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스스로 배우고 익히니 기쁘지 아니한가?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1-23 17:50 조회 6,440회 댓글 0건본문
길미숙 용인 포곡초 사서
모니카 페트의 『행복한 청소부』에는 거리의 표지판을 닦는 청소부가 등장한다.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고, 자부심을 느끼며 매일 행복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소부가 막 닦아 놓은 표지판을 가리키며 한 아이와 엄마의 대화를 통해 자신이 그동안 닦았던 표지판 속 단어들이 아주 유명한 작가와 음악가의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 후로 청소부는 표지판의 음악가와 작가에 대해 기껍게 공부한다.
비단 호기심과 배움의 화학작용을 경험한 이의 이야기는 쉽게 찾을 수 있다. ‘책만 보는 바보’ 이덕무도 좋은 예다. 간서치(看書癡: 지나치게 책을 읽는 데만 열중하거나 책만 읽어서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라 불릴 정도로 독서광이었던 그는 하루 종일 방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의 방향을 쫓아가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너무 가난하여 변변한 공부방 하나 없었던 그를 위해 유득공, 백동수 등은 청장서옥(靑莊書屋)이라는 공부방을 만들어 주었고, 그는 이 서재에서 글을 읽으면서 떠오르던 생각들을 모아 만든『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라는 문집을 통해 책은 눈과 귀, 코, 입 등 몸의 모든 감각을 살아 움직이게 하고, 심장을 뛰게 하며, 감격에 겨운 소리에 온 우주가 깨어난다고 말했다. 자신의 직업인 청소 외에 달리 더 바랄 것이 없었던 청소부를 통해 우리는 진짜 공부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책만 보는 바보라고 불리는 것에 흡족해 하던 이덕무를 통해 진짜 공부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공부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라고 말한다. 왜 공부하는지, 내가 좋아하는 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좋은 성적을 내서,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전력으로 질주해야 하는 우리의 공부 방식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반응일지 모른다. 공부를 학교나 학원이라는 제한된 장소에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정형화된 교육활동이라는 ‘학습’에서 좀 더 확장해 보면 어떨까? 즉, 학교, 학생이라는 제한된 장소, 제한된 사람에 국한하지 않고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삶을 보다 지혜롭게 영위해 나가기 위해 기울이는 모든 노력과 활동으로 확장해 보자. 가령, 100일 기념 깜짝 이벤트를 위해 여자친구가 좋아하는 파스타 요리법 배우기, 손주와의 소통을 위해 카카오톡 사용법 배우기, 몸짱을 목표로 효과적인 운동법 익히기, 배낭여행을 위해 외국어 배우기, 아토피 아들을 위해 자연식 요리법 공부하기, 커피전문점 창업을 위해 바리스타 자격증을 따기, 방황하는 제자와의 의사소통을 위해 상담심리학 공부하기 등 이렇게 공부의 의미를 확장해보니 ‘공부’가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교사와 학생이라는 관계를 통해 일어나던 수동적 배움에서 스스로가 배움의 능동적 주체가 되었을 때 공부는 학문이나 지식 혹은 기술 습득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우리의 일상으로 영역이 확장될 것이다.
만약 공부가 시험을 잘 치기 위한 수단, 출세와 명예와 간판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다면, 행복한 청소부는 그저 청소를 잘하는 청소부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며, 간서치 이덕무는 입신양명의 뜻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지식인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들이 더욱 빛나는 것은 배움에 있어 수동적이지 않은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주체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배움을 수단으로 여기지 않고 무지하고 부족한 자신의 한계를 넘고자 배우고 익힘을 평생 동안 실천했다는 점이다. 공부는 스스로 주체가 되어 우리의 삶 전반에 일생 동안 이루어져야 한다. 어제의 나를 넘어 새로운 나로 발전하고 성장하는 동력이라서 그리고 나의 변화와 성장을 넘어, 내가 관계 맺고 살아가는 사회와 세상에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 때 진정한 공부는 완전체가 된다. 거창한 사회에의 기여나 업적을 말하는 게 아니다. 나의 공부가 매일 만나고, 관계 맺는 나의 가족을 위해, 동료를 위해, 공동체를 위해 사회를 위해 쓰일 때 진정한 공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짜 공부를 시작해 보자. 나를 변화시키고 성장하게 하며,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사회와 세상에 영향을 주고받는 살아 있는 공부를. 그러면 공부가 재미없다는 오명은 벗고, 그 옛날 공자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가르침이 공허하게 들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