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사람을 살리는 '숨'과 '쉼'으로서의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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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6-28 20:42 조회 7,301회 댓글 0건본문
인문학 열풍이 부는 이유
한동안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구던 건강 신드롬이 언제부터인가 죽음의 문제로 화두 가 바뀌더니 요사이는 인문학 열풍이 불고 있다. 이는 단순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사회의 궤적과도 관련이 깊다. 즉 경제를 최우선적 과제로 여긴 사람들은 경제적 성 과를 통해 삶의 의미를 찾았는데,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사람들은 점점 건강에 대한 염려로 고심하게 되었다. 이는 다시 죽음에 대한 문제로 자연스레 전이되면서 지금은 삶의 의미를 묻는 인문학으로 관심이 몰려 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가 인 문학을 이야기할 만큼 성숙해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인문학을 통해 필요 할 만큼 비인간적인 사회가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동안 한국 사회는 보다 ‘빨리’ 그리고 보다 ‘많이’를 외치며 경제 발전에 힘써온 것 이 사실이다. 그 결과 한국 사회를 지켜왔던 소중한 가치와 윤리는 유실되고 오직 자 본의 논리에 충실한 황금만능주의와 성과주의만이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그로 인 하여 너도 나도 성공신화에 매달리고, 사람들은 마치 브레이크가 망가진 자동차처럼 앞으로 내달릴 뿐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를 향해 질주하는지, 왜 우리는 더불어 살아 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는 더 이상 묻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저 풍요로운 물질과 과학 이 주는 편리함 속에서 오직 물질을 얻고 쓰기 위한 무한투쟁에 몰두할 뿐이다. 이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소비 성장의 메 커니즘에 이끌려 살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의지가 아닌 타인의 잣대에 의해 내몰린 삶 은 결코 건강할 수가 없다.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사회 또한 건강할 수 없다. 타율 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삶의 의미 상실과 같은 어려움을 겪으며 이는 도덕적 해이 나 가족의 해체와 같은 다양한 병리현상으로 전이되어 나간다. 우리는 이러한 현상을 다양한 사회지표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알코올 소비량, 자동차 사고, 이혼율, 사교육비, 청소년 범죄율, 청소년 자살률, 노인 자살률, 낙태율, 결혼과 출산율, 성매매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병리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다시 말해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가중되는 삶의 무게로 인하여 다양한 사회병리 현상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결국 사회 전반을 위태롭게 한다. 한국 사회의 인문학 열풍은 이러한 사회 전반적인 위기 인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기존 삶의 형태로는 더 이상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왜곡된 삶의 형태와 사회현실을 바로 잡고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길을 모색코자 인문학을 요청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문학은 어떤 학문인가. 도대체 인문학은 어떤 학문이기에 사람들은 인문학을 통해 현실에서 당면한 문제를 해소하려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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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다움’을 도모하는 인문학
인문학이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서 유래된 영어 ‘Hunmnities’의 한문 번역 ‘人文學’의 한글 표기이다. 인문학의 사전적 의미는 언어, 문학, 역사, 철학과 같이 사람과 사람의 삶에 관해 논구하는 학문을 지칭하나 일반적으로 인문학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일을 통칭한다. 사람을 사람답게 한다는 것은 사람을 물질이나 기계처럼 죽어 있는 사물로서가 아니라 희로애락이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로 여긴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람은 단순히 지식을 더하거나 이익을 창출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각 기 담고 있는 존재성에 의해서 살아가는 존재임을 분명히 하는 일이다. 따라서 인문학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를 묻는 일에서부터 출발한다. 육체와는 다른 정신이라는 것을 함께 가지고 있는 존재인 사람은 물질만으로 충족 될 수 없다. 즉 사람은 정신의 활동이라 할 수 있는 생각하는 힘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며 늘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희구한다. 자기 자신을 돌아봄으로써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보다 온전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자기 자신의 의지가 아닌 다른 것에 의해 사는 사람은 행복하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스스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 가는 주체이고자 한다.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일을 궁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인문학이 필요하며 우리는 인문학을 통해서 사람다운 일을 도모해 갈 수 있다.
소외된 인문학, 왜곡된 교육
우리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인문학을 소홀히 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는 마치 자 본의 크기가 곧 인격의 크기인 것처럼, 그리고 기계화가 곧 선진화를 의미하는 것처럼, 우리는 모든 역량을 자본의 습득과 기기의 자동화를 위해 매진해 왔다. 그 결과 사람 은 사라지고 잘사는 일을 오로지 경제적인 일로만 여기며 교육은 이를 위한 수단과 방 편이 되고 말았다. 다시 말해 교육은 기술과 자본에 의해서 왜곡되고 곡해된 논리에 따라 자본의 선취를 위한 입시와 취업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조기교육이라 는 이름 하에 선행학습을 실시하고, 객관성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모든 것들을 점수 화하고 계량화하여 규격화하면서 참다운 자아를 소외시키는 것을 우리는 교육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와는 다른 삶과 사회를 열망하는 소망은 한낱 이상주의로 치부하면서 우리는 오 로지 자본의 선취와 획득을 위해 우리가 누리고 함께해야 할 모든 것들을 거침없이 훼 손시켜 나갔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은 점점 황폐해지고 사람들은 점점 더 병약해졌다. 이러한 문제 앞에서 사람들은 다시 ‘우리는 누구인가’를 묻는 것이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이를 시정해 나가고자 하는 열망의 발로이다.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한 이유
인문학은 우리가 사람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한 누구나 해야 하고, 할 수 있어야 하는 학문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인문학을 한가한 사람이나 경제적 여유가 있는 소수의 특정한 사람, 어른이 하는 학문으로 여긴다. 그래서 대다수의 사람들은 인문학을 자신과는 거리가 먼 학문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특히 자본의 가치에 의해 일방적으로 주입되는 교육 현실에 내몰려 있는 어린이・청소년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어느 누구보다도 이들에게 인문학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어린이・청소년들의 신체가 잘 자라기 위해 음식을 골고루 섭취해야 하듯이 온전한 한 사람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꽃은 크기로 이야 기하지 않듯이 인문학은 연령을 제한하지 않는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인문학이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어린이와 청소년은 성장하는 자양분을, 그리고 살아가며 마주하게 될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해 나갈 수 있는 힘을 인문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인문학은 논리적 추론을 통해서 아직 가시화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예지력을 키워 준다. 그러므로 어린이 와 청소년은 예기치 못한 일들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인문학을 통 해 배울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자신을 늘 새롭게 만들어 가는 책임을 다 하는 주체는 인문학을 통해서 키워질 수 있다. 둘째, 새로운 가치의 습득에 관한 문제이다. 현대 이전에는 물리적 힘이나 권력, 기술, 자본의 힘이 세계를 이끌어 갔다면 신 유랑사회 지식정보사회라 불리는 현대 사회 에서는 기존의 혈통, 영토, 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문화와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는 상상력과 창조력이 우선적 가치로 받아들여진 다. 인문학은 여기를 넘어 저기를 그리고 지금만이 아니라 이후의 일들을 생각해 보도 록 한다. 어린이・청소년들이 건강하고 역동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람, 지역, 문화들과 더불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능력은 인문학을 통해서 배울 수 있다. 인문학은 스스로 생각하고 이해하고 깨닫고 판단하고 결단하며 행할 수 있는 힘 을 길러줌으로써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다양한 일들을 마주할 능력을 갖게 한다.
‘숨’과 ‘쉼’을 얻는 인문학
우리는 인문학에 대한 필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이들 을 교육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부분이 있다. 주입식 교육에 의거한 지식교육 위주의 학 습으로 인하여 파생된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에 많은 문제들을 양산했다. 학교는 교육 이 실현되는 장으로서의 역할을 상실하고, 함께 어우러져 미래를 도모해야 하는 교실 은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는 경쟁의 장소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아이들은 자살을 선택하며, 같은 친구들끼리 아무런 이유도 없이 서로를 왕따 시키며, 돈이면 무엇이든지 가능하다는 황금만능주의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기도 한다. 아이들이 겪는 삶의 무의미와 분노로 인한 폭력과 갈등은 특정한 지역 혹은 일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현실을 누가 초래하였는가. 누가 이를 시정해 갈 수 있을 것인가. 이런 현실 앞 에서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먼저 어린이와 청소년들에 대한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마치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미숙아로만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 서 자신의 생각을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일방적으로 주입시키려는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어린이와 청소년을 인격적 주체로 인정할 수 있어야 이들이 스스로의 삶을 능동 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가는 책임감 있는 주체로 자랄 수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이 일방적으로 교육을 받는 입장이 아니라 교육의 한 주체일 수 있을 때에야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상상력과 창조성 또한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장을 우리 어린이・청소년들에게 열어줄 수 있어 야 한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문학이다. 그러나 무늬만 인문학일 뿐 실제로는 또 다른 지식학이라 할 수 있는 인문학이 자본주의의 상업화와 손을 잡고 우리의 숨통을 조이고 주머니를 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이러한 일은 또 다른 족쇄를 우리 어린 이와 청소년들에게 가중시킨다. 일정한 시간과 공간 안에 한정된 지식을 위해 어린이 와 청소년을 닦달하며 어려움을 더 가중시키는 것은 아이들을 해롭게 하는 일이다. 참다운 인문학이란 아이들을 살게 하고 힘나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채움’으로가 아니라 ‘쉼’을 통해서 얻어진다. 우리는 쉼을 통해서 이전과 달리 자신을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쉼이란 지속의 단절을 의미하 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는 결코 알 수 없고 경험할 수 없는 이질적인 것과 만나는 일이 다. 우리는 이질적인 것과의 만남을 통해 이전과 다른 새로움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산 다는 것은 이처럼 ‘숨’을 통해 ‘쉼’을 얻어 나와 다른 새로운 것과 하나가 되는 일이다. 숨을 통해 쉼을 얻으며 그 안에서 자신과 다른 새로움을 받아들이며 이전과 달리 자 신을 새롭게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사는 일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인문학은 명예나 이익이나 권력을 위한 장식이 아니라 숨을 통해 쉼을 얻게 함으로 사람을 보다 사람답 게 살게 하고자 하는 ‘살림의 학(學)’이라 하겠다.
어디에서 희망은 싹트고 자라나나
우린 아이들에게 ‘숨’과 ‘쉼’보다는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쉬지 않고 내달릴 것만을 강 조해 왔다. 이제 아이들을 살려 내기 위해서 인문학을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이 마음껏 ‘숨’을 쉬고 ‘쉼’을 얻을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책은 현실에서 만날 수 없고 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케 할 뿐만 아니라 잊어버린 꿈 을 다시 꾸게 하며 힘들고 아픈 마음에 위로를 건넨다. 어린 시절에 읽은 책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오늘의 자신이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힘든 시간을 이겨내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 된 ‘오프라 윈프리’, 노예 해방을 이룬 미국의 대통령 ‘링컨’, 비폭력을 주장한 ‘간디’, 사막에 떨어진 한 권의 책 『어린왕자』를 읽고 별과 모래뿐인 사막 한가운데에 학교를 지은 ‘무사 앗사리드’와 ‘이 브라힘 앗사리드’도 어린 시절에 읽은 책을 통해 꿈을 키워갔음을 고백한다. 사람은 책 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새로운 삶의 공간을 만들어 간다. 도서관은 우리의 꿈과 희망을 낳고 기르는 엄마의 자궁과 같은 곳, 아이들이 꿈을 잉태하고 미래를 설계하는 ‘희망의 제작소’인 것이다. 교육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강제 와 억압(?)을 피하여 우리 아이들이 자유와 해방을 맛보는 곳,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 는 초인이 될 수 있는 곳, 작은 희망이라는 나비가 휠휠 꿈을 싣고 날아오르는 곳, 수면 아래로 숨어 있던 모든 것들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노래하는 곳, 우리 아이들이 숨을 쉬며 쉼을 얻는 곳이 바로 도서관이다. 이를 위해 도서관은 다양한 양질의 책을 구비하고 아이들이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도서관이 아이 들의 쉼터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린이・청소년 도서관의 사서는 도서관을 지키는 관 리자가 되기에 앞서 아이들의 독서지도사가 될 필요가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독 서지도를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자신이 먼저 인문학적 이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인문 학 교육의 기대와 효과는 바로 이들의 인문학에 대한 이해와 같이 한다. 도서관에서 싹트고 크는 것이 미래 사회를 결정한다. 삶을 행복하게 하고 아름답게 하는 일은 정치도 혁명도 아닌 바로 참다운 인문학적 교육을 통해서 가능하다. 바로 그것을 행하는 곳이 도서관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