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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권정생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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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7-09 14:29 조회 7,31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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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영 똘배어린이문학회 회원, 『작은 사람 권정생』 저자
 
 
쓰레기통 집 애기
권정생 아버지는 1929년 일본으로 건너간다. 7년 후에는 어머니가 따라 가고 이듬해인 1937년 8월 18일에 권정생이 태어난다. 중일전쟁이 시작된 해에 태어나서 태평양전쟁까지 그는 일본에서 사는 내내 전쟁마당에서 살았다.
권정생이 살았던 일본 도쿄 시부야의 헌 옷 장수 집 뒷방은 어둡고 음산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시뻘건 물이 천장을 타고 방바닥에 떨어져서 양동이와 밥그릇까지 동원하여 빗물을 받았다. 그런 곳에서 어머니는 삯바느질을 했고 아버지는 거리 청소부를 했다.
누나는 열두 살 때부터 두 살 위로 속여 사탕공장에 다녔고 형들도 벌이를 했다. 그래도 늘 굶주렸다. 어린 정생이 견디기에 전쟁보다 더 힘들고 무서운 것은 굶주림이었다. 아버지는 쓰레기통에서 언 고구마나 상한 빵 조각 같은 것을 주워 왔고 어머니는 상한 곳을 잘라내어 화로에 삼발을 놓고 구워 주었다.
권정생은 쓰레기통에서 주워 온 음식을 먹고 자란 ‘쓰레기통 집 애기’였지만 어머니 손길만은 따뜻했다. 어머니는 바느질을 하면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바다 건너 먼 고향에 핀 꽃 이야기, 나무 이야기, 사람들 이야기…. 그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먹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자주 싸웠다. 게다가 비행기와 폭격 소리까지 어린 시절 내내 권정생의 귓전에는 그 소리들이 따라다녔다. 그러나 어머니가 따뜻한 품에서 들려준 이야기가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어린 시절을 아름답게 추억할 수 있었다.
 
목생 형님과 꼬마 언니
권정생은 5남 2녀 중에서 여섯째다. 형이 셋 누나가 둘 있고 권정생보다 3년 아래 동생이 있다. 어머니는 일본으로 갈 때 여권이 6장 필요했는데 4장밖에 구하지 못해서 첫째와 둘째는 나중에 만나기로 하고 두고 간다.
그러나 둘째 ‘목생’이 어머니와 헤어진 지 2년 만에 사고로 죽는다. 서둘러 데려오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에 빠진 어머니는 첫돌도 채 안 된 젖먹이 정생을 안고 불쌍한 목생이 얼마나 착했는지 중얼거리듯 이야기를 터트렸다. 그 이야기가 타령이 되고 자장가가 되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목생 형님’의 그림자와 어머니의 슬픔은 어린 정생의 성격에 그대로 영향을 미친다. 권정생은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세계를 동경하고 상상을 좋아하는 성격으로 자란다.
반면 자상하고 잘 생긴 셋째 형은 열두 살 위였는데 ‘꼬마 언니’라고 부르며 졸졸 따라다녔다. 그러나 꼬마 언니와 큰형은 해방 후에 총련계와 가까워지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귀국하지 못하고 영영 이별한다.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꼬마 언니는 1966년 권정생의 온몸에 결핵균이 퍼져 한쪽 신장을 떼어 내는 수술을 할 때, 그리고 다시 상태가 악화되어 재수술을 받을 때에도 수술비를 보내 준다.
서로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아픈 동생을 위해 돈을 보냈고 틈틈이 책을 보내 주었다.
그러나 당국의 검열과 감시 때문에 형제간의 편지는 뜸해지다 완전히 끊어지고 만다. 권정생이 사는 동안 셋째 형 ‘꼬마 언니’와의 이별은 가장 한스럽게 가슴에 아픈 상처로 남는다.
 
이야기 보물, 동화책
권정생 아버지는 거리 청소를 하다 쓰레기 더미에서 헌책을 가려내 뒤란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 어느 날 권정생은 그 헌책 더미에서 『삼국지』 그림책을 본다. 그림만 보는데도 재미있었다. 그러다 어느덧 혼자 글(일본어)을 익혀 동화책을 읽었다. 맨 처음 읽은 동화는 이솝의 동화였다. 그리고 『그림형제 동화집』과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 오가와 미메이의 『빨간 양초와 인어』도 읽었다. 『빨간 양초와 인어』는 인어가 그린 빨간 양초가 잘 팔리니까 할머니 할아버지가 더 큰돈을 벌고 싶은 욕심 때문에 자식처럼 키우던 인어를 팔아버린다는 이야기다. 권정생은 돈 때문에 인어를 판 노인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책을 읽고 나서 한동안 팔려가 구경거리가 된 인어아가씨가 꿈속에까지 나타나 슬픔이 가시질 않았다.
아버지는 재활용품 상인이 오면 한 권도 남김없이 내다 팔았기 때문에 권정생은 ‘내 책 한 권’을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었던 이야기들은 가슴속에 온전히 남아 있었다. 어릴 때 읽은 동화를 어른이 되어서도 잊지 않았던 권정생은 “밥은 세끼 먹고 나면 다시 배가 고파지지만 책은 한 번 읽으면 영원히 가슴에 남는다.”라고 했다. 도쿄 시부야의 낡은 집은 어둡고 침침했지만 권정생에게는 동화책이 쌓여 있던 ‘이야기’ 보물창고였던 것이다.
 
해방, 귀국
끔찍했던 전쟁은 일본의 패망으로 끝이 났다. 해방이다. 일본에서 태어나서 일본에서 자란 권정생은 해방이란 단어가 낯설었다. 권정생에게 해방이란 일본에서 보낸 어린 시절과 헤어지는 것이고 아이들과 함께 뛰어놀던 정든 땅을 떠나는 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 후 일본군을 무장해제한다는 명분하에 조선은 미국과 소련에 나뉘어 점령된다. 국제 냉전이 격화된 1946년경부터는 좌우대립이 더욱 격화되어 같은 민족끼리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1946년 봄, 권정생은 그런 조국의 땅으로 돌아왔다.
그해는 보릿고개가 심하고 거듭된 흉년으로 웬만한 집 모두가 쑥과 송피로 죽을 끓여 먹고 있었다. 권정생이 조국의 품에 안기자마자 처음으로 먹은 것도 쑥으로 끓인 죽이었다.
고향 땅을 밟았지만 아버지 고향에는 농사지을 땅도 반겨 주는 사람도 아무것도 없었다. 갈 곳 없는 식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권정생은 어머니를 따라 큰누나와 동생과 함께 청송 외가마을로 갔다. 아버지와 작은 누나는 안동으로 갔다. 큰형수는 어린 딸과 함께 친정으로 갔다. 함께 귀국하지 못한 큰형은 훗날(1982년) 재일동포 고국방문단에 끼어 고향을 방문하여 36년 만에 어린 딸을 만난다. 권정생은 「일본 거지」라는 시에 형이 다녀간 이야기를 담아 놓았다.

1947년 봄, 청송
경상도는 일제강점기 때 해외로 나갔다가 돌아온 동포가 다른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많았다. 청송 같은 산간지방에는 특히 먹을 것이 부족해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했다. 권정생 어머니는 약초를 캐고 품을 팔아 겨우 아이들 입에 풀칠을 했고 겨울에는 동냥이라도 나가서 아이들을 먹였다.
어머니가 돌아오지 않고 먹을 것이 떨어진 어느 날 권정생은 정미소로 가서 쌀을 훔친다. 쌀자루를 가지고 나오다 일꾼 아저씨에게 들키는데 아저씨는 “가난한 사람끼리는 서로 도우면서 살아야 한다.”라며 오히려 자루에 쌀을 가득 담아 주었다. 그러나 경찰은 정미소 아저씨를 ‘빨갱이’라며 붙잡아 간다. 열한 살 소년 정생은 굶주린 자신에게 쌀자루를 채워 준 아저씨를 왜 잡아가는지 궁금했다. 권정생은 이때 이야기를 동화로 쓰는데 그것이 「쌀 도둑」이다.
어른들은 ‘빨갱이’라고 했지만 소년 정생에게 정미소 일꾼 아저씨는 고마운 ‘사람’일 뿐이다. 권정생이 정미소 일꾼 아저씨를 사람으로 만난 걸 떠올리면 『몽실언니』에서 몽실이와 인민군 최금순 언니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꾼 아저씨는 『몽실 언니』에서 뿐만 아니라 6.25전쟁을 다룬 많은 작품 속에서 인민군을 ‘적’이 아니라 ‘사람’으로 만나는 여러 인물로 다시 태어난다.
 
안동 조탑리와 6.25 전쟁
1947년 12월, 권정생 아버지가 안동 일직면 조탑리에 소작을 얻어 식구들이 모두 모였다. 그들이 정착한 곳은 소작지에 딸려 있던 작은 농막이었다. 일본에서도 학교를 다녔고 청송에서도 다녔지만 1948년 3월, 권정생은 일직공립국민학교에 동생과 함께 1학년으로 입학한다. 나이도 있고 공부도 잘했으므로 선생님은 권정생을 월반시키려 하였으나 어머니가 반대한다.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서는 돈을 모아야 하는데 월반하면 돈을 모을 시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권정생이 중학교에 갈 꿈을 꾸고 있을 무렵 전쟁이 일어난다. 귀국한 지 4년 만에 끔찍한 전쟁을 또 겪은 것이다. 1953년 2월, 졸업을 한 달 앞두고 화폐개혁이 일어난다. 어머니가 중학교에 보내기 위해 모은 돈의 가치가 100분의 1로 떨어져 권정생은 중학교에 가지 못한다. 그렇다고 공부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지게를 만들어 갈비(불쏘시개로 쓰던 솔잎)를 해다 팔아서 모은 돈으로 닭을 키우며 진학의 꿈을 키웠다. 그러나 전쟁과 함께 미국에서 닭 전염병이 덮쳐 키우던 닭이 모두 죽는다.
하는 수 없이 가까운 읍내에 있는 고구마 가게 점원일을 시작한다. 주인은 갑절이 넘는 이윤을 남기면서도 저울을 속여 팔라고 했다. 권정생은 거역하지 못하고 양심을 속였는데 어머니에게도 저울을 속일 뻔한 자신을 보고 고구마 가게를 그만둔다. 양심을 속이고 돈에 복종했던 권정생을 일깨워 준 건 어릴 때 읽은 「빨간 양초와 인어」, 「행복한 왕자」, 「장발장」 같은 동화책이었다.
 
부산에서 꿈을 꾸다
1953년 겨울, 권정생은 고학을 꿈꾸며 부산으로 떠났다. 날마다 고되고 힘든 점원생활 속에서도 돈만 있으면 헌책방에 가서 책을 빌려 읽었다. <학원> 잡지와 『죄와 벌』, 『플루타크 영웅전』, 『무영탑』 같은 소설을 읽고 인간
의 다양한 모습과 현실을 만나며 인생 공부를 하였다. <학원>은 ‘중학생 종합잡지’였는데 무엇보다 ‘독자구락부’란에 작품을 응모할 수 있었다. 작가의 꿈을 꾸었던 권정생은 틈틈이 써 본 시와 소설을 응모해 보기도 한다.
부산에서 만난 오기훈은 함께 책을 빌려 읽고 영화를 보며 마음을 나누던 친구였는데 자살을 한다. 권정생은 그 충격으로 함께 읽던 <학원>을 다시 읽지 않았으며 시와 소설을 써 보던 것도 그만둔다. 부산에서 만난 또 한명의 친구 최명자도 고달픈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서울의 윤락가로 들어간다. 권정생은 삶을 포기하고 꿈을 놓아버린 친구들을 생각하며 「갑순이와 갑돌이」란 동화를 쓴다. 이 동화는 유행가 제목 같다고 하여 「별똥별」로 제목이 바뀌어 출판된다.
권정생은 작가의 꿈을 꾸며 부산 생활을 시작했지만 야간학교조차 엄두도 못 냈다. 그 대신 혼자 책을 읽었다. 책을 읽으며 그는 사람에게는 공부가 필요하지만 꼭 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을 읽으며 혼자라도 열심히 글을 쓰고 공부를 계속해야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러나 그 다짐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핵이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어머니의 죽음
권정생은 몸에 열이 오르고 기침이 나더니 자전거를 탄 채 오르막길을 오를 수 없을 정도로 숨이 찼다. 1년 동안 아픈 걸 참고 버티었더니 늑막염에 폐결핵이 겹쳤다. 그는 어머니 손에 이끌려 집으로 돌아온다. 마을에는 권정생처럼 객지로 나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온 사람이 많았는데 하루가 멀다 하고 한 명씩 죽어나갔다. 약을 살 형편이 되지 못하니 어머니는 약초를 캐 왔고 메뚜기와 뱀과 개구리를 잡아와 껍질을 벗겨 먹였다. 죽기만 기다리던 권정생이 어머니의 정성으로 점차 나아지자 1963년 교회학교 교사가 된다.
1964년 1월 10일에는 열다섯 무렵부터 써 두었던 동시 98편에 글과 그림을 넣어 『삼베 치마』라는 시집을 만든다. 죽지 않을 거라는 희망이 생기면서 권정생은 작가의 꿈을 다시 키우며 동시집을 손수 만든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여덟이었다. 이 동시집은 2011년 권정생이 만든 그대로 출판되었다.
그러나 그 꿈도 잠시, 1964년 늦가을에 어머니가 쓰러진다. 권정생은 아픈 몸으로 정성껏 간호했으나 어머니는 6개월 만에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동생을 결혼시켜 가계를 잇게 하려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집을 나온다. 하지만 돈도 없고 갈 곳도 마땅치 않던 권정생은 1965년 4월 중순부터 8월 초순까지 3개월 동안 거지 생활을 한다.
 
거지 생활 3개월
“배도 고프고 춥고 외롭고 슬프고 미움 받고 업수이여김을 받고 다만 하나만, 나의 알맹이만은 절대 굽히지 않으면 된다.” 권정생은 이렇게 다짐하며 ‘거지가 되자’고 마음먹는다. 자신이 게을러서도 아니고 못나서도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세상에 대해 비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거지생활을 시작했지만 굶주림과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럴 때면 권정생은 예수를 떠올리며 위안을 받았다. 그는 다섯 살 때 처음 예수를 알게 되고 그때부터 예수를 믿었다. 성경을 늘 곁에 두고 읽었다. 거지로 떠돌면서도 성경을 읽으며 예수에게 가장 의지하며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하루하루 성경과 기도에 의지한다 해도 권정생은 너무 배가 고팠다. 그럴 때면 자신도 모르게 가장 밑바닥에서 올라오는 가장 고통스럽고 솔직한 한마디는 ‘어머니’였다. 그는 죽기도 살기도 힘겨운 나날을 보내다 도저히 더는 버틸 수가 없어 기어 기어 집으로 돌아온다.
권정생의 칠십 평생의 시간에서 고작 3개월일 수 있지만 이 3개월의 거지 생활로 권정생은 온몸에 결핵균이 퍼진다. 병이 더할 수 없이 깊어진 것이다. 콩팥 방광까지 다 드러내 제 서른살밖에 안 된 나이에 소변주머니를 밖으로 달았다. 의사는 2년밖에 살 수 없다는 선고를 내렸다.
 
세상을 ‘거꾸로’ 보다
부모님은 돌아가시고 동생은 결혼을 해서 나갔다. 농사지을 수 없어 농막을 비어주어야 했던 권정생은 교회 문간방으로 가서 예배당 종지기가 된다. 날마다 견딜 수 없는 병마의 고통과 시한부 선고는 권정생을 괴롭혔다. 그럴 때 교회 부흥회를 다녀간 목사에게 “권 선생님의 생활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거지 나사로와 꼭 같다고 생각했습니다.”라는 편지를 받는다. “과연 그렇다. 나는 부자의 문간에 앉아서 얻어먹는 거지이다.”라며 자신이 ‘거지’였음을 새
삼 깨달은 권정생은 그때부터 세상보는 눈을 달리하기로 한다. “천국이라는 것, 행복이라는 것,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거꾸로” 보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겉으로 화려하게 꾸민 곳이 천국이요, 행복이요, 아름다움일터이지만 ‘거꾸로’ 보면 그렇지 않다. 그는 ‘거꾸로’ 눈에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을 보기로 한다.
권정생은 비록 가난했지만 착하고 성실했고 무엇보다 작가의 꿈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병든 자신의 겉모습만 보고 하찮게 여길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이대로 그냥 죽을 수 없었다. 죽이라도 끓여 억지로 삼켰고 새벽이면 예배당 종줄을 잡았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봄날, 그는 ‘강아지똥’이 잘게 부서진 자리에 핀 민들레를 본다. 강아지똥이 꼭 자신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은 더럽다고 피하지만 강아지똥은 예쁜 민들레를 피우는 얼마나 귀한 존재란 말인가. 동화 「강아지똥」은 그렇게 태어났다.

쉼 없는 글쓰기 노동
1969년 5월 「강아지똥」이 제1회 기독교아동문학상 현상모집에 당선된다. 권정생은 「강아지똥」을 쓰는 동안 죽음을 넘기고 동화작가가 된다. 하루 글을 쓰면 이틀은 누워 쉬어야 하는 아픈 몸이었지만 가능한 한 혼자 힘으로 살아가려 했기에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땀 흘려 농사를 지어 먹고 사는 것이 가장 사람답게 사는 삶이라 생각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그는 농사를 짓는 마음으로 글쓰기 노동을 했다.
1974년에는 첫 동화집 『강아지똥』을 냈다. 그가 거지로 떠돌며 보고 겪고 느꼈던 이야기들을 써서는 두 번째 동화집 『사과나무밭 달님』(1978)을 펴냈다. 반공으로는 통일이 될 수 없고 북쪽에도 우리 민족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1978년부터 10여 년 동안은 소년소설 연재를 시작한다. 흔히 ‘6.25전쟁을 다룬 소년소설 3부작’이라고 일컫는 『초가집이 있던 마을』, 『몽실 언니』, 『점득이네』가 그것이다. 이들 작품은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맞댄 전쟁을 반대하고 통일을 주장한다.
그러나 권정생은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21세기를 맞게 되자 『밥데기 죽데기』를 써서 남북이 통일 되고 세계평화도 이루는 꿈을 담아낸다.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에 연재를 마친 마지막 동화 『랑랑별 때때롱』에는 농약 안 치며 농사지어 밥 먹고 산나물 무쳐 먹고 어두워지면 호롱불 켜고 싸움 없이 평화롭게 살고 싶은 그의 꿈을 담았다.
동화뿐만 아니라 시와 산문 등 그는 마지막까지 쉼 없이 글을썼다. 전쟁을 반대하고, 골프장이니 고속도로니 자연을 파괴하는 일에 반대하고, 교회만 커지는 현실에 쓴 소리를 하는 글을 썼는데 그 글들을 모아 펴낸 책이 『우리들의 하느님』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을 위해서
권정생은 『몽실 언니』 인세와 가지고 있던 돈을 모아 빌뱅이 언덕에 작은 집을 지었다. “따뜻하고 조용하고 그리고 마음대로 외로울 수 있고, 아플 수 있고, 생각에 젖을 수 있는” 집이 생긴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3년 동안 전기도 없이 호롱불을 켜고 가난하게 살았다. 동화가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면서 돈이 통장에 모이게 되어도 스스로 가난한 삶을 선택하였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곳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인세로 받은 오천만 원으로 옥수수를 사서 북한에 보내기도 하고, 아이들을 위해 싸우다 해직된 교사를 위해, 북한 용천역 폭발사고로 집을 잃거나 다친 동포들에게, 일제 징용 조선인 마을 우토로를 살리기 위해서도 돈을 내놓았다.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 『몽실 언니』를 공연했을 때는 원고료를 받는 대신 극단 이름으로 북한어린이돕기 성금을 내달라고 했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서는 최소한의 생활비와 원고지를 사는 것 외에는 쓰지 않았다.
2005년 5월 10일에 쓴 유언장에서 “내가 쓴 모든 책은 주로 어린이들이 사서 읽는 것이니 여기서 나오는 인세는 어린이에게 돌려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 그리고 2007년 3월 31일 오후 6시 10분 북측의 굶주리는 아이들, 중동, 아프리카, 티벳의 고통 받는 아이들을 위하여 마지막 글을 썼다.
“제발 그만 싸우고, 그만 미워하고 따뜻하게 통일이 되어 함께 살도록 해주십시오.”
권정생은 2007년 5월 17일 오후 2시 17분,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가 계시는 그 나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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