어내라.”며 일기장으로 쓸 공책을 선물하고(같
은 책, 189쪽), 수옥이 이름을 부를 때엔 수옥의 없어진 한쪽 눈을 보고 비명을 지르며.
“얼마나 아팠을까? 살아갈 날이 구만리인데…….”(같은 책, 187쪽)라는 말로 상처받
은 수옥을 위로한다. 이처럼 작가는 아이들을 차례차례 보듬어 껴안는 여자 선생님의
모습을 통해, 진실을 깨닫는 지혜로운 시선만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과 고통을 어루만
지는 연민의 시선을 느끼게 한다.
평화란 깨달음과 연민의 시선으로 천릿길을 함께 내딛는 것
이상 영화와 소설을 통해 살펴본 것처럼 노근리 사람들은 우리 역사 속에서 두 번 죽은
것일지도 모른다. 건국 초기 인디언을 학살하던 제7기갑 부대의 전통을 잇는 미군들이
들어와 발포 명령을 내려 떼죽음을 맞이했고, 우리(우리 정부)는 미국(미국 정부)이 두
려워 진상 규명을 외면하고 애써 침묵해왔기 때문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반세기 넘게
못 본 체 했고 또 다시 망각의 늪으로 빠져드는 1950년 노근리, 그 해 여름의 진실을 새
롭게 기억하고 말하는 일이다. 이것은 제2, 제3의 노근리인 베트남, 이라크, 팔레스타인
등 지구촌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전쟁 폭력에 대해 공분하고 희생자들을 껴안는 평화
감수성을 갖자는 선언이기도 하다. 『노근리 그 해 여름』에 등장하는 여자 담임선생님
처럼 역사의 진실을 인식하는 ‘아는’ 눈과 공감과 비탄의 눈물을 흘리는 ‘우는’ 눈, 즉
지혜로운 시선과 연민의 시선을 공유할 때 평화감수성은 한층 높아질 것이다. 또한 영
화 <작은 연못>의 마지막 환상 신에 등장했던 노래 <천리길>의 가사처럼, 멀지만 가야
할 길이기에 흙먼지 마시면서 한걸음 한걸음 함께 길을 내어 가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
다. “침묵은 괴롭히는 사람 편에 서는 것”이며 “평화는 신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 아니
라 인류가 인류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다.”라는 엘리 위젤의 말을 되새길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