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책놀이, 즐거움을 펴다] 아이들이 놀려는 이유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7-15 18:15 조회 6,928회 댓글 0건본문
이상호 사)놀이하는사람들 대표
놀이는 왜 필요할까
아이들은 왜 놀고 싶어 할까? ‘아이들이니까’라는 뻔한 답을 내놓기 위해 질문한 것은 아니다. 그럼 아이들만 놀고 싶어 할까? 어른도 일하기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실 모든 인간은 놀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들은 그 욕구가 더 강하고 감정통제가 서툴러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어른들은 그 욕구를 잘 통제할 뿐이다. 아이들이 놀려는 욕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화 과정에서 따르는 어른들의 억압과 같은 압박에 대한 출구인 셈이다.
먼저 살아남기 위해 논다는 측면을 살펴보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라서 불완전하게 태어난다.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가 두 다리로 걸어 모이를 쪼는 것처럼 대다수의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살아가는데 필요한 행동을 어미 도움 없이 스스로 한다. 이에 비해 인간은 갓 태어났을 때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거의 1년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생물학자 포르트만은 인간의 이런 특성을 ‘자궁 외 1년’으로 표현하면서 원래는 2년간 자궁에 있어야 함을 생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럼 왜 1년 먼저 나오게 되었을까? 이는 인간이 여러 동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머리(뇌)를 써야 하는데, 어두운 자궁 내부보다는 외부 자극을 통해 뇌의 용량을 늘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미리 출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머리를 쓴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앞선 세대의 지적 성과가 짧은 시간에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이를 습득해서 활용할 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놀이는 배움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커진 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하드웨어고 이를 작동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바로 교육이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을 하고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을 한다. 성인이 되어 외국말을 배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부터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3~4세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빨리 배운다. 이런 과정은 단지 말을 배우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아이와 하는 까꿍 놀이를 생각해보자. 이 놀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 여러 번 되풀이하다보면 아이는 점차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음을 알게 되고 이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는 데 초석이 된다. 숨바꼭질은 자신이 사는 공간에 대한 이해를 하는 데 유용하다. 어디에 숨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객관적인 공간이 주관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므로 빨리 기억할 수 있다.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공간에 대해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그래서 숨바꼭질을 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연장을 만들기 위해 손놀림이 능숙하고 정교해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공기, 실뜨기로 해결하였다.
"학교를 비롯한 별다른 교육기관이 없던 먼 옛날 인간은 앞선 지적 성과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최선의 방법으로 놀이라는 형식을 취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놀이를 통해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놀이는 이와 같이 재미 이상의 교육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의도적인 방법이 아니라 재미를 겉에 두르고, 교육적 목적을 안에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학교를 비롯한 별다른 교육기관이 없던 먼 옛날 인간은 앞선 지적 성과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최선의 방법으로 놀이라는 형식을 취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놀이를 통해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기 위해 놀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헌장이나 유엔이 정한 어린이권리선언에도 놀아야 살아갈 수 있고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이기에 놀이를 아동의 권리로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놀려는 것은 프로이드가 말하는 인간의 살아남기 위한 원초적 욕구(리비도)라서 어떻게 해서든 놀려고 하는 것이다.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놀이
한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여럿이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배움도 필요하지만 사회의 제반 규칙을 지켜야 함께 살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다양한 욕구는 사회의 제반 규칙이나 관습과 충돌하게 된다. 아이들의 활화산 같은 욕구는 엄마나 아빠, 선생님 등의 제재를 받게 되고 점차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포도주를 만들 때도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 통풍을 시켜야 하듯이 누르기만 한다고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해소시킬 때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다.
"여럿이 어울려 재미있게 놀다보면 깨우치게 되는 자발적인 배움이 수레의 다른 한쪽의 바퀴가 되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분명히 움직였는데도 안 움직였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주된 활동이고, ‘수건돌리기’는 몰래 수건을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 주된 규칙이다. 남의 것을 갖고 싶은 욕구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등의 놀이를 통해 해소한다. 평소에는 금지된 것이 놀이에서는 허용되는 것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나가게 되는데 이 또한 배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개인적 배움과 사회 속에서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터득하는 매개로서 놀이가 자리하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배움은 어른보다 아이들에게 더 많이 요구되므로 아이들은 틈만 나면 놀려고 하는 것이다.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
아이들이 신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비례해서 다양한 배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집이나 학교에서의 배움은 외부의 강압이나 요구에 의해 타율적으로 행해진다. 이런 배움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 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여럿이 어울려 재미있게 놀다보면 깨우치게 되는 자발적인 배움이 수레의 다른 한쪽의 바퀴가 되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말의 ‘노릇’은 놀이의 명사형으로 잘 놀아야 자신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을 뜻한다. 즉 형식적인 배움과 자발적이고 자유스러운 배움이 어울려야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70~90년대까지는 골목, 운동장 등 어디에서나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고무줄, 딱지치기, 비석치기, 땅따먹기, 공기놀이, 오징어놀이, 숨바꼭질, 실뜨기 등의 다양한 놀이는 배움의 또 다른 축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이런 놀이들을 대신하여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게임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이들은 배움의 통로를 잃어버렸다. 사람과의 소통이 아니라 단순 반복적인 기계 조작으로는 온전한 배움이 이뤄질 수 없다. 교실마다 소심하고 일상적으로 짜증을 내며, 폭력적인 아이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없던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말을 하지 않는 아이, 고집쟁이, 의존적인 아이, 틱 장애 아이 등이 넘쳐나는 이유는 바로 놀이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왕따를 비롯하여 각양각색의 학교폭력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배움의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다가 늪에 빠진 양상일 뿐이다.
놀이의 회복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오랜 역사를 가졌기에 그만큼 훌륭한 놀이문화가 전해지고 있다. 놀이 환경이 열악해졌어도 그 환경에 맞게 할 수 있는 놀이들이 많이 있다. 공기를 비롯하여 실뜨기, 손뼉치기, 고누, 산가지, 얼음땡 등 생활 속에서 쉽게 되살릴 수 있는 놀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런 놀이들을 의도적으로 되살려야 한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 도서관, 공원, 놀이터 등 어느 곳에서나 놀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스스로 살려고 노는데 이를 언제까지 시험, 공부, 학원, 문제지로 억압할 것인가!
김기명(가명, 초등학교 5학년)이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첫날부터 눈에 띄었다.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그 어떤 활동에도 의욕이 없었다. 심지어 “너 귀찮아서 학교에는 어떻게 오니?”라고 물어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외동아들로 어릴 적부터 지나치게 과잉보호했고 나중에는 컴퓨터 오락에 빠져 그 이외에는 어떤 관심도 의욕도 없는 아이였다. 따스한 5월 중순부터 아이들과 비석치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두 그 아이와 편이 되는 것을 꺼렸지만 억지로 편이 되어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맞추려고 던지는 것인지, 그냥 던지는 것인지 마지못해 던지기를 되풀이해서 아이들의 눈총을 받았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 도서관, 공원, 놀이터 등 어느 곳에서나 놀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그러다가 3개 중 두 개가 넘어지고 마지막 비석이 남았고 우연히 기명이 혼자 남게 되자 같은 편 아이들이 ‘김기명! 김기명!’을 연호했다. 아이들의 응원에 기명이는 예전과 다르게 힘껏 돈을 던지게 되었고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 다음 판부터 좀 더 열심히 던지다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드디어 비석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같은 편 아이들이 기명이보다 더 좋아했고 이후 비석을 쓰러뜨리는 횟수가 빈번해지면서 기명이는 비석치기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몇 차례 비석치기를 했는데 놀이판에 선 아이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비석을 쓰러뜨리면 크게 환호했고 친구들과 손을 마주치기도 했다.
비석치기는 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상대편 비석 모두를 쓰러뜨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매 단계마다 비석을 맞출 수는 없다. 내가 잘 맞출 수도 있지만 못 맞출 때가 더 많다. 그래도 다른 아이가 잘하면 나까지 잘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편이니까. 그런데 번번이 못 맞추면 다른 아이에게 미안하고 다음에 내가 던질 차례가 되면 최선을 다해서 던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여럿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임승차도 할 수 있지만 마냥 그렇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비석치기에서 허투루 던지는 아이가 한 명도 없음을 본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은연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이후 조금씩 귀차니즘에서 벗어나 매사에 적극 참여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기명이를 더 이상 소외시키지 않고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기 시작했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놀이로 터득한 것이다. 이는 비단 비석치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놀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놀이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놀이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교육적 필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화적 매개라 할 수 있다. 이는 인류가 지금까지 종을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열쇠라 할 수 있다. 인종과 민족을 떠나 모든 인류는 놀이를 한다. 이를
네덜란드의 문화인류학자 호이징가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로 정의했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돌려주는 일은 단지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려고 노는 것이고 그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지 말고 힘을 보태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미래사회는 변화된 환경에서 놀이를 어떻게 되살려 내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놀이는 왜 필요할까
아이들은 왜 놀고 싶어 할까? ‘아이들이니까’라는 뻔한 답을 내놓기 위해 질문한 것은 아니다. 그럼 아이들만 놀고 싶어 할까? 어른도 일하기보다 노는 것을 더 좋아한다. 사실 모든 인간은 놀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아이들은 그 욕구가 더 강하고 감정통제가 서툴러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어른들은 그 욕구를 잘 통제할 뿐이다. 아이들이 놀려는 욕구는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살아남기 위해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화 과정에서 따르는 어른들의 억압과 같은 압박에 대한 출구인 셈이다.
먼저 살아남기 위해 논다는 측면을 살펴보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라서 불완전하게 태어난다.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가 두 다리로 걸어 모이를 쪼는 것처럼 대다수의 동물들은 태어나자마자 살아가는데 필요한 행동을 어미 도움 없이 스스로 한다. 이에 비해 인간은 갓 태어났을 때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거의 1년을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생물학자 포르트만은 인간의 이런 특성을 ‘자궁 외 1년’으로 표현하면서 원래는 2년간 자궁에 있어야 함을 생물학적으로 입증했다.
그럼 왜 1년 먼저 나오게 되었을까? 이는 인간이 여러 동물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머리(뇌)를 써야 하는데, 어두운 자궁 내부보다는 외부 자극을 통해 뇌의 용량을 늘리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미리 출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머리를 쓴다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앞선 세대의 지적 성과가 짧은 시간에 다음 세대에 전달되어 이를 습득해서 활용할 때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놀이는 배움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커진 뇌는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하드웨어고 이를 작동하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바로 교육이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미국말을 하고 한국에서 태어나면 한국말을 한다. 성인이 되어 외국말을 배우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제대로 걷지도 못할 때부터 모국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3~4세면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로 빨리 배운다. 이런 과정은 단지 말을 배우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살기 위해 알아야 하는 모든 것으로 확장된다.
아이와 하는 까꿍 놀이를 생각해보자. 이 놀이를 통해 무엇을 배울까? 여러 번 되풀이하다보면 아이는 점차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는 엄마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있음을 알게 되고 이후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는 데 초석이 된다. 숨바꼭질은 자신이 사는 공간에 대한 이해를 하는 데 유용하다. 어디에 숨을까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주위를 둘러보면 객관적인 공간이 주관적인 인식의 대상이 되므로 빨리 기억할 수 있다. 사냥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 공간에 대해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그래서 숨바꼭질을 시킨 것이다. 마찬가지로 손으로 연장을 만들기 위해 손놀림이 능숙하고 정교해야 하는데 이를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는 공기, 실뜨기로 해결하였다.
"학교를 비롯한 별다른 교육기관이 없던 먼 옛날 인간은 앞선 지적 성과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최선의 방법으로 놀이라는 형식을 취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놀이를 통해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놀이는 이와 같이 재미 이상의 교육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의도적인 방법이 아니라 재미를 겉에 두르고, 교육적 목적을 안에 숨기고 있을 뿐이다. 학교를 비롯한 별다른 교육기관이 없던 먼 옛날 인간은 앞선 지적 성과를 다음 세대에 전달할 최선의 방법으로 놀이라는 형식을 취했고 따라서 모든 인간은 놀이를 통해 배움을 얻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은 배워야 살아남을 수 있고 살아남기 위해 놀이 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린이헌장이나 유엔이 정한 어린이권리선언에도 놀아야 살아갈 수 있고 놀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인간답게 살 수 없도록 하는 것이기에 놀이를 아동의 권리로 명시한 것이다. 따라서 아이들이 놀려는 것은 프로이드가 말하는 인간의 살아남기 위한 원초적 욕구(리비도)라서 어떻게 해서든 놀려고 하는 것이다.
사회화 과정으로서의 놀이
한편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도 하다. 여럿이 어울려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 배움도 필요하지만 사회의 제반 규칙을 지켜야 함께 살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의 다양한 욕구는 사회의 제반 규칙이나 관습과 충돌하게 된다. 아이들의 활화산 같은 욕구는 엄마나 아빠, 선생님 등의 제재를 받게 되고 점차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포도주를 만들 때도 일정 시간이 지난 다음 통풍을 시켜야 하듯이 누르기만 한다고 욕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 해소시킬 때 심리적,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된다.
"여럿이 어울려 재미있게 놀다보면 깨우치게 되는 자발적인 배움이 수레의 다른 한쪽의 바퀴가 되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는 분명히 움직였는데도 안 움직였다고 시치미를 떼는 것이 주된 활동이고, ‘수건돌리기’는 몰래 수건을 떨어뜨려야 하는 것이 주된 규칙이다. 남의 것을 갖고 싶은 욕구는 딱지치기나 구슬치기 등의 놀이를 통해 해소한다. 평소에는 금지된 것이 놀이에서는 허용되는 것이 많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욕구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 나가게 되는데 이 또한 배움의 연장이기도 하다. 결국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해 요구되는 개인적 배움과 사회 속에서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를 터득하는 매개로서 놀이가 자리하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배움은 어른보다 아이들에게 더 많이 요구되므로 아이들은 틈만 나면 놀려고 하는 것이다.
놀이를 잃어버린 아이들
아이들이 신체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비례해서 다양한 배움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집이나 학교에서의 배움은 외부의 강압이나 요구에 의해 타율적으로 행해진다. 이런 배움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 내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여럿이 어울려 재미있게 놀다보면 깨우치게 되는 자발적인 배움이 수레의 다른 한쪽의 바퀴가 되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말의 ‘노릇’은 놀이의 명사형으로 잘 놀아야 자신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음을 뜻한다. 즉 형식적인 배움과 자발적이고 자유스러운 배움이 어울려야 비로소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70~90년대까지는 골목, 운동장 등 어디에서나 아이들의 노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고무줄, 딱지치기, 비석치기, 땅따먹기, 공기놀이, 오징어놀이, 숨바꼭질, 실뜨기 등의 다양한 놀이는 배움의 또 다른 축으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키워냈다. 그러나 이런 놀이들을 대신하여 스마트폰이나 인터넷게임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아이들은 배움의 통로를 잃어버렸다. 사람과의 소통이 아니라 단순 반복적인 기계 조작으로는 온전한 배움이 이뤄질 수 없다. 교실마다 소심하고 일상적으로 짜증을 내며, 폭력적인 아이가 늘어나고 있다.
또한 예전에는 없던 ADHD(주의력결핍 과잉행동장애), 말을 하지 않는 아이, 고집쟁이, 의존적인 아이, 틱 장애 아이 등이 넘쳐나는 이유는 바로 놀이를 잃어버린 결과이다. 왕따를 비롯하여 각양각색의 학교폭력은 인간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적인 배움의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다가 늪에 빠진 양상일 뿐이다.
놀이의 회복
시계를 거꾸로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오랜 역사를 가졌기에 그만큼 훌륭한 놀이문화가 전해지고 있다. 놀이 환경이 열악해졌어도 그 환경에 맞게 할 수 있는 놀이들이 많이 있다. 공기를 비롯하여 실뜨기, 손뼉치기, 고누, 산가지, 얼음땡 등 생활 속에서 쉽게 되살릴 수 있는 놀이들이 얼마든지 있다. 이런 놀이들을 의도적으로 되살려야 한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 도서관, 공원, 놀이터 등 어느 곳에서나 놀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스스로 살려고 노는데 이를 언제까지 시험, 공부, 학원, 문제지로 억압할 것인가!
김기명(가명, 초등학교 5학년)이란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첫날부터 눈에 띄었다. 수업시간은 물론이고 그 어떤 활동에도 의욕이 없었다. 심지어 “너 귀찮아서 학교에는 어떻게 오니?”라고 물어 본 적이 있을 정도였다. 외동아들로 어릴 적부터 지나치게 과잉보호했고 나중에는 컴퓨터 오락에 빠져 그 이외에는 어떤 관심도 의욕도 없는 아이였다. 따스한 5월 중순부터 아이들과 비석치기를 시작했다. 아이들이 모두 그 아이와 편이 되는 것을 꺼렸지만 억지로 편이 되어 놀이를 했다. 처음에는 맞추려고 던지는 것인지, 그냥 던지는 것인지 마지못해 던지기를 되풀이해서 아이들의 눈총을 받았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 도서관, 공원, 놀이터 등 어느 곳에서나 놀 수 있도록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주는 것이 아이들을 살리는 길이다."
그러다가 3개 중 두 개가 넘어지고 마지막 비석이 남았고 우연히 기명이 혼자 남게 되자 같은 편 아이들이 ‘김기명! 김기명!’을 연호했다. 아이들의 응원에 기명이는 예전과 다르게 힘껏 돈을 던지게 되었고 아슬아슬하게 빗나갔다. 그 다음 판부터 좀 더 열심히 던지다가 몇 차례의 실패 끝에 드디어 비석을 쓰러뜨렸다. 그러자 같은 편 아이들이 기명이보다 더 좋아했고 이후 비석을 쓰러뜨리는 횟수가 빈번해지면서 기명이는 비석치기에 푹 빠지기 시작했다. 이후 몇 차례 비석치기를 했는데 놀이판에 선 아이의 눈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비석을 쓰러뜨리면 크게 환호했고 친구들과 손을 마주치기도 했다.
비석치기는 편으로 나뉘어 진행된다. 상대편 비석 모두를 쓰러뜨려야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매 단계마다 비석을 맞출 수는 없다. 내가 잘 맞출 수도 있지만 못 맞출 때가 더 많다. 그래도 다른 아이가 잘하면 나까지 잘한 것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 편이니까. 그런데 번번이 못 맞추면 다른 아이에게 미안하고 다음에 내가 던질 차례가 되면 최선을 다해서 던지려고 노력하게 된다. 여럿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무임승차도 할 수 있지만 마냥 그렇게는 할 수 없는 것이다. 비석치기에서 허투루 던지는 아이가 한 명도 없음을 본다. 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몫에 최선을 다해야 함을 은연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이후 조금씩 귀차니즘에서 벗어나 매사에 적극 참여하는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기명이를 더 이상 소외시키지 않고 대등한 인격체로 대하기 시작했다. 함께 살아가는 법을 놀이로 터득한 것이다. 이는 비단 비석치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놀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래서 놀이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리라.
놀이란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교육적 필요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문화적 매개라 할 수 있다. 이는 인류가 지금까지 종을 유지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핵심 열쇠라 할 수 있다. 인종과 민족을 떠나 모든 인류는 놀이를 한다. 이를
네덜란드의 문화인류학자 호이징가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로 정의했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돌려주는 일은 단지 자유롭게 내버려두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살려고 노는 것이고 그들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지 말고 힘을 보태주는 것이 어른의 몫이다. 미래사회는 변화된 환경에서 놀이를 어떻게 되살려 내는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