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청소년도 그림책을!]읽기 부진 학생을 위한 그림책수업 - 그림책 읽는 특별한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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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2-04 22:10 조회 11,749회 댓글 0건본문
읽기 부진 학생에게 그림책을?
1999년, 신규교사였던 나는 이른바 ‘학습부진아 수업’을 맡게 되었다. 선배 선생님들도 그 수업에 대해서만은 적극적인 도움은 못 주셨던 기억이 난다. 그분들 역시 기초 학력부족과 산만함에 무기력까지 겸비한 아이들을 도와주기가 어려우셨을 것 같다. 10여 년이 지난 요즘도 나는 여전히 학습결손과 무기력이라는 블랙홀에 빠진 학생들과 만난다. 그 학생들은 맨 뒷자리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앉아 있다. 물론 필기구도 책도 없다. 교사가 학습지를 주면 마지못해 이름을 쓰고는 꾸벅꾸벅 졸다 엎드려버린다. 나는 이 학생을 여러 번 깨우고 수업을 함께 하려 하지만, 결국엔 어쩌지 못한 일도 많다. 교사는 과연 이 학생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우연치 않은 기회에, 이런 고민을 했던 선생님들이 ‘읽기 부진 학생을 위한 독서 성장프로그램’을 만들게 되었다. 초중고 선생님들이 함께 모여 고민한 끝에 그림책을 활용해 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초등 선생님들은 그림책 수업에 익숙하고 나를 포함한 다른 선생님들도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많아 그림책 활용 수업에 찬성했다. 다만 무기력한 중고생들이 그림책을 과연 손에 들 것인가가 걱정이었다. 고민 끝에 우리는 방과 후에 소규모로 수업을 진행하자고 했다. 교사가 품을 들여 그림책을 읽어주고 읽는 방법도 가르쳐주기로 하고, 한 명이 오더라도 그 한 명부터 시작해보자는 것으로 생각을 모았다. 그래서 중고생들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사춘기’를 주제로 잡아 ‘자존감, 친구, 열등감, 용기, 가족, 오해, 배려’ 등의 이야기를 찾았고, 그 이야기에 어울리는 그림책을 찾았다. 중고생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이기에 긴 이야기 글도 읽되 이야기 글과 주제가 상통하는 그림책을 먼저 읽히기로 계획했다.
이렇게 준비된 그림책 수업은 각기 다른 초중고에서 2010년 1학기 동안 진행되었다.
솔직한 생각을 서로 나누는 자리
나는 상담선생님이 운영하는 ‘자기주도학습반’ 1학년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했다. 학생들은 이미 서로 매우 친해서 편안하게 그림책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첫 시간에는 여덟명 내외 학생들에게 『발레리나 벨린다』(에이미 영, 느림보)를 읽어주었다. 이 그림책 주인공 벨린다는 발이 아주 큰 소녀다. 경연대회에서 심사위원들은 벨린다의 큰 발만 보고 그녀가 발레를 할 수 없다고 단정한다. 발레를 포기한 벨린다는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식당 밴드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스스로 행복해 하며 추는 춤을 보는 순간, 식당 손님들은 물론 심사위원들도 매우 열광한다. 결국 벨린다는 크고 멋진 무대에서 행복한 공연을 하게 된다. 처음엔 읽어주는 나도, 듣는 학생들도 좀 쑥스러웠지만 과장하지 않고 차분하게 읽어 가니 서로가 차츰 익숙해졌다. 그림책을 읽어줄 때는 중간에 읽기를 멈추고 질문을 했다.
“심사위원들은 벨린다의 춤을 보지도 않았는데 왜 벨린다가 발레리나가 될 수 없다고 했을까요? 심사위원의 판단은 옳은가요?”
“발레를 그만두고 식당에 일하러 가는 벨린다의 표정을 보세요. 벨린다의 마음은 어떠할까요?”
그림책을 읽어주는 중간에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도록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의외의 효과가 있었다. 학생들은 좀 더 자세히 찬찬히 그림책을 보았고, 질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도 했다. 그림책을 읽고 난 후 학생들과 간단히 내용 확인 학습활동을 하고 나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러 학생들이 벨린다의 행복해 하는 표정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했다. 고등학생이 되면 냉소적으로 보이거나 강해 보이고 싶어하는데 벨린다는 자신의 진심을 자연스럽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너무도 행복해 하는 표정을 보니 솔직히 부럽다는 말도 했다. 또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신은 잘하는 것이 없어서, 또는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을 몰라서 답답하다는 학생이 많았다. 자신이 처한 어려운 환경, 자신이 했던 큰 실수 등도 솔직하게 말하는 자리가 되었다.
오, 아이들이 말랑말랑해지기 시작했다!
둘째 시간에는 그림책과 주제가 연결되는 「그녀의 미니스커트」(박경철, 『시골의사의 아름다운 동행 2』, 리더스북)를 엮어서 읽어보았다. 다 읽고 나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잃기 싫은 것 등에 대해 이야기도 해보았고 『발레리나 벨린다』와 연결지어 이야기도 해보았다. 그림책 수업이 진행되는 동안은 정규 수업에서는 엎드려 있던 학생들이 집중해서 수업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도서관』(사라 스튜어트, 시공주니어)에서 몰입하는 사람의 아름다운 모습을 구경했다. 『쌍둥이 빌딩 사이를 걸어간 남자』(모디캐이 저스타인, 보물창고)에서는 무모하지만 용기 있는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수호의 하얀 말』(오츠카 유우조 글, 아카바 수에키치 그림, 한림출판사)에서는 마음을 나누는 서로의 아름다운 모습을 읽어냈다.
함께 프로그램에 참여한 선생님은 학력중점반 학생들에게 『줄무늬가 생겼어요』(데이빗 셰논, 비룡소)를 읽어주셨다. 알록달록 예쁜 색깔과 무늬 그림, 작가의 엉뚱한 상상력이 무게 잡는 남자 고등학생들도 웃게 했다고 한다. 그림책과 함께 「난 내가 마음에 들어」(한비야, 『그건 사랑이었네』, 푸른숲)를 엮어 읽히셨다. 그림책 주인공과는 달리 자존감이 높은 한비야 씨를 보고, 학생들도 자신의 긍정적인 특징들을 찾아내며 즐거워했다고 한다. 또 다른 공업고등학교(공부는 아예 내려놓은 학생들이 다수인 학교)에서도 방과 후에 그림책 수업을 진행했다. 『꽃이 피는 아이』(옌 보이토비치 글, 스티브 애덤스 그림, 느림보)와 소설 「노린재」(정윤혜, 『소설쓰기 수업』, 나라말)를 함께 읽으며 배려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무화과』(크리스 반 알스버그, 미래아이), 『밥 안 먹는 색시』(김효숙 글, 권사우 그림, 길벗어린이)와 단편 소설「원숭이 발」(윌리엄 위마크 제이콥스)을 읽으며 인간의 욕심에 대해 짧은 글도 써 보았다.
『도서관』과 『집에 가는 길』(심미아, 느림보)을 읽고 탁상달력을 재활용하여 그림책도 만들었다. 담당선생님은 그림책 수업이 진행될수록 반항하던 학생들의 거친 모습이 조금씩 말랑말랑해지고, 학생 스스로 또 읽고 싶다고 말하게 된 것이 그림책 수업의 큰 성과라고 하셨다.
그림책 수업, 여유롭게 진행해 보세요 이 수업에서 얻은 성과는 그동안 수업에서 소외되던 학생들이 스스로 수업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또 그림책 수업이 학습 전략을 최우선으로 하는 수업은 아니었지만, 교사가 직접 그림책을 읽어주며 읽는 방법을 가르쳐준 것, 연관된 길고 어려운 글도 읽어보게 한 것은 읽기 측면에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학교마다 상황이 다르니 그림책 수업이 맞지 않는 경우도 있고 선생님의 품이 생각보다 더 들 수도 있다. 각 학교의 상황을 고려하여 앞서 제시한 제재 이외에도 다양한 이야기 글과 그림책을 활용하면 수업이 더 풍성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림책만 읽기엔 지루하다 싶으면 탁상달력 그림책 만들기, 꿈의 조각보 만들기, 책 보드게임 만들기 같은 활동을 함께 해도 재미있다. 예산이 좀 넉넉하면 서점에 함께 가서 책을 고르고 사 보는 것도 좋다. 이 수업에서 그림책 첫 장을 읽어주는 순간, 서로가 손발이 오글거리긴 한다. 이때 서로 한번 웃고 나서 차분하게 읽어 내려가면 어느새 마지막 장에 도달하게 되니 여유롭게 진행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