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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책 읽는 부모] 철학자 아빠의 ‘생각하는’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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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1-26 15:09 조회 7,964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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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동석 북칼럼니스트 9744944@hanmail.net

혹시 처음 아이를 낳았을 때를 기억하시는지. 기쁨과 환희, 생명에 대한 경외감에 가슴 벅찬 눈물을 흘렸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했던 기억은 없으신지. (적어도 내겐)그 막막함은 처절한 현실이 되었고, 단지 하루하루를 허덕이며 살았을 뿐이다. 그 시절엔 어서어서 자라주기만을 바라며 그저 생각 없이 버텼다. 그렇게 생각 없이 키웠는데도 별 탈 없이 잘 커주었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런데 이 책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를 보고 있자니 얼굴이 화끈거린다. ‘너 진짜 생각 없이 아이를 키웠구나’ 하는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렸기 때문이다.


싫어, 싫어를 연발하는 아이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는 아내의 미국 유학으로 아무 준비 없이, 느닷없이 육아를 전담하게 된 ‘철학자’ 아빠가 쓴 인문육아일기다. 아내를 미국으로 보내기 전까지 철학자 남편은 희희낙락했다. “다시 결혼 전처럼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시간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출국장으로 들어서며 아내가 던진 “아이 잘 부탁해” 한마디에, 공항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멀고 힘들게만 느껴졌다. 아니나 다를까. 이내 불안감이 밀려왔다. “나를 이토록 불안하게 만드는 이 아이는 누구인가?” “아이를 올바르게 키운다는 것은 무엇인가?” “아빠란 어떤 존재인가?” 그렇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철학적인 의미에서 인식론적, 윤리학적,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이었다. 철학자 아빠는 그렇게 인문육아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

“아이는 엄마의 부재를 나름의 추리로, 또 온몸으로 견디려 했다면, 나는 이 책에 모여 있는 일기를 쓰면서 육아가 주는 불안을 견디려 했다. 육아에 대한 조금의 식견도 없는 나는 파트너가 없는 동안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하는 불안이 폭풍우처럼 몰아쳐 와서 이리저리 흔들리며 지낼 수밖에 없었다. … 그때마다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인문학을 골재로 기초 공사를 하고 몇몇 철학적 개념과 통찰을 단단한 벽돌로 삼아 하나씩 쌓아 올려 집을 만들었다. 그 집이 이 책이다.”

이제 26개월이 된 아이 선재는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아직은 영아”지만 모든 일에 “싫어, 싫어”를 남발하는 반항적 아이이기도 하다. 밥 먹기도 싫고, 놀기도 싫고, 심지어 자는 것도 싫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아이는 늘 먹고 놀고 잔다. 이런 현실 앞에서 규칙은 무용지물이다. 아이를 이해시킬 만한 적당한 언어가 없고, 당연히 말로 규정된 육아 원칙은 아이에게는 통할 리 만무하다. 무엇을 하지 않으면, 이렇게 하면, 벌을 선다든가, 매를 맞는다든가 하는 규칙은 선재에게 이해 불가의 말이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결국 ‘누구를 위한 규칙인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마침내 제대로 아빠 역할을 하지 못해 “아빠가 미안하다”를 연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은이는 아이를 돌보는 것이 “궁극적으로 세계이며 나를 넘어서 있는 힘”이라고 규정한다. “생명은 내가 있게 하거나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기에”에 더더욱 그렇다. 따라서 생명을 있게 하는, 자라게 하는 궁극적인 원천의 힘에게 맡길 수 있어야 행복한 육아, 자유로운 육아가 될 수 있다. 그러면 아이도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무반응은 또 다른 폭력
사실 모든 아빠들이 아이와 잘 놀지 못한다. 동심으로 놀아본지 오래되기도 했고, 결정적으로 아이와 대화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지은이도 “아이와 노는 게 말처럼 쉬운가” 하고 세상 모든 아빠들과 맞장구를 친다. 그럼에도 “아이와 놀아 주기가 아이에게는 의미 있는 일임은 분명”하지 않은가. 어떤 학자에 따르면 아이가 세 살이 되기 전 아빠와의 거친 몸 놀이를 통해 두뇌가 자극되고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돈독해지며 사회성도 발달한다. 아이와의 놀이를 무의미한 시간 죽이기로 이해하는 부모들에게 지은이는 일격을 날린다.

“대개 부모들은 아이와 놀아 주는 것을 하나의 교육 행위로써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중요도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뒤로 미뤄 두고 있는 것 같다. 아이와 잘 놀아 주는 것이야말로 아이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교육이라는 사실을 일부러 다짐하거나 상기하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누구든 시간이 남는 사람이 해야 하는 아이의 뒤치다꺼리로 인식해 버리게 된다.”

아이들은 본의 아니게 폭력적일 때가 있다. 선재도 예외는 아니었다. 뭔가 짜증이 난 듯 과일을 집어던지기도 했고, 아빠를 때리려고 손으로 움켜쥐기도 했다. 아이의 폭력성은 “스스로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이다. 인류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터득한 삶의 기술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폭력적 행동 하나로 아이들을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판단할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부모의 적절한 반응이다. “부모가 어떤 사정으로 아이의 자극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한다면 아이는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한 과도한 수준의 행동을 하게 되고, 이것이 폭력이나 공격의 형태로 드러나는”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저자는 무반응을 일러 “또 하나의 폭력”이라고 강조한다. “모든 인간은 본래 지향적 존재이며 본성상 표현하는 존재이기에 인간인 한 자신의 표현성과 지향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아이들이 폭력성을 보이는 것이다. 모든 부모가 지금 무반응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아빠와 함께 소소한 일상을 보내는 듯 보이지만, 선재는 가벼운 틱 증상을 겪을 정도로 스트레스가 많았다. 엄마의 부재, 정성을 다하는 듯 보이지만 미진할 수밖에 없는 아빠의 육아 등등이 선재에게 적잖은 영향을 준 것이다. 이 경우 육아를 담당하는 아빠와 돕는 두 할머니의 죄책감을 커질 수밖에 없다. 사실 해답도 없다. 그저 버티며 더 사랑하는 방법 밖에는. 여기서 이야기는 스트레스를 유발하는 우리 사회로 이어진다. 나아가 아이들의 스트레스 해소에 둔감한 사회적 분위기도 질타한다. 키즈카페가 우후죽순처럼 생긴다지만 그곳은 아이들의 보금자리가 아니라 잠시 흥분하다가 마는 곳일 뿐이다.


“내 아이와 내 삶이
새롭게 보인다”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는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아빠의 모습을 담은 일종의 성장기라고 할 수 있다. “내 아이와 내 삶이 새롭게 보인다”는 지은이의 고백은 아마도 100퍼센트 진실일 것이다. 실제로 일기장의 페이지가 늘어갈수록 아빠는 한 뼘씩 성장했다. 그렇다고 완벽한 아빠가 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아이는 자라고 있고, 부모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오늘을 계속 맞이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기르는 것만으로도 사실 벅차다. 하지만 지은이의 말처럼 “생각하는 육아”를 실천할 수만 있다면 아이와 더불어 더 행복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철학자 아빠의 인문육아』는 아빠뿐 아니라 엄마도 함께 읽어야 할 육아지침서로 손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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