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의 

옷과 구두를 고치는 마음

올 칠월까지 책 수선 예약이 꽉 차셨다고요. 출간 인터뷰와 수선 의뢰가 많아 바쁘실 것 같은데, 요즘 하루는 어떻게 보내고 계시나요?

밥 먹고 출근하고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집에 가서 밥 먹어요. (웃음) 제가 하는 일이 워낙 집중을 요하는 일 인 데가 시종일관 작업실에서 긴장한 상태로 있어야 하다 보니 운동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요즘엔 일 의 강도가 세서 예전처럼 독서로 스트레스를 푸는 일이 쉽지 않아요. 가끔 <프렌즈>나 <굿 플레이스> 같은 시트콤을 보면서 긴장을 풀고 운동한 뒤 작업실에서 일을 계속하는 하루를 보내고 있어요. 책 수선 의뢰를 이메일로 받는데, 메일로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의뢰인이 직접 책을 들고 작업실을 방문해 주시거나 고칠 책을 우편으로 보내주세요. 저는 그 책을 꼼꼼히 점검하고 반드시 수선해야 하는 부분과 같이 수선 하면 좋을 부분 등에 관하여 의뢰인과 상의를 해요. 모든 논의가 끝나면 본격적인 책 수선에 들어가요. 의뢰인이 맡기는 책마다 파손의 정도가 다르다 보니 수선 과정도 다른데, 아무리 빨리 작업해도 일주일 정 도 걸려요. 경우에 따라 넉 달까지 걸리는 책도 있고요. 수선 전 책 사진을 촬영하고 수선이 끝나면 의뢰 인에게 작업이 완료됐다는 소식을 전합니다. 종종 멀리 사시는 의뢰인에게는 제가 직접 책을 보내드리기도 해요. 

미국에서 북아트와 제지를 전공하고 책 보존 연구실에서 일하셨어요. 상사가 꽤 무서웠다고 하셨는데, 동고동락하면서 얻은 스트레스나 배움도 있으실 것 같아요. 

제게 일을 가르쳐 준 분은 완벽주의자셨어요. 책 수선 일의 특성상 그런 성격이 필요한 건 사실이에요. 그럴수록 작업물의 완성도가 높아지니까요. 제가 봤을 때는 이 정도면 결과물이 충분히 괜찮은데, 조금이라도 자기 기준에 맞지 않으면 “다시”라는 말을 계속하셨어요. 그렇게 훈련을 시키셨고 가끔 화를 내시기도 했어요. 그곳에서 일했던 인턴들이 일을 빨리 그만두곤 했는데, 저는 아무리 뭐라도 해도 강하게 단련 된 무언가(?)가 있어서인지 학교를 졸업하고 난 뒤에도 버텼어요(편집자 주: 책 보존 연구실은 대표가 재학했던 학교 지하에 있던 도서관으로, 대표는 3년 6개월 동안 연구실에서 근무했다). 연구실에서 제가 가장 오래 일했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 분에게 철두철미함을 배웠어요. 책 수선 작업만큼은 실수를 줄이는 게 몸에 밴 것 같아요. 애증의 관계이긴 하지만 저한테 책 수선 기술을 가르쳐 주셨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준 상사는 같은 학교의 같은 학과를 졸업한 높은 선배이기도 해요. 제가 책 수선을 할 때 모토로 여기고 생각 하는 말이 있는데, 이는 상사가 하신 이야기예요. “모든 종이는 기억을 가지고 있다.” 한 번 접히거나 스크래치가 나면 아무리 감쪽같이 복원해도 종이의 접힌 자국은 영원히 남기에 언제든 똑같이 파손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기 위해 하셨던 말이에요. 상사가 하셨던 말 중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에요. 

한국으로 돌아와 작업실을 차리셨는데, 세무서에서 사업을 등록할 때 업종을 무엇으로할지 공무원들이 난감해했다는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어요. 창업 뒤 일 년 동안 어떻게 버티셨어요?

작업실을 찾으러 다닐 때도 애먹으셨을 것 같아요. 수선하는 책을 잘 보존하려면 작업 환경도 고려해야 하니까요.  

습도가 높은지 체크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어요. 책 수선 작업실의 특성상 해가 많이 들면 안 되기 때문에 작업실이 위치한 방향도 북향이어야 했어요. 작업에 필요한 환경적 요건을 모두 따지느라 아예 습도계를 들고 작업실을 구하러 다녔죠. 매물을 볼 때마다 실내 온도를 확인하느라 조금 힘들었어요. 이전에 머물 던 작업실도 그렇고 이번에 옮긴 작업실도 좋은 공간으로 잘 구한 것 같아서 만족하고 있어요.

대표님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가리켜 미국에선 '책 보존가(Book Conserva-tor)'로 불린다고 하셨어요. 화려한 수식 대신 '수선'이라는 단어를 쓰신 이유는요?

책의 기억을 관찰하고

새로운 책으로 만듭니다

의뢰인으로부터 받은 책이 세상에 단 한 권밖에 없는 희귀서적이라는 긴장감으로 일한다고요. 수선에 앞서 의뢰인과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시나요?

작업실을 차린 후 처음 수선하신 책이 『89 시행 개정 한글 맞춤법 수록 국어대사전』이라고 하셨는데, 첫 작업 책이라서 잔상이 진하게 남으셨을 것 같아요.

『89 시행 개정 한글 맞춤법 수록 국어대사전』의 수선 전후 모습

본폴더, 가위, 프레스 등 책 수선을 위한 도구의 쓰임들이 궁금하더라고요.

책 수선을 한다고 하면 특별한 도구가 필요할 거라고 많이 생각하시는데, 자기한테 잘 맞는 것이라면 모 두 도구로 활용할 수 있어요. 뜨고 바르고 접고 긁어 내는 용도를 가진 도구라면 쓰려고 하는 편이에요. 마이크로 스패츌러, 스포이트는 과학실에서 많이 쓰지만 책 수선하는 데에도 쓰고 있어요. 책 수선가마다 자기가 선호하는 도구들이 따로 있고, 프레스는 맞춤 제작하는 경우가 많아요. 주로 북 바인딩하는 분들이 쓰시는 도구와 비슷해요. 본폴더는 눌러서 붙이는 작업을 할 때 주로 쓰는 도구인데 사슴 뒷다리뼈로 만든 것, 테플론(고분자 재료)으로 만든 것 등 다양하게 갖고 있어요.

특히 NT cutter 브랜드의 칼은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썼던 데다 워낙 아끼거든요. 미대생들은 도구를 험하게 써야 할 때가 많아서 칼 하나는 반드시 저만 쓰고, 나머지 하나는 친구에게 빌려 주는 용도로 쓰기 위해 칼만큼은 두 개를 소장하고 있어요. 이젠 쓰지 않지만 여전히 애정하는 붓은 제가 미국에서 마지막으로 연구실에 출근한 날 상사로부터 받은 선물이에요. 그 붓은 제가 일할 자리에 배정되었을 때 “최고령의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는데, 오히려 새 붓보다 일하기에 더 편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상사는 제가 왜 그 붓을 원하는지 아셨을 것 같아요. (우) 책 수선 도구 중 하나인 본폴더

어린이에게 선물할 책을 의뢰받거나 의뢰인이 어린 시절 읽었던 책을 맡을 때에는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아요.

돌아오는 아이 생일에 맞춰 선물로 주고 싶다며 맡기셨던 ‘해리포터’ 시리즈를 작업한 기억이 생생해요. 손을 많이 탔던 그 책은 미국 영문판이었는데, 갱지로 인쇄되어 있어서 내구성도 약했거든요. 찢어진 곳, 뜯긴 곳, 망가진 제본 등을 구분해서 파손의 유형을 여러 권에 표시했고 표지에 생겨난 결들을 보완하여 그림 복원 작업도 함께했어요. 책에 인쇄된 그림을 복원할 때는 마르고 나면 펄프 사이사이에서 딱딱하게 굳는 아크릴 물감보다 얇고 유연한 수채 안료를 사용했어요. 아이에게 물려주려고 하셨기 때문에 복원에 최대한 집중했는데, 의뢰인께서 책이 이렇게까지 복원될 줄 몰랐다며 좋아해 주셨어요. 1980년~1990년 사이에 인기를 끌었던 ‘ABE 시리즈’ 중 한 권인 『비챠의 학교생활』 수선 작업을 할 때도 재밌었어요. 당시 의뢰인께서 조카에게 선물할 거라며 수선을 맡기셨는데, 정작 조카보다는 그 책을 어렸을 때 읽었던 의뢰 인의 오빠가 더 좋아했다고 하셨어요. (웃음) 선물을 받았던 조카보다 책 수선 이야기에도 시큰둥했던 의뢰인의 오빠를 위한 선물이 남게 되어서 제게도 또 다른 추억으로 남았어요.

학교도서관에서 '파손도서에게 해주고 싶은 말' 코너에 "네가 찢어져서 힘들었겠구나", "미안해"라고 써 놓은 어린이들의 글귀를 본 적이 있어요. 망가진 책을 마주하는 어린이들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이들이 보는 책이라면 파손이 되는 건 당연한 일 같아요. 어릴 땐 가지고 놀기 위해 책을 보기도 하잖아요. 책으로 성을 쌓고 던지기도 하고 주인공 얼굴을 따라 그려 보기도 하고요. 그 모든 게 책의 역할이기에, 파손된 책을 보고 어린이들이 너무 안타까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공공도서관에서 소장 중인 책은 모두가 읽는 책이기에 함부로 다루면 안 되지요. 그런 공공성을 띤 책들을 제외한 책을 읽을 때만큼은 자유롭고 편하게 책을 보길 바라요. 책을 갖고 놀다가 망가지더라도, 그것을 파손으로 여기기보다는 책과 더 가까워지는 일이라고 여겼으면 좋겠어요.

책을 갖고 놀수록 책에 대한 추억이 쌓여요. 그래서 책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식의 문화가 과도하게 퍼지지 않았으면 해요. 그 문화가 어린이들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일이 될 수 있으니까요. 어느 날, 책을 수선하기 위해 책장을 들여다보다가 빨간 색연필로 선을 그어 놓은 낙서를 발견했어요. 저는 의뢰인의 자녀가 해 둔 낙서라고만 여겼는데, 그 낙서를 본 의뢰인께서 자녀가 낙서를 했을 때 입었던 차림새, 둘이서 어떤 시간을 나눴었는지 줄줄이 사탕처럼 꺼내 놓으시더라고요. 낙서 하나로 즐겁게 회상하는 의뢰인의 미소를 보니 저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어요.  

책의 생을 넘어 인생의 온기를 더하는 일

책 군데군데 "테이프를 쓰지 마세요!"라고 강조하셨는데, 첨엔 유머러스했다가 정말 쓰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종종 책 보수 작업을 하시는 사서샘들을 위한 깨알 팁을 전하신다면요?

책 수선을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청결’이에요. 작업대 위가 깨끗해야 하고, 책 수선을 하는 데 쓰는 도구들도 늘 제자리에 있어야 해요. 저는 출근하고 처음 하는 일도 마지막에 하는 일도 청소예요. 강박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데, 그렇게 해야 작업에 제대로 집중할 수 있더라고요. 그렇게 배우기도 했고요. ‘안전’에 신경을 안 쓰는 경우가 많은데 생각보다 책이 굉장히 더럽거든요. 으레 우리가 오래된 책 냄새라고 느끼는 것들은 다 곰팡이와 먼지 냄새예요. 건강에 좋지 않아서 마스크나 보안경 착용을 꼭 해야 합니다. 

책을 읽을 때 핸드크림을 바르지 않아야 종이를 깨끗이 할 수 있지만 책 보수 작업이 끝나고 난 다음에는 핸드크림을 꼭 바르시길 바라요. 책을 고치는 사람의 건강과 안전도 중요하니까요. 제가 책에서 테이프를 쓰지 말라고 여러 번 언급했는데, 이때 쓰지 말라고 당부하는 테이프는 ‘스카치테이프’를 의미해요. 요즘은 쉽게 전문가용 책 수선 재료들을 살 수 있으니 테이프 역시 책 수선을 할 때 쓰는 전문가용 테이프를 쓰시길 권해요. 책이 물에 젖었다면 물기를 털어 내고 곧바로 냉장고에 넣어 보세요. 그러면 종이가 덜 우그러지고 평평하게 할 수 있어요. 단, 물에 젖고 난 직후에 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걸 명심하세요. 

낙서, 손때, 벌레자국… 망가진 책의 모든 형태를 사랑이라고 말씀하신 문장에 눈길이 갔어요. 수선하는 책에 남은 흔적으로 해 보고 싶은 프로젝트가 있나요?

책을 수선하면서 종종 그 안에 낀 벌레들을 만나요. 이 친구들은 아늑한 공간을 찾아 들어왔을 뿐인데 책 틈에 껴서 죽고 만 거잖아요. 가엾다는 생각이 들어서 공개 하기에는 조심스럽지만 틈틈이 모으고 있어요. 자수를 넣어 베드를 제작하는 등 벌레들의 유골함을 정성 들여 만들고 있지요. 의뢰로 받은 책들을 수선하면서 원본에서 떨어져 나온 자투리들도 꽤 되더라고 요. 그걸 한 권 한 권마다 아카이빙 해 두 고 있어요. 전시의 형태가 될지 또 한 권의 책이 될지 모르지만 암암리에 준비하는 것이 있답니다. (웃음) 다양한 분야와 협업해 보고 싶은 마음도 커요. ‘월간 윤종신’과 함께 뮤직비디오 작업을 해 본 일도, 책 수선가가 나오는 드라마에 자문을 해 준 일도 책 수선을 잘 모르는 분들을 생각하고 시작한 일이에요. 책 수선가가 하는 일을 소개할 수도 있고, 저 역 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일들을 올해 초입에 많이 계획하고 실행했던 것 같아요. 작업실에서 일에만 매달 리다 보면 외골수가 되는 것 같아서, 해소가 필요할 때마다 제 일을 확장시킬 수 있는 것들을 두루 살피고 있어요.

 

재영 책수선 작업실

책 수선도 하나의 예술 장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대표님께 영감을 주는 뮤즈가 있다면요?

저는 친구들이 자신의 업을 대하는 태도를 보고 감동을 받곤 해요.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친구가 자신이 담당한 작가를 대하는 태도, 절친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이 배워요. 예를 들어 목정원 작가(『모국어는 차라리 침묵』)는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저와 달라요. 정원 작가에게는 모든 사람을 아름답게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눈으로 보기에 ‘예쁘다’라고 표현하는 것에 머물지 않고 어떤 존재가 지닌 가치를 아름답게 표현하는 재능이 뛰어난데, 저에게는 그런 재능이 없어요. 그래서 그 친구에게 많은 것들을 배워요. 주변에 건축하는 친구들이 있는데 책 수선이 건축과 꽤 닮았거든요. 구조를 쌓아 올린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그래서 건축하는 친구들이 자기 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서도 많이 배워요. 저와 다른 분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감각을 계속 넓히고 싶어요.

"책 수선가가 점점 많아져서 훨씬 더 많은 책들이 오랫동안 튼튼한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되면 좋겠다."고 하셨지요. 책 수선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변치 않아야 할 책 수선가의 마음에 관해 들려주세요.

종종 책 수선가가 되고 싶다며 상담을 요청하는 청소년들이 있어요. 어떤 공부를 하고 어떤 대학에 가야 하는지, 무슨 학과를 전공해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들을 많이 해요. 사실 책 수선가가 되는 것에는 정답이 없어요. 저는 미대를 졸업했는데 책 수선 일을 하시는 분들을 보면 화학과나 문헌정보학과를 나온 분들도 계시거든요. 특히 책 수선가 되기만 바라보고 공부를 시작하기에는 요즘 시대에는 할 수 있는 일들의 스펙 트럼이 넓어지고 있어요. 꼭 책 수선 일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하고자 하는 일의 범위를 한정 짓지 말고 나 의 업이 여러 일로 다양하게 연결될 수 있음을 기억한다면 좋을 것 같아요. 책에 관심을 꾸준히 갖고 있다 면 그 꾸준함이 책 수선가가 될 수 있는 문이 되어 줄 거예요. 책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했다가 북바인딩에 흥미를 가져서 책 수선가가 될 수도 있고, 출판업을 하면서 취미 활동으로 책 수선을 하다가 깊이 빠져서 책 수선가가 될 수도 있어요. 유연한 마음과 열린 마음으로 하고 싶은 일에 다가가길 바라요. 책을 수선하 는 사람을 그런 가능성을 넓히는 사람으로 바라본다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