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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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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3-16 07:01 조회 6,77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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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석 『공부란 무엇인가?』, 『거대한 사기극』 저자
 
공부는 모든 한국인의 공통 화두이다. 온 국민이 교육 전문가를 자처하고 있다. 얼마 전에 혹한(酷寒) 속에서 학생들이 수능을 치렀다. 모두가 이 수학능력시험에 대한 자기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여 학교, 직장, 카페, 술집 등 도처에서 고견(高見)을 펼치셨다. 국민 모두가 교육에 대하여 나름으로 할 말이 있다는 것은 사실 기이한 일이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모두가 한때 공부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었고, 또한 지금 자녀가 학교에서 공부에 여념이 없지 않는가. 따라서 공부는 온 가족의 실존이 걸린 문제인 것이다.
 
참된 공부의 본령(本領)
원래 공부(工夫)는 그 자체가 목적이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특정 분야에서 달인(達人)이 되는 과정(노력)과 성취(결과)가 바로 공부이다. SBS의 인기 프로그램인 <생활의 달인>이 이를 잘 보여 주지 않던가.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공부하다 죽어라’라는 제목이 붙은 두 권의 책이 모두 종교(불교) 서적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는 소설가 정찬주가 여러 승려들의 삶을 거울삼아 자기 인생을 성찰하는 산문집(열림원, 2013)이고, 다른 하나는 서양 승려들의 법문집(조화로운삶, 2008)이다. 유교나 기독교도 공부를 통해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독려한다.
유학이 공부를 강조하는 것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당장 우리가 그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가 공부를 통한 출세, 이른바 ‘입신양명’을 강조하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기독교의 경우는 신앙의 대상(예수)과 신자의 관계를 스승과 제자 사이로 본다. 신자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예수가 모든 신자들의 스승이고, 무릇 제자는 스승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 여정의 본질이 바로 공부인 셈이다.
요는 참된 공부가 인생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즉 인생 공부, 마음 공부, 영성 공부가 우리의 삶을 이끌어야 한다. 좋은 학교(외고나 인서울)에 들어가거나 좋은 직장(대기업이나 공기업)에 들어가는 외형적 성공은 부산물일 뿐이다. 결국 새로운 존재 형성이 목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공부의 수단화
우리는 공부를 수단으로 취급한다. 우리 시대에 있어서 공부의 목적은 가시적, 물량적 성공이다. 학교는 최소한 인서울, 직장은 최소한 정규직. 이에 미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는 제대로 취급하지 않는다. 명문대를 나와서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아이와 엄마의 꿈과 소망이 된 것이다.
이것은 입신양명이 아니라, 그저 정상적인 생존을 갈망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기에 단순히 안정을 보장받는 것만 바라보고 아이가 공무원이 되거나 공기업에 들어가는 것을 꿈꾸는 경우도 적지 않다(물론 이것은 안정을 가장 중시하는 엄마의 생각을 답습한 것이리라).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참된 공부는 성숙을 지향한다. 다소 위선적인 구석은 있지만, 우리가 어릴 때에 들었던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라는 어른들의 충고는 정당한 것이다(그때에는 부자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 또한 쉽게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구화된 지금의 공부는 그때와는 분명 다른 메시지(이데올로기)를 던진다. 마샬 맥루한이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하지 않던가(매개는 내용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사회에 의해 주어지는 공부 시스템에 적응하는 만큼 그 공부에 스며 있는 어떠한 정신에 젖어들게 마련이다.
우리 시대의 공부는 이 사회의 구조가 건강하든 병들었든 이에 무관하게 이 사회가 그대로 유지될 것을 전제한다.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학의 운동권이 동물원의 원숭이 꼴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더 이상
사회 변혁이 관심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 속의 공부
더욱이 지금의 공부는 철저하게 경쟁적이다. 일차원적으로 석차를 매기는 것부터가 문제이다. 대입 시험 응시자를 일등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세우는 한국 같은 나라는 거의 없다(그나마 이를 보완하고자 입학사정관제를 들여오기는 했지만,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대학이나 시험 등에서의 수석(首席) 개념도 그러하다. 한 명일 수밖에 없는 1등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 주지만, 2등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 반면 미국 대학은 등급 개념을 사용한다. 한 명이 수석 졸업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통상 10%)이 우등 졸업한다.
그런 면에서 홍정욱의 하버드 대학 수석 졸업이 국내에 소개되었던 것은 꽤나 문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더욱이 그는 우등 등급(summa cumlaude)이 아니라 차등 등급(magna cum laude)으로 졸업했다(물론 이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게다).
그러니 이는 과장을 넘어서 거짓말이다. 여하간 한국의 공부는 윈윈(win–win) 게임이 아니라 제로섬(zero sum) 게임을 지향한다. 하나가 이기면 다른 하나가 진다. 누군가 쟁취하면, 다른 누군가 포기해야 한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간다. 이른바 승자독식사회의 양상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거다.
 
 평생학습의 저주
이렇게 경쟁에 승리한 소수가 다수의 자원을 점유하게 만드는 왜곡된 구조가 공부에 적용된 결과는 무엇일까? 왜곡된 욕망의 레일 위로 굴러가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방치한 채로 우리 자녀를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되게 공부시킨 결과는 경쟁의 끝없는 연장일 뿐이다.
그러니까 사회에 나와서도 여전히 공부하게 된다는 뜻이다. 봉급쟁이는 이제 샐러던트(saladent)가 되었다. 이른바 공부하는 직장인(salaried man+student)이다. 학교를 떠나도 공부지옥은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왜곡된 공부의 주박(呪縛)이 사회 전체를 옭아매는 것이다.
지식 사회라는 미명 속에서 갈수록 늘어나고 복잡해져 가는 업무 수행 자체가 직장인으로 하여금 자기 주도형 학습을 요하는 상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으론 부족하기에 끝없는 자기계발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평일 새벽에는 영어 학원을, 저녁에는 스터디 모임을 간다.
이제는 점심시간에도 공부해야 한다. 그렇기에 학원에 직장인 점심 특별반이 개설되었다. 아니면 헬스클럽에라도 가서 신체를 관리한다(이 또한 중요한 자기계발의 하나이다). 또한 (승진을 위한 자격시험 등으로 인해) 주중에 공부하는 걸로도 모자라 주말에도 공부해야 한다.
학생 때에 열심히 공부하면 고생 끝이라던 엄마와 선생의 약속은 이렇게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현대인은 모두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하는 평생학습자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게 된 것이다. 평생학습은 달콤하게 들리는 표현이지만, 실은 끝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저주일 뿐이다.
 
공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영웅
그럼에도 우리 시대의 공부 자체에 전적으로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애초에 이것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병폐로 인해 공부가 왜곡된 것이 아닌가. 공부는 우리 사회의 왜곡된 병리적 구조를 보여 주는 징후에 불과할 뿐이다(물론 이는 우리 사회를 작동시키는 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 사회 그 자체이다. 공부에 대한 문제 제기는 사회에 대한 문제 제기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지금의 공부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구조를 떠받치고 있다. 그렇기에 공부(와 학교와 스승)의 위상(位相)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공부가 참된 목적을 잃어버렸으니 그러한 현실을 피할 수는 없을 게다. 문득 위대한 스승이신 예수의 말씀이 떠오른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복음』, 5장 13절)
공부가 가장 쉬웠다던(정말?) 장승수 변호사를 끝으로 더 이상 개룡은 없다고들 한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말이다. 한때는 공부야말로 신분 상승의 가장 확실한 방편이었지만, 이제는 개천 위에 강화유리 뚜껑을 올려놨기에 드래곤이 날아오를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사회적 징후로서의 ‘꿈의 기업’
이런 맥락에서 KBS의 공개 오디션 프로그램 <꿈의 기업 입사 프로젝트, 스카우트>가 흥미를 끌 수밖에 없다. “약 630여 개의 특성화고등학교에서 각 학교에 맞는 주제를 선정해 경합을 벌여, 최종 1인에게 장학금 혜택 및 희망기업에 입사의 기회를” 주기에 화제를 모았다.
우리의 논의와 관련하여 볼 때에, 이 프로그램은 두 가지 면에서 징후적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등장하는 기업을 ‘꿈의 기업’으로 부르고 있다. 취업이 지고한 과업이자 목표가 된 현실이다. “영혼이라도 팔아서 취업하고 싶다.”라고 말하는 현실을 반영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 (기획 의도의 마지막 문장이 잘 보여주다시피)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에 있는 학력의 벽을 강조한다. “특성화계 학생들이 졸업과 동시에 정규직으로 취직을 함으로써 학력의 벽을 넘어 오로지 실력만으로 능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기획된 프로그램입니다.”
만일 우리 사회가 정상적인 안전망을 새로이 구축하게 된다면, <꿈의 기업 입사 프로젝트, 스카우트>는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해 보라. 취업을 위해 영혼까지 털어야 할 상황이 종식되고, 학력의 벽이 지금보다 훨씬 얇아지고 낮아지게 된다면, 이런 프로그램이 더 이상 존재하게 될 이유가 없을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욕심”
이렇게 사회가 본질적으로 문제라고는 하나, 이를 잘못 이해하면 남 탓으로 끝날 수도 있다. 실은 우리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한다. 이렇게 공부를 수단화하는 현실은 정재계의 근시안과 사교육계의 세뇌, 그리고 부모들의 불안이 삼위일체를 이루어 진행되는 것이다.
그러나 왜곡된 공부 구조를 백업하는 것은 결국 부모들이다. 문제 해결의 단초는 내 아이만은 살아남기를 바라는 부모의 욕심에 있다. 자녀 공부에 대한 부모의 욕심을 포장해서는 안 된다. 이는 부모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아이를 옥죄는 것일 따름이다.
요새는 자녀를 위해서 기러기 아빠를 감수하는 이들도 많다. 이는 정상적인 가정을 해체하는 것이다(이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이의 바른 양육을 위해 가장 필요한 환경을 말이다. 왜곡된 사회에 대한 좌절과 자녀 교육에 대한 열망의 교집합에서 생성되는 최악의 결과이다.
하지만 세상은 부모의 욕심을 예찬한다. 최근에 서울 소재 모 명문사립대학에서 제공하는 국제어학원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엑스배너(X–banner)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에 적힌 내용이 여러 면에서 문제적이었기 때문이다. 아래 부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욕심
자녀의 음식 먹는 입만 봐도 배가 부르다는 엄마, 당신의 치장조차도 사치라며, 오직 자식 하나 최고로 키우고 싶은 엄마의 욕심. 결코, 세상에서 이보다 더 아름다운욕심은 없습니다.”
 
“자식 하나 최고로 키우고 싶은” 욕심이라고 했는데, ‘최고로’라는 형용부터가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서 최고란 점수로 환산될 수 있는 영어 성적에 대한 것이다. 내 자식의 영어 성적이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이것은 자식의 참된 성장과는 무관하다. 부모의 마음은 이해가 간다. 그들은 아이가 영어를 잘하면, 외고에 진학할 수 있고, 다시 명문 대학에 입학하고, 결국 대기업 입사로 이어지게 된다고 믿고 있다. 허나 이는 참된 공부가 아니다. 영어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만나고, 이해의 지평을 넓혀가는 것에 초점이 있지 않다.
또한 이는 아름다운 욕심이 아니다. 그저 자신의 욕심을 아이에게 투사하는 것일 따름이다. 사교육 업체는 이를 부채질하고 있다. 이를 아름답다고 포장하는 사교육 업체의 말재간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공부를 모독하는 것이며, 참된 교육의 본령에 위배되는 것이다.
 
연대(連帶)가 답이다
“오직 자식 하나 최고로 키우고 싶은” 욕망은 분명 잘못된 것이다. 이는 윤리학적인 잘못이기 이전에 생물학적인 오류이다. 생태계 자체가 병들었는데, 과연 특정 유기체만 건강할 수 있을까? 내 아이가 잘 되기를 바란다면, 사회 전체가 잘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가령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대학을 평준화한다면, 우리 자녀가 대학 입학을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고생할 필요가 있을까? 혹은 앞서 말한 것처럼 성적을 가지고 일등부터 꼴등까지 일렬로 세우기보다 등급 단위만 가지고 평가한다면 우리 자녀가 스트레스를 덜 받지 않을까? 다시 말하지만 내 자식이 먼저 골인하게 독촉하기보다 모든 자식들이 함께 걸어가게 독려하는 사회를 만들면 내 자식도 훨씬 더 행복해질 것이다. 지금의 시스템은 앞서 달려가는 아이도 뒤쳐지는 아이 못지않게 힘들 수밖에 없다. 멀리 가려면 함께 가야 하는 법이다.
이렇게 연대하려면, 부모가 변해야 한다. 부모가 먼저 바른 공부를 시작해야 할 것이다. 가령 선현의 고전(古典)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성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내면의 욕망을 변혁시킬 수가 있으며, 수시로 작동하는 불안 회로의 스위치를 내릴 수 있게 된다.
다른 부모들과의 연대는 그런 후에야 가능하게 된다. 그때에서야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불행하게 만드는 공부 시스템을 바꾸고, 우리의 자녀가 행복하게 공부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공부를 바꾸기 위해서 지금 당장 고전을 펼칠 것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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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인』조지 레너드 지음|강유원 옮김|여름언덕|2009
배움의 올바른 자세를 강조하고, 그 과정에 대해 잘 분석해 놓았다.
 『배움의 도』파멜라 메츠 지음|이현주 옮김|민들레|2004
교육의 관점으로 노자의 『도덕경』을 다시 쓴 소책자이다.
 『공부란 무엇인가?』이원석 지음|책담|2014
참된 공부의 본질을 살펴보고, 그 방법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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