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여행! 세상은 열린 도서관이 되다] 백년 사과나무 이야기 - 대구 골목길 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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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25 14:39 조회 7,855회 댓글 0건본문
어소영 대구아양초 교사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드는 바람이 햇살에 따끈하게 데워진 커튼을 얌전히 들었다 놓았다하는 주말 오후, 그냥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집을 나섰다. 우연한 기회에 따라나섰던 대구골목투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에 친구는 금방 날짜를 정해서 연락해 왔다. 그녀는 새로운 곳을 찾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곳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찾는 내 습성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지난해에 있었던 대구 출신 천재 화가 이인성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근대골목투어며 백년 사과나무 얘기를 했던 걸 떠올려보면 그녀의 빠른 반응이 나온 것도 이해가 갔다. 사실 화가 이인성을 알게 된 건 한 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지만, 그의 작품 <사과나무>를 대구 명덕초등학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탁한 것,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대구미술관에 기탁하게 되었다는 것, 부인과의 러브스토리, 그의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미술관 외벽에 설치 된 사과상자로 만든 작품을 올려다보고 선 채로 그녀가 내게 들려 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가 되는 백년 사과나무가 아직 남아있으며, 그 사과나무와 이인성은 같은 시대를 살았을 텐데 그는 죽고 사과나무들만 살아남은 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그 뒤에 백년 사과나무를 직접 보았을 때 더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라는 백년 사과나무는 낮고 넓게 조형된 요즘의 사과나무 형태와는 사뭇 달랐고 이인성의 그림 속 사과나무처럼 유연하거나 풍성하지도 않았지만 세월에 상한 기다란 몸체가 애처로우면서도 여전히 안정적인 생명력이 느껴졌다. 대구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존슨박사가 1899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주문해 재배한 3개 품종 72그루 묘목들의 자손목(2세목)인 백년 사과나무는 최근에 곁에 옮겨 심은 손자목(3세목)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다 ‘그 자체로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 있는 생명체’라는 설명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인기 있는 대상으로 재조명 받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다시 찾았을 때도 단체 관람객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어머니들, 산책을 나온 주변 주택가 시민들까지 꽤나 북적였다. “사람으로 치면 이민 2세인 셈이야 그렇지? 미국에 가보고 싶지 않을까? 1세목들은 나무로 태어나 이렇게 멀리 떠나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혹시 영어 할 줄 아는지는 안 물어 보고 싶니? 이민 2세잖아~ㅋ” 감수성이 재발한 친구에겐 그러고 말았지만 존슨 박사는 왜 하필 사과나무를 들여올 생각을 했을까? 당시 사람들이 비타민이 필요해 보였나? 그냥 단순히 박사나 그 가족이 사과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가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졌었기 때문에 사과나무를 심었던 것은 아닐까. 과일나무를 재배하는 것은 그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시간의 흐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애착이나 애정이 없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사과나무 근처 커다란 나무그늘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다감한 심정으로 기다려주는 여유쯤은 나도 평생 잃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선교박물관 안을 둘러볼 수 없어 주변만 산책했는데도 친구는 그림 같다며 좋아했다.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외국인 묘지, 은혜정원에서는 비석들의 문구를 하나하나 다 눈으로 읽어가며 발걸음을 옮겼고, 박태준과 이은상이 각각 작곡하고 작사한 <동무생각> 노래비 앞에 선 중년 아주머니들의 웃음과 노랫소리가 즐거웠고, 노래를 배우고 부르면서도 청라언덕이 대체 뭔가 싶었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코앞에 그 청라언덕이 있었던 것을 무슨 이상향마냥 막연한 이미지로만 알고 지내온 것이 우습기까지 했다. 청라언덕 오름계단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근처 서문시장으로 가서 간단히 간식을 해결했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건물들 사이로 내리는 노을이 홍옥색으로 특히 고왔다.
열어놓은 창문으로 불어드는 바람이 햇살에 따끈하게 데워진 커튼을 얌전히 들었다 놓았다하는 주말 오후, 그냥 늘어져 있고 싶은 마음을 떨치고 집을 나섰다. 우연한 기회에 따라나섰던 대구골목투어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에 친구는 금방 날짜를 정해서 연락해 왔다. 그녀는 새로운 곳을 찾기보다는 마음에 드는 곳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찾는 내 습성을 파악하고 있는데다, 지난해에 있었던 대구 출신 천재 화가 이인성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부터 근대골목투어며 백년 사과나무 얘기를 했던 걸 떠올려보면 그녀의 빠른 반응이 나온 것도 이해가 갔다. 사실 화가 이인성을 알게 된 건 한 신문의 기사를 통해서였지만, 그의 작품 <사과나무>를 대구 명덕초등학교에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탁한 것, 탄생 100주년을 맞아 다시 대구미술관에 기탁하게 되었다는 것, 부인과의 러브스토리, 그의 죽음 등에 관한 이야기는 대부분 미술관 외벽에 설치 된 사과상자로 만든 작품을 올려다보고 선 채로 그녀가 내게 들려 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녀에게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가 되는 백년 사과나무가 아직 남아있으며, 그 사과나무와 이인성은 같은 시대를 살았을 텐데 그는 죽고 사과나무들만 살아남은 셈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덕분에 그 뒤에 백년 사과나무를 직접 보았을 때 더 특별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 사과나무의 효시라는 백년 사과나무는 낮고 넓게 조형된 요즘의 사과나무 형태와는 사뭇 달랐고 이인성의 그림 속 사과나무처럼 유연하거나 풍성하지도 않았지만 세월에 상한 기다란 몸체가 애처로우면서도 여전히 안정적인 생명력이 느껴졌다. 대구에서 의료선교사로 활동하던 존슨박사가 1899년 미국 미주리주에서 주문해 재배한 3개 품종 72그루 묘목들의 자손목(2세목)인 백년 사과나무는 최근에 곁에 옮겨 심은 손자목(3세목)들과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다 ‘그 자체로 대구를 사과의 도시로 만든 의미 있는 생명체’라는 설명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인기 있는 대상으로 재조명 받고 있었다.
친구와 함께 다시 찾았을 때도 단체 관람객들과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어머니들, 산책을 나온 주변 주택가 시민들까지 꽤나 북적였다. “사람으로 치면 이민 2세인 셈이야 그렇지? 미국에 가보고 싶지 않을까? 1세목들은 나무로 태어나 이렇게 멀리 떠나오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혹시 영어 할 줄 아는지는 안 물어 보고 싶니? 이민 2세잖아~ㅋ” 감수성이 재발한 친구에겐 그러고 말았지만 존슨 박사는 왜 하필 사과나무를 들여올 생각을 했을까? 당시 사람들이 비타민이 필요해 보였나? 그냥 단순히 박사나 그 가족이 사과를 좋아했을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가 한국에 깊은 애정을 가졌었기 때문에 사과나무를 심었던 것은 아닐까. 과일나무를 재배하는 것은 그 열매를 기대하기 때문이고, 그것은 곧 시간의 흐름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면 애착이나 애정이 없이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있었을까. 그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사과나무 근처 커다란 나무그늘에서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는 친구를 다감한 심정으로 기다려주는 여유쯤은 나도 평생 잃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이라 선교박물관 안을 둘러볼 수 없어 주변만 산책했는데도 친구는 그림 같다며 좋아했다.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잠들어 있는 외국인 묘지, 은혜정원에서는 비석들의 문구를 하나하나 다 눈으로 읽어가며 발걸음을 옮겼고, 박태준과 이은상이 각각 작곡하고 작사한 <동무생각> 노래비 앞에 선 중년 아주머니들의 웃음과 노랫소리가 즐거웠고, 노래를 배우고 부르면서도 청라언덕이 대체 뭔가 싶었던 중학교 시절이 생각났다. 코앞에 그 청라언덕이 있었던 것을 무슨 이상향마냥 막연한 이미지로만 알고 지내온 것이 우습기까지 했다. 청라언덕 오름계단에서 시간을 좀 보내고 근처 서문시장으로 가서 간단히 간식을 해결했다. 친구와 헤어져 집으로 가는 버스에서 건물들 사이로 내리는 노을이 홍옥색으로 특히 고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