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저자 [팬심과 펜심]『뒤늦은 답장』 정원 만화가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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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2-12-02 11:58 조회 1,428회 댓글 0건본문
"자전적인 이야기는 쓰지 않는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요. 살아온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작품에 녹이는 작가가 많은데, 쓰지 않으려는 치열함도 클 것 같아요.
그 이야기는 일전에 했던 인터뷰에 언급했던 말이에요. 다소 과장된 면이 있는데, 당시 저는 최은영 소설가의 『몫』을 읽고 있었어요. 소설책 끄트머리에 작가와의 인터뷰가 실렸는데, 주변 사람들을 자기 작품의 소재로 삼지 않으려 한다고 소설가가 언급하셨어요. 저는 그 대목이 인상적이었고 공감했어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제 작품에 자전적인 이야기를 그리거나 쓰지 않으려 한다고 인터뷰에 답변했었죠. 어쩌다 보니 진지하고 단호한 표현으로 담겼는데, 간혹 작가가 이야기를 만들고자 할 때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어쩔 수 없이 담을 때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다만, 주변 사람들을 소재로 담지 않는 최소한의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주변에서 에피소드처럼 들려오는 누군가의 경험담을 작품에 쓰는 일을 피하고, 보편적인 누군가의 일상에 대해 다루고자 할 때도 실제와 다르게 접근해서 표현하려는 편이에요.
「노르웨이 고등어」(2015)를 도전만화에 올리면서 본격 만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셨죠. 첫 만화를 어떻게 그리셨어요?
첫 만화는 시나리오로 썼던 작품이에요. 이걸로 다른 뭔가를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만화로 그려 보면 되겠다 싶었죠. 「노르웨이 고등어」는 웹툰 1~2화 정도의 분량인데, 두세 달 정도 집중해서 작업했던 것 같아요. 도전만화에 올리고 난 다음 독자들의 댓글을 살펴보는 일이 무척 기쁘더라고요. 그 순간부터 만화 그리는 재미에 빠져든 것 같아요. 사진을 찍는 한 청년이 바다로 답사를 떠났다가 생긴 일을 담았는데, 바다 장면을 찍으러 갔다가 그곳 슈퍼에서 자신과 나이가 비슷해 보이는 청년을 만나면서 소소하게 벌어지는 일을 다룬 짧은 만화예요. 지금도 인스타에서 볼 수 있어요.
저희 어머니의 성이 정 씨예요. 그래서 제 필명의 성을 어머니의 성을 따라서 정 씨로 정하고, 동그라미를 생각하면서 ‘원’이라는 이름을 지었어요. 동그라미를 필명으로 쓴 이유는 제가 동그랗게 살고 싶어서예요. (웃음) 이름이 반드시 동그라미만을 뜻하진 않지만요.
단련되듯이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완성에 가깝게 된다는 말로 ‘성장’을 해석해 왔어요. 상처를 입고 성장하는 사람도 있지만 상처를 입고 그대로 무너지는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인지 성장하는 사람들보다 그대로 무너지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마음이 더 쓰여요. 그 친구들에게 네가 미완성이거나 미숙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말을 줄곧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완성으로 나아가는 게 정답이 아니라는 말을 건네고 싶었어요.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게 일렬 혹은 선형적으로 쭉 뻗어 갈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니까요. 저는 ‘독립 만화’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요(독립출판과 같은 뜻은 아니에요). ‘독립을 하는 만화’라는 뜻이에요. 미완성인 상태에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겪고도 그걸 잘 통과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서 ‘독립’한다는 뜻으로 독립 만화라는 말을 쓰고자 해요. 『올해의 미숙』도 그런 마음으로 그렸어요.
미숙은 미숙이고,
남우는 남우라고 말하는 이야기
'미숙아'라고 놀림 받던 미숙의 독립기 『올해의 미숙』을 그리기 위해 여러 자료조사를 하셨을 것 같아요. 여성 화자인 미숙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어떤 사전탐방을 하셨나요?
『올해의 미숙』을 그리고 쓰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미숙이 겪는 감정이 타당한지, 혹시 과장된 것은
아닌지 수시로 물어보곤 했어요. 특히 배우자에게 많이 물어봤어요. 다양한 책들을 통해서도 제가 잘 모를 수 있는 여성의 감수성에 관해 공부했는데, 그중 임솔아 소설가의 『최선의 삶』이 떠오르네요(편집자 주: 열여섯 살 강이가 등장하는 소설로, 학교폭력 피해자이자 가출 청소년이기도 한 인물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미숙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사이였기에 고증을 위해 관련 유튜브 영상도 많이 시청했어요. 유튜브에 ‘옛날 서울’, ‘옛날 타임머신’이라고 검색하면 그 시대 중학생들이 삐삐의 음성 메시지를 확인하려고 공중전화기 앞에 줄을 선 영상을
볼 수 있거든요. 저도 비슷한 경험을 했기에 기억과 영상자료, 책 들을 바탕으로 『올해의 미숙』의
배경을 표현할 수 있었어요. 미숙의 얼굴에 흉터를 남겼던 『무소유』(미숙의 아버지가 미숙을 향해 던진 책이기도 하다.)를 비롯해 『운수 좋은 날』, 『푸르른 틈새』 같은 책들도 고심해서 만화에 그렸어요.
『올해의 미숙』에는 미숙의 언니, 시인 아버지, 가족을 부양하는 어머니와 미숙의 친구 재이가 나와요. 책에서 유일하게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인물이 미숙의 어머니인 듯해요.
미숙의 어머니 이름은 막순인데, 작품에서는 이름이 등장하지 않아요. 막순은 ‘완주’를 꿈꾸는 사람으로, 책 중간중간 그가 부업을 하면서 텔레비전으로 마라톤 중계 장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등장해요. 막순은 ‘완주’를 목표로 하며 무던히 살아가려 하지만 자신의 생활과는 상관없이 벌어지는 지구촌 축제 장면들을 하염없이 맞닥뜨리기도 해요. 그와 함께 미숙의 아버지인 호식은 ‘완성’을 꿈꾸는 사람으로 품은 이상과는 사뭇 다른 행동을 많이 보여요. 가령 자신이 데리고 온 강아지 절미를 끝까지 책임지지 않는 것처럼요. 아버지 호식은 진돗개가 아니라는 이유로 절미를 방치하는데, 인생에서 완성을 추구하는 그의 태도가 가족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생각하면서 호식의 캐릭터를 서사에 녹였어요. 책에도 나오듯이 언니 정숙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쓴 시를 보여 주기도 하고, 아버지의 의견에 공감하는 행동을 보여 주면서 그에게 인정받으려 하고요. 반면, 주인공 미숙은 부모의 시적 재능을 물려받음에도 그걸 사용하지 않는 인물로, “가족의 굴레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절을 거친 후 ‘독립’해요.
재이는 미숙의 가정사를 소설의 재료로 쓴 파렴치한 행동을 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영 밉지 않은 빌런이었어요. 이 인물을 구축하실 때 미숙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길 바라셨나요?
처음 미숙에게 재이는 언니의 ‘대체제’였을 거예요. 언니 정숙이 자신에게 등 돌리고 난 이후, 미숙은 정숙만큼 더 다정한 사람이 생겼다고 생각했을 거고요. 재이가 빌런임에도 미숙은 그에게 몇 가지 배운 것들이 있어요. 특정한 행동에 대해 함부로 사과하지 않고 “유감입니다.”라고 표현하는 배짱이라든가, 남들이 뭐라고 하건 다가가는 용기도 배웠을 테고요. 책 초반에 따돌림을 당하던 미숙에게 의자를 끌고 다가가서 같이 밥을 먹는 재이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 장면에서 미숙은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용기를 배웠을 것 같아요. 대체로 주변 사람들로부터 『올해의 미숙』을 읽은 후기를 들으면 두 가지로 반응하는데요. 재이가 너무 싫거나 싫지 않다고 하시는데, 저도 재이를 미워하지 않아요. (웃음) 미숙이 중학교 시절에 재이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냈고, 재이가 미숙에게 다가간 것이 어떤 흑심을 품고 이용하려고 한 것이었다면 미숙에게도 재이에게도 불행한 일이었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중학생 시절의 재이와 미숙의 사랑만큼은 ‘진짜’였다고 생각해요. 다만, 재이가 훗날 미숙에게 사과할 수 있는 용기만큼은 부족하지 않았나 싶어요. 우리 일상에서도 그런 용기를 쉽게 못 내는 사람들이 많고요.
『뒤늦은 답장』에도 남우의 친구이자 사랑스러운 빌런인 재근이 등장해요. 둘은 영화를 만들면서 공감도 하고 서로의 관계에 균열을 내기도 하는데, 극명하게 드러내고 싶었던 둘의 갈등 장면을 꼽아 본다면요?
재근이 남우에게 이사 가는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게 갈등의 시작이었다고 봐요. 성호와 남우가 재근의 집에서 식사하는 장면에서 재근의 아버지가 둘을 위해 기도를 드리잖아요. “혼자서 씩씩하게 사는 가엾고 불쌍한 성호”, “혼자서 고생하는 남우 엄마를 불쌍하고 어여쁘게 여기시고”라고 말하는데, 이 장면이 둘의 두 번째 갈등 국면이에요. 남우는 재근의 가족에게 초대받아 갔을 때 ‘이렇게 화목한 가족이 있다니.’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 ‘이곳을 비집고 들어갈 틈이 나에게는 없겠구나.’ 싶었을 테고요. 『올해의 미숙』에서 재이와 미숙의 우주가 공고해진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뒤늦은 답장』에서 남우가 식사에 초대받아 밥 먹는 장면에서는 오히려 남우의 우주가 깨지지 않았을까 싶어요. 재근의 집에서 환대받은 듯했지만 심적으로 환대받지 못한 남우가 같이 영화 만드는 친구들에게만큼은 환대받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린 장면이 있는데요. 책 끄트머리, 샤론과 지현 누나와 쪼르르 앉아 영화를 편집하는 장면에서 남우가 커밍아웃을 해요. 저는 그 장면을 오랫동안 떠올리면서 『뒤늦은 답장』을 그렸어요. “세상의 모든 남우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완성했던 것 같아요.
분식점을 꾸리느라 바쁜 엄마, 여전히 엄마를 탓하는 아빠 등 주인공은 주변 어른을 미워하는 철부지 같으면서도 아주 외로워 보이지만은 않아요. 주인공 남우가 가진 '강철 장점'은 무엇일까요?
남우에게는 굉장한 용기가 있어요. 그 용기를 친구인 성호와 재근에게 배웠다고 생각해요. 재근이 PC방에서 아르바이트해서 얻은 월급을 사장에게 동전으로 받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화를 낼 수 있는 용기를 재근에게 배운 것처럼요.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성호가 굴하지 않고 동전을 일일이 셀 수 있는 용기 역시 남우가 눈으로 보고 배웠을 테고요. 남우는 자기를 둘러싼 세계와 사람들을 천천히 돌이켜보면서 자신이 느낀 바를 재근에게 답장으로 보내요. 그런 용기를 지닌 점이 남우가 가진 강철 장점이 아닐까 싶어요. 재근에게 답장을 보낼 수 있는 특유의 단단함이죠.
남우가 아웃팅을 당한 후 엄마와 마주 앉은 식탁에서 "참고할게, 네가 그런 거."라는 말을 들은 장면이 신선했어요. 지금도 남모를 감정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십 대가 많은데, 그런 청소년에게 어른이 써야 할 '우산 같은 언어'가 있다면요?
말을 고르는 것보다 서두르지 않는 태도, 신중한 태도가 더 중요해요. 한 사람의 마음과 행동에 대해 빨리 결론짓고 종결시켜 버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일단 내 마음이 소용돌이치니까 감정의 근원을 마주한 사람을 어떻게든 보채거나 등을 떠밀어 버리듯이 얘기해 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어요. 저는 한 사람에게 깃든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싶은 욕망을 조금은 신중한 태도로 다뤘으면 해요. 『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에는 어린이가 신발끈을 다 묶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어른이 나와요. 그렇게 기다려 주는 사람의 존재가 필요해요. 발 디딜 틈 없이 내몰린 청소년들이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 만큼은 울타리가 되어 줘야 해요. 말을 고르는 일을 하기 전에, 그런 태도를 갖추는 어른들이 필요할 것 같아요. 무언가 좋은 방향으로 이끄는 것도 물론 좋지만, 내가 네 옆에 계속 있을 거라고 안심시켜 주는 어른의 자리가 절실할 테니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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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 시절과 잘 지내고 싶은 사람에게
| 책 끄트머리, 남우가 재근에게 "난 우리 동네처럼 너를 사랑해."라고 편지글을 마치는데, 어설프고 상처 받았을 모두의 시절을 위로하는 듯 했어요. 누구에게 이 책을 선물하고 싶나요? 답장을 미루는 사람들에게 선물하면 좋지 않을까요? 어느 한 시절을 편하게 마치지 못한 사람들, 어떤 시절과 화해하고 싶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독자들의 리뷰 가운데서 남우와 재근이 비슷해서 구별하기 힘들다는 의견도 있던데, 실은 처음에 이야기를 만들 때 남우와 재근은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어요. 우리가 보통 동명이인을 가진 두 사람에게 작 은 ○○, 큰 ○○이라고 부르곤 하잖아요. 그렇게 하면 독자들이 헷갈릴 것 같아서 작은 남우의 ‘작은’을 ‘재근’이라는 이름으로 바꿨어요. (웃음) 둘이 비슷하면서 다른 느낌을 줄 수 있도록요. 책에서 둘이 서로 닮았다는 마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는데요. 영화 <춘광사설>를 좋아한다고 메신저로 서로 공감하는 장면에서 어떤 기쁨을 같이 누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세상의 수많은 재근도 자기 세계에서 잘 지냈으면 좋겠네요.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
청소년소설 『옥수수 뺑소니』 삽화작업을 하셨어요. 어떤 철칙을 갖고 그리셨는지, 청소년이 볼 수 있는 만화에 대한 기준이 제각각인데 작가님의 기준이 궁금해요.
자극적으로 표현하지 말자, 지나치게 연민하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그리는 편이에요. 슬픔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고 가정한다면, 그림을 그릴 때 슬픔을 향해 달려가듯이 표현하지 말자고 마음속으로 당부해요. 각자의 사정으로 슬픈 상황에 빠진 청소년이 제가 그리고 쓴 책을 읽을 수 있잖아요.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마주한 이야기를 잠잠하게 견디며 읽는데, 이야기를 표현하는 작가가
이야기 속 인물보다 먼저 펑펑 울어 버린다면 굉장히 큰 불쾌감을 겪을 수 있어요. 꼭 책이라는 물성이 아니더라도 특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고 울어 버리는 것이 실례가 될 수 있고요. 『올해의 미숙』을 그릴 때 작업 초반에 아버지가 데리고 온 강아지 절미가 죽는 것으로 설정했는데, 편집자와 조율을 통해 죽지 않는 것으로 바꾼 적 있어요. 모든 문학이 가지는 이야기의 태도일 텐데,
저는 만화를 그릴 때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될 수 있는 이야기는 담고 싶지 않아요. 절미를 죽이지 않은 것처럼요. 청소년문학에 어떻게 접근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장르의 기준을 범주화할 수
있겠지만, 청소년문학이 반드시 가져야 하는 백미 같은 건 없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