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오늘의 독서교육] 책 왜 읽어야 할까? 어떻게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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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6-06 14:07 조회 6,826회 댓글 0건본문
김민웅 성공회대 교수
1. 독서능력의 퇴화
스마트폰의 시대다. 게다가 날로 더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디지털 회로의 사회다. 긴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 문자의 세계는 지금 패배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술의 파격적인 발전이 오랜 인류문명의 기초를 허물고 있는 충격적인 역설이 일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위기의식은 일부 소수만 가지고 있다. 출판시장이 빈사 상태가 되어도 그것이 자신의 정신적 죽음과 직결된 사건인지 대다수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1. 독서능력의 퇴화
스마트폰의 시대다. 게다가 날로 더 빠른 속도를 추구하는 디지털 회로의 사회다. 긴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는 문자의 세계는 지금 패배하고 있는 중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술의 파격적인 발전이 오랜 인류문명의 기초를 허물고 있는 충격적인 역설이 일상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위기의식은 일부 소수만 가지고 있다. 출판시장이 빈사 상태가 되어도 그것이 자신의 정신적 죽음과 직결된 사건인지 대다수 사람들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젊은 세대에게 문자는 이제 액정화면 안에서 나누는 교신 기호정도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보다 풍부한 정보와 성찰의 기록을 담는 문명의 체계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있는 중이다. 인간이 두 발로 서서 공동체를 이루고 문자를 발명하기까지의 그 긴 세월과 문명의 축적이 가져온 진화의 수준이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저술–출판–서점–도서관–독서’로 유기적 기능을 하는 독서 공동체 내지 지식 공동체는 다음 세대에게 남기고 갈 문자 DNA를 보존하는 일이 다급해졌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기술의 진보를 폐기하면 되는가? 디지털의 논리를 아날로그로 바꾸는 운동을 펼치면 독서 공동체의 현실은 개선될 수 있을까? 당연히 아니다. 핵심은 ‘독서 능력’이다. 그리고 독서 능력의 사회적 확대와 이에 대한 가치의 재발견이 필요하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위기의 정체는 스마트폰의 등장에 의한 문자문명의 파산이 아니라, 기술의 진보가 문자 문명의 지속적인 발전을 대체할 수 있다는 무지의 양산이다.
두꺼운 책은 본래 읽기 어렵지만 이제는 그런 종류의 서적이 생존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또는 아예 출판의 기회조차 없다. 이것은 그만한 이해력을 가진 지성인이 소멸되고 있는 것과 통한다. 책의 두께는 얇아야 하고 장편은 과거의 유물이며, 복잡한 사고를 요구하는 저술은 출판기피 대상이다. 깊고 넓고 멀리 내다보는 생각은 단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그걸 기를 수 있는 문명적 토대가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라가는 책들의 대체적인 흐름은 시대의 변화를 이겨내는 힘을 가진 것들이 아니기 십상이다. 그 당시의 관심을 반짝 소비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렇듯 한 시대의 낡고 구태의연해진 정신적 각질을 벗겨내고 새로운 생각과 가치를 태어나게 하는 문자문명의 동력은 점차 위축 또는 제거되고 있다. 인기몰이로 책이 상품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진지하고 숙성된 사고를 만나는 것은 희귀한 일이 되고 있으며, 이런 상황이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아니라 ‘참을 이유가 없는 가벼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이 되는 현실에서, 독서능력의 퇴화는 필연이다.
전 사회적인 독서능력 퇴화라고까지 할 수 있는 작금의 현실은 결국 무엇을 낳게 할 것인가? 인간은 수십만 년이라는 세월이 걸리는 생물적 진화를 넘어서서 그보다는 훨씬 압축된 시간과 방식으로 사회문화적 진화를 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만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중심에는 문자와 독서능력이 두 기둥처럼 서서 문명이라는 집을 버텨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기둥이 쇠락해가고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독서공동체 확산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도서관이 파괴되고 교육기반이 무너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책을 불태워버리는 야만의 문이 열리는 것과 다름없다. 고정관념에서 해방되지 못하고, 여론조작의 통제망을 벗어나지 못하며 인간과 세상을 윤리적으로, 그리고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힘이 억제된 사회에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독서의 과정에서 이러한 능력이 자라나기 마련인데 그걸 길러낼 통로를 스스로 막아버린 꼴이 되는 것이다.
2. 읽기는 제대로 되고 있을까?
2. 읽기는 제대로 되고 있을까?
자, 그렇다면 독서를 하면 문제는 해결되는 것일까? 물론 해결책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기본적인 시작을 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자세로, 어떤 사유를 통해 독서를 자기화하느냐는 문제가 남는다. 사실 이 문제는 일단 독서공동체라도 제대로 생겨나고 그 품질을 높여나가는 과정에서 풀어갈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기본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그 다음 단계를 고민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어떻게 독서하는가에 따라 독서 공동체를 성장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순서의 문제가 아니라 독서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문제가 될 수 있다. 책만 잔뜩 갖다 놓고 읽으면 독서 공동체가 자라나는 것은 아니다.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아이들, 젊은 세대가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아 책 읽는 생활을 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같은 책을 읽어도 책 읽기의 과정에서 정신적 긴장과 흥분, 그 성과의 감격이 이루어지는 책 읽기가 된다면 독서 능력을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은 도처에서 탄생이 가능하다.
결국 독서는 그 독서행위가 보다 폭넓은 독서지도(讀書地圖)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회로를 확대 및 진화시키는 일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논술교육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모델이 된다. 애초에 시작은 비판적 문제 제기 능력, 논리적 사고의 힘을 기르겠다고 한 논술교육이 대학입학시험과 연계되면서 하나의 정형화된 틀이 생겨나더니 그걸 기초로 이른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중심으로 논술기술 가르치기로 전락하였고 그 본래의 취지가 무너져 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결국 이 사례는 독서의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무조건 책만 많이 읽히고 지식을 머리 안에 쌓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의 회로와 문자 체계가 서로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가 독서 또는 지식 공동체 육성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국 독서는 그 독서행위가 보다 폭넓은 독서지도(讀書地圖)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회로를 확대 및 진화시키는 일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논술교육은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모델이 된다. 애초에 시작은 비판적 문제 제기 능력, 논리적 사고의 힘을 기르겠다고 한 논술교육이 대학입학시험과 연계되면서 하나의 정형화된 틀이 생겨나더니 그걸 기초로 이른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중심으로 논술기술 가르치기로 전락하였고 그 본래의 취지가 무너져 가는 것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결국 이 사례는 독서의 방식이 얼마나 중요한 현안이 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무조건 책만 많이 읽히고 지식을 머리 안에 쌓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머리의 회로와 문자 체계가 서로 어떻게 만나게 할 것인가가 독서 또는 지식 공동체 육성의 핵심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과거 동양에서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篇意自顯)’이라고 해서 뜻을 몰라도 자꾸 읽다보면 의미를 알게 된다는 독서방식이 오랫동안 권위를 떨쳐왔다. 물론 같은 서적을 수없이 반복해서 읽다보면 성찰의 여지가 생겨 그것으로 뜻을 깊게 캐어 들어가라는 가르침이기도 하다. 하지만 책에 대한 도전적 질문이 허용되기보다는 책의 권위를 우선적으로 설정하고 독서하는 방식이 주였던 시대의 산물인 이러한 독서법은 우리의 사고체계를 역동적으로 만들기보다는 순응적인 방향으로 이끈다. 자기 삶에서 터져 나오는 절실한 문제나 자신이 제기하는 질문으로 책에 다가서기보다는 책이 정해놓은 화두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방식이 된다.
그 어떤 문장이나 저술내용도 하나의 해석으로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읽는 이의 질문이나 문화적 환경, 또는 지식 체계의 특징에 따라 수많은 가지치기가 이루어진다. 신과는 하등 관련이 없는 그리스의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 경전과 만나면서 중세 서구 신학의 뼈대가 되거나, 이슬람의 문명이 번역하고 유럽에 전수한 그리스 철학이 중세신학을 뒤집는 르네상스의 기둥이 된 것은 이러한 독법의 중요성을 입증해준다. 어디 그뿐인가? 같은 신화를 읽고 문학작품의 모티브를 발견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신화 탄생의 정치적 조건과 역사적 특징을 주목하는 이가 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라는 문장에서 ‘그’에 방점이 찍히면, ‘아니 어떻게 그 사람이?’라는 의미가 부각될 수 있으며, ‘이런’이 초점이 되면 ‘어떻게 그런 말을?’이라는 내용이 압도할 수 있다. ‘했다’에 관심이 모이면 ‘이 말은 사실이다’라는 주장이 메시지의 핵심이 될 수 있다. 간단한 문장 하나도 그 해석의 다양함이나 의미의 유동적 성격이 있는데, 책 하나를 읽으면서 그 해석의 과정이 지니게 되는 의식의 변화무쌍함과 시각의 풍요로움을 만들어가는 것은 대단히 중요해진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답을 찾는 훈련이 강조된 나머지, 자신의 생각, 자신의 시선, 자신의 성찰, 자신의 해석을 발전시키는 쪽으로는 취약하다. 더군다나 텍스트의 권위를 전제로 하고 독서하도록 길러져왔기 때문에 텍스트와의 비판적 대화를 펼쳐나가는 역량이 깊지 못하다. 이런 풍토에서 대표적인 독서교육이랄 수 있는 논술교육은 이를 해결하기보다는 영합해서 모법답안의 틀을 제작해버리고 말았으니 독서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진정한 목표는 훼손되기 마련이다.
가령 ‘1492년, 콜럼버스는 ( )을/를 발견했다.’라는 문장에 있는 빈 칸에 들어갈 정답은 ‘아메리카’이다. 그러나 정말 정답일까?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거쳐 카리브 해안의 섬에 상륙했을 때, 그리고 그 이후에도 콜럼버스는 아메리카가 아니라 인도(인디아)를 발견했다고 믿고 있었고, 당시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였으니 답은 아메리카가 아니다. 그러니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인디언이라고 했던 것 아닌가? 허나 인디언은 인도 사람이라는 뜻인데 어디 그게 맞는 호칭인가? 이 대륙의 이름이 아메리카가 된 것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이름을 붙인 훨씬 이후의 일이다. 또한 ‘발견’이 맞는 말인가? 상륙 내지 이후의 벌어진 일을 보면 침략과 정복의 시작이 도리어 역사적 현실과 통한다.
좀 더 나가본다면, 이 1492년이라는 시기는 대체 어떤 성격의 때였는가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왜 하필이면 콜럼버스이고 그가 이탈리아 베니스 출신이 아니고 제노바 출신인 까닭은 또 무엇인가? 덧붙여, 콜럼버스의 대서양 항해를 지원한 것은 포르투갈이 아니라 스페인인 이유는 무엇이며, 이로써 이후 세계사는 어떤 변화와 고비를 넘게 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묻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질문들이 독서의 깊이와 범위를 심화, 확대할 수 있게 되고 독서의 즐거움과 기대치를 높여나갈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독서는 그 독서행위가 보다 폭넓은 독서지도(讀書地圖)를 만들어내고 사고의 회로를 확대 및 진화시키는 일에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독서는 씨앗을 뿌려 그것이 자라나면서 줄기가 생겨나고 뿌리가 뻗고 가지가 펼쳐지는 과정과 닮았다. 이렇게 되면, 읽기는 읽는 이 자신이 하나의 도서관이 되는 작업이며 지식의 체계를 스스로 세워나가는 일 뿐만이 아니라 새로운 발상과 성찰의 내용을 뇌의 주름살에 축적해나가는 자기 만들기가 된다.
이러한 독서방식이 독서 공동체에 공유되면서 함께 논의하는 힘이 성장하면, 그것은 저술과 출판기획에 영향을 미치고 책의 수준을 향상시킬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시민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까지 이루어낼 수 있다. 여기서 시민 권력이라는 말은, 한 공동체의 현실과 미래를 주체적으로 비판적으로 사유하고 실천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민의 등장과 결속, 그리고 그 위력을 발휘하는 상황 전체를 아우르는 의미다. 이러한 사회구성원이 존재해야 그 시대는 발전할 수 있다.
아니면, 책은 많이 읽어도 그것이 기존질서와 기성의 사고방식에 흡수되는 자세만 훈육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독일과 일본의 파시즘 태동의 상황에서 우리가 보았던 것은 바로 이러한 무비판적, 비성찰적 독서집단의 양산이었다. 최고의 독서 수준을 과시했다고 하는 사회의 정치적 결말이 자멸적 자기해체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두고두고 반면교사가 된다. 이는 유대교 경전에 대한 독서능력의 독점적 지배세력이 그 사회의 진화를 봉쇄했다는 것에 반격을 가했던 나사렛 예수나 막대한 양의 유교 경전 독파로 지배계급이 되는 길을 열었던 동양의 봉건질서가 어떤 역사적 억압과 이후의 몰락을 겪었는지를 살펴봐도 판단이 되는 문제다.
3. 철학이 있는 독서와 독서모임
3. 철학이 있는 독서와 독서모임
독일의 파시즘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몇몇 지식인들은 묻기 시작했다. 어찌해서 그토록 높은 수준의 문화예술 역량을 가진 나라에서 인간으로서 사고능력이 퇴행된 사태가 버젓이 벌어졌을까 하는 질문이었다. 여러 가지 진단과 분석이 나왔지만, 그 가운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는 것은 권력과 자본의 논리를 자신의 생각처럼 받아들인 결과라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윤리적 가치를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실제로는 권력의 목적에 사람들을 동원하는 장치를 만들어 유지하고, 자본 역시도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다양한 장치와 논리를 작동시킨다. 이것이 교육과 언론 등에 담기면서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고 그 사고로 사물과 세상을 대하게 된다면, 결국 자신의 독립적 사유보다는 타자의 노예가 되는 길이 열릴 뿐이다. 여기서 독서의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이 타자의 노예가 되는 상황을 격파하고 자신의 사유체계를 독자적으로 세우는 것에 독서의 철학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의 독서 습관은 책을 읽으면서 책과 상호 비판적 대화를 하는 것이기보다는 책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받아들이는 쪽에 익숙하다. 학교 교육에서 교과서를 일종의 경전처럼 다루고 여기에 도전적 질문을 하는 것은 성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뿐더러 도리어 불리해지는 상황이 지속되는 한 이러한 태도는 당연해진다. 역사교과서 문제는 이와 같은 논점에서 보면 한국사회의 집단적 사고의 내용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지침 내지 근거가 된다. 지난 시기의 역사에 대한 실상 파악과 평가, 또는 성찰의 능력이 키워지기보다는 기존질서의 기득권 유지 요구에 봉사하는 역사서술이 교과서로 공식화되는 과정과 그 학습의 결과는 권력, 자본의 논리에 문제를 제기하고 도전하는 자세를 해체시킨다.
하나의 책이 그 사회의 진로와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지난 시기의 문명사를 잠시 훑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회의 집단적 서평 논쟁을 통해 이루어진 열매다.
바로 이러한 사고체계 안에서 이른바 베스트셀러 독서가 무비판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있다고 해서 이를 문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기와 대세라는 타자의 선택에 압도되어 자신의 독자적 판단과 선택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진지한 관심영역을 만들어 그것을 깊게 밀고 나가는 풍토가 없는 조건에서는, 남들이 다 읽는 책을 자신이 못 읽으면 낙오한다는 식의 분위기가 중심이 되어버리는 사회가 형성된다. 유명인의 명성을 쫓아 독서목록을 구성해버리는 풍습은 책의 판매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정작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은 버려지거나 아예 제작되지도 못하는 상황을 가져온다. 이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매우 심각한 지식 생태계의 파괴다. 마케팅에 좌우되는 독서공동체는 진정한 독서능력을 길러낼 수 없게 된다.
하나의 책이 그 사회의 진로와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지난 시기의 문명사를 잠시 훑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회의 집단적 서평 논쟁을 통해 이루어진 열매다.
바로 이러한 사고체계 안에서 이른바 베스트셀러 독서가 무비판적으로 주도하게 된다. 베스트셀러에 대한 비판적 논의가 있다고 해서 이를 문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기와 대세라는 타자의 선택에 압도되어 자신의 독자적 판단과 선택의 능력을 갖추지 못하게 되는 것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기만의 진지한 관심영역을 만들어 그것을 깊게 밀고 나가는 풍토가 없는 조건에서는, 남들이 다 읽는 책을 자신이 못 읽으면 낙오한다는 식의 분위기가 중심이 되어버리는 사회가 형성된다. 유명인의 명성을 쫓아 독서목록을 구성해버리는 풍습은 책의 판매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으나 정작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들은 버려지거나 아예 제작되지도 못하는 상황을 가져온다. 이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매우 심각한 지식 생태계의 파괴다. 마케팅에 좌우되는 독서공동체는 진정한 독서능력을 길러낼 수 없게 된다.
그런 이유에서, 수준 높은 서평문화의 조성은 매우 시급하다. 책 판매의 보조수단이 되거나 요약본 읽기식의 서평이 아니라 책의 가치와 그 책이 놓여있는 사회적 맥락, 지식지도 전체에서 그 책이 차지하는 위상, 그 시대적 의미 등을 종합적으로 담아 사고할 수 있도록 돕는 서평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책으로 인도하는 나침판이기도 하고, 책의 부가가치를 확대하면서 새로운 논의와 발상, 그리고 독서공동체의 성장에 기여하는 역량이 된다. 하나의 책이 그 사회의 진로와 운명에 얼마나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지는 지난 시기의 문명사를 잠시 훑어봐도 금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사회의 집단적 서평 논쟁을 통해 이루어진 열매다. 어떤 책이 당대의 논쟁에서 중심에 서고, 세월이 흐르면서 고전의 반열에 오르는 것은 이와 같은 진지하고 심도 있는 서평에 힘입는 바가 크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평생학습체계와 연결되어 질적으로 향상된 시민대학 급의 독서를 지향하는 풍토가 조성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한결 희망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영화 <레미제라블>이 인기를 모으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후속 논쟁이 없다. 빅토르 위고의 이 역작 자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 그에 따른 우리 사회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 작품이 끼친 영향, 이 작품 내면에 담긴 여러 메시지 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은 단지 레미제라블 원작소설이 요즈음 잘 나가고 있다는 보도만 할 뿐이다. <레미제라블>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삶이라는 좌표와 관련해서 진전시키는 눈에띄는 서평, 또는 공동의 독서는 부재중이다. 그러니 독서가 우리사회 전반의 철학적 사유의 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제대로 생겨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평생학습체계와 연결되어 질적으로 향상된 시민대학 급의 독서를 지향하는 풍토가 조성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한결 희망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영화 <레미제라블>이 인기를 모으면서 원작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 이후의 후속 논쟁이 없다. 빅토르 위고의 이 역작 자체에 대한 우리 사회의 논의, 그에 따른 우리 사회 자신에 대한 비판적 성찰, 이 작품이 끼친 영향, 이 작품 내면에 담긴 여러 메시지 등을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이 주어지지 않고 있다. 언론은 단지 레미제라블 원작소설이 요즈음 잘 나가고 있다는 보도만 할 뿐이다. <레미제라블>에 대한 오늘날 우리의 삶이라는 좌표와 관련해서 진전시키는 눈에띄는 서평, 또는 공동의 독서는 부재중이다. 그러니 독서가 우리사회 전반의 철학적 사유의 힘으로 연결되는 고리는 제대로 생겨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함께 읽고 생각해보고 토론하는 독서 모임의 확산이다. 혼자 읽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공동 독서의 체험현장은 참여자들에게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지적 자극을 주고, 뇌 회로를 역동적으로 만든다. 몰론 이 작업이 좀 더 생산적이고 품질이 높은 내용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 독서 집단 내부에 수준 높은 역량을 지닌 지도력이 있으면 더할 나위없겠지만, 그것이 없다 해도 이 체험이 쌓여나가면 자체적으로 상당한 진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러면서 책 읽는 흥미만이 아니라 한 시대의 급소를 쥐고 있는 문제도 해결해나갈 수 있는 시민으로서의 힘도 성숙해질 수 있다. 각 단위별 학교에서 이러한 독서모임이 왕성하게 조직되면 교육의 기반 자체가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이러한 독서 모임의 존재는 ‘출판–서점–도서관’의 유기적 관계망에 에너지를 공급해서, 지식 생태계의 창출에 자신감을 갖게 하고 상승효과를 가져오게 한다. 이 독서 모임의 단위는 두세 명으로부터 수십 명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수준이라도 모두 좋다. 그리고 이들 독서모임이 서로의 존재를 알아가면서 상호 교류 내지 함께하는 자리를 만드는 노력을 기울이도록 도서관이 역할을 해준다면 독서공동체 성장의 추진력은 급속도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평생학습체계와 연결되어 질적으로 향상된 시민대학 급의 독서를 지향하는 풍토가 조성될 수만 있다면, 우리의 미래는 한결 희망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 국가의 책임, 그리고 독서운동의 새로운 시작
4. 국가의 책임, 그리고 독서운동의 새로운 시작
지금까지 말했던 것을 종합해보자면 그 핵심은 우리 사회에서 독서를 중심으로 평생학습의 품질을 한껏 높이고 도서관이 이것과 시스템적으로 결합하며, 그로써 각 지역에서 시민 스스로가 일구어나가는 마을의 태동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구조를 만들자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현실은 대단히 비관적이다. 독서는 시민사회의 기본권이라는 점에서 이는 중대한 위기다. 그렇다면, 국가적 차원에서 이 위기를 극복하는 지식 공동체 복원 내지 그 인프라 재구축의 방향설정이 나와 주어야 한다.
“이 나라는 책 읽는 나라다. 독서는 우리 모두의 행복 추구권의 기본이다. 독서는 교육, 문화, 복지의 중심이다. 언론 매체는 독서관련 프로그램을 비중 있게 편성해야 한다. 작은 마을 서점과 도서관에 대한 국가적 지원은 국가의 문명사적 책무”라는 인식이 정책화되는 것은 우리 사회의 장기적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독서 공동체의 활력 있는 성장이 이 시대의 난제를 해결할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가는 기본체력이라는 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철학적 관점이 분명한 독서운동이 도처의 독서모임을 매개로, 한국사회 르네상스의 동력이 되는 꿈을 꾸는 것만으로도 이미 우리시대에 꿈꿀 수 있는 위대한 도약의 시작이다.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책을 함께 읽는 공동체가 바로 우리의 활로다. 교육의 뿌리는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 전체에 튼튼하게 뿌리내릴 것이며, 거기에서 우리는 문명진화의 기원을 감격적으로 확인하게 될 것이다. 책을 펴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