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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독자 투고] 네 번째 꿈의 역을 향해 : 이덕주 송곡여고 사서교사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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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01-02 15:17 조회 2,36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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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꿈의 역을 향해

: 이덕주 송곡여고 사서교사와의 만남


양현주 거제 국산초 사서교사




꿈을 꾸는 사람은 아름답다. 꿈을 간직하는 사람보다 더 아름다운 사람은 꿈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이다. 1993년 송곡여고에 젊은 사서교사 이덕주가 부임했다. 당시에 그는 세 가지 꿈을 꾸었다. 첫째, 교실 두 칸짜리 공간을 갖는 것. 둘째, 도서관을 컴퓨터와 책 그리고 아늑한 온돌방으로 채우는 것. 셋째, 학생들을 위한 공간을 만드는 것. 올해로 부임 30주년을 맞이한 그는 어느덧 중견의 사서교사가 되었다. 그때 그 앳된 청년의 꿈은 과연 이뤄졌을까. 그리고 그가 또 다시 꿈꾸는 학교도서관은 어떤 모습일까? 




부임 30주년을 맞이하는 선배에게 묻다


사서교사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을 법한 책이 있다. 바로 『사서가 말하는 사서』이다. 나는 고3 때, 사서선생님의 추천으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21세기 학교도서관 운동의 산실이라고 봐도 무방한 우상과의 만남은 신규 사서교사에게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하지만, 그러한 기대와 설렘을 허락하는 순간은 아주 잠깐이었다. 미국 어느 인기 토크 쇼 <더 투나잇 쇼>(The Tonight Show Starring Jimmy Fallon)의 지미 팰런으로 빙의하여 센스 있고 유머러스한 인터뷰를 진행해 보자고 다짐했건만, 분 단위로 쪼개지는 그의 일상 앞에서 나의 패기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긴급히 작전을 수정해 ‘관찰 카메라 24시간’을 촬영하는 VJ가 된 심정으로 의도치 않은 현장 르포를 강행해야만 했다. 

만남 하루 전날, 이덕주 사서교사는 “생각보다 자신의 실상을 빨리 공개하는 것에 대해 매우 유감스럽다.”는 말을 덧붙이며 빼곡하게 짜인 하루 일정표를 전송해 주었다. 그의 치열한 업무 현장에 투입되기 직전까지만 해도, 이 일정이 꽤 할 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비로소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가 그려왔던 30년 차 사서교사 이덕주의 모습은 본디 이랬다. 여유롭게 차도 한 잔 마시며, 도서관에 방문한 학생이나 선생님들과 느긋하게 담소도 나누고, 도서관도 한 바퀴 둘러보며 그 상태를 살피는 경력과 연륜에서 묻어나는 ‘여유 있는 자’를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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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틈 없이 바삐 움직이는 그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몰락한 엄석대를 마주한 주인공 한병태의 마음과도 같았다. 여과 없이 표현하자면 그것은 약간의 씁쓸함, 놀라움, 속상함이기도 했다. 그는 아내가 “왜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 그렇게 살면 안 된다.”라고 종종 꾸짖는다며 농담 반 진담 반 우스갯소리를 꺼냈다. 나 역시 악의 없이 질문하고 싶었다. “왜 그렇게 사느냐?” 강산이 적어도 세 번은 바뀌었을 30년 동안 사서교사 이덕주는 어떠한 이유로 달려왔으며,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



Q. 송곡여고에서 근무한 지 30주년을 맞이했다. 오랜 시간 쉼 없이 달리게 했던 원동력이 궁금하다. 


송곡여고에서 근무를 시작한 것은 1993년 9월 2일이지만, 7월 1일에 정교사로 임명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연이 참 많다. 1989년도에 경신고 사서교사가 되고자 했으나, 신원 조회 과정에서 임용 결격 사유가 발견되어 근무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나는 잡지사에서 1991년부터 그 다음해까지 영업사원 일을 했다. 예상치 않게 일이 적성에 맞았다. 그래서 추후에 자동차 영업이나 제약회사 영업으로 방향을 틀려고 했다. 이 시기에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는 아내의 부모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야 하는데, 변변찮은 직장 없이 가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하는 수 없이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때마침 송곡여고에서 그 기회를 주셨다. 송곡여고에 감사한 것이 많다. 일반적으로 다른 과목의 교사는 3년 남짓의 기간제 교사를 경험하고 난 후에야 정교사가 될 수 있었다. 반면에 나는 운이 좋게도 4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거쳐 발령을 받았다. 

발령 이후 맞이한 첫 여름방학 기간의 자율학습 감독을 했을 때 일이다. 당시 방학 중 1회나 2회를 근무했던 다른 교사들과 달리 나는 한 달 동안 8시간씩 매일 출근했다. 특별수당으로 20만 원을 받았다. 요즘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50만 원은 족히 되기에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선배 교사 한 분께서 의문을 제기했다. “너는 교사가 아니냐. 방학 중에 가장 고생스러운 네가 못해도 80만 원은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 왜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느냐?”라고 걱정 어린 타박을 했다. 관리자분들에게 조심스레 권리 주장을 했다. 불편한 기색은 역력했다. 허나 추후 내 통장에 차액이 입금되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안 사실인데, 이 사안을 가지고 관리자분들과 여러 선생님들께서 지속적인 협의, 자문, 토론을 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결론적으로 사서교사도 교사이기에 형평성에 맞게 수당을 지급해야 한다는 의견이 대세였다는 것이다. 모쪼록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교 당국과 교사공동체에 감사함을 깊이 가졌다. ‘한때의 기억으로 평생을 산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송곡여고가 30년 전 ‘신규교사’이자 ‘사서교사’인 내게 베풀어 준 배려와 이해가 그때 당시에도 큰 동력이었으며, 지금도 여전히 가장 큰 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Q. 사서교사 이덕주의 정체성과 가치관 형성에 큰 도움을 주었던 인물과 책은 무엇인가? 


마포고 재학 시절 만났던 사서선생님이 큰 도움을 주셨다. 정확히 말하자면 은사님은 교사 신분이 아닌 행정직 직원이었다. 그때 당시에 나는 도서부라는 특권 아닌 특권으로 월간지 <뿌리 깊은 나무>, <샘이 깊은 물>, <신동아>, <월간중앙>, <창비 영인본>은 물론이고 『장길산』(황석영)과 같은 현대문학도 두루 접할 수 있었다. 결정적으로 『친일문학론』(임종국)을 만났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시대의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친일행각을 낱낱이 파헤치는 실증적 친일 연구서인데, 그 책을 읽으면서 세상 돌아가는 원리를 알았다. 수업 시간에 『국민윤리』라는, 지금으로 비유하자면 도덕과 유사한 과목으로 교과교사들은 학생들에게 거짓을 주입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나는 『친일문학론』을 통해 가려진 진실을 알았으니, 교과선생님들을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대신에, 이런 책을 학교도서관에 구비해 우리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던 사서선생님은 나에게 정말 멋진 분으로 보였다. 관계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일례로, 은사님의 딸이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당시에 참여한 하객들이 전부 제자들이었다. 그때 나도 제자들과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면 행복하겠다고 생각했다.  



Q. 허심탄회하게 묻고 싶다. '사서교사'가 된 것을 한순간도 후회한 적이 없는가? 있다면 어떠한 순간이었는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었던 까닭이 궁금하다. 


후회한 적 없다. 다시 태어나도 사서교사를 선택할 것 같다. 일단 업무적인 측면에서, 나는 MBTI1) 끝자리가 ‘P(인식형)’이다. 반복하는 것을 싫어한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자율적이고 융통성 있게 행동하는 것을 선호한다. 학교도서관을 운영하며 작년과 같은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면 조금씩 변화를 준다. 나는 창의적으로 살 수 있는 사서교사로서의 삶이 좋다. 학생들과 허물없이 교감할 수 있다. 도서관에 많은 학생들을 유인하기 위해 도서부 ‘서랑’과 많은 일을 했다. 회의를 하거나 축제 준비를 하다 보면 늦은 밤이 되기 일쑤였는데, 그때마다 간식을 사 주는 것이 힘이 들었다. 그래서 도서관에 전기밥솥을 가져다 놓았다. 그 뒤로 밥이나 라면 등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음식들을 함께 종종 해 먹었다. 오찬 효과2)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누군가와 밥을 함께 먹는다는 것 자체로 유대감과 친밀감을 형성하는데, 하다못해 무언가 요리해 먹는다는 행위는 얼마나 큰 일체감을 가져오겠는가? 사서교사는 업무적·관계적인 측면에서 다른 직업과 차별화되는 무언가가 있다. 이 직업의 특이함과 특별함이 나에게는 상당한 재미로 다가오기에 나의 직업이 만족스럽다. 


1) Myers-Briggs Type Indicator의 약자로 사람의 성격을 16가지로 분류해서 나타내는 검사이다.

2)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은 사람에게 긍정적인 감정과 호감이 생기는 것을 뜻하는 심리학 용어이다.



Q. 사서교사 부임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면 무엇인가? 그 장면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2000년 즈음, 한 학생과 나누었던 대화 속 한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조심스레 가정 상황이 어떤지에 대해 묻자 그 학생은 “세상을 곱게 살아온 선생님께서는 저를 이해하기 힘드실 거예요.”라는 답변을 들려주었다. 20년이 흐른 지금이지만, 그 학생의 말이 종종 귓가에 맴돌곤 한다. 비록 그 학생의 말마따나 세상을 곱게 살아온 ‘나’이지만 ‘사서교사’로서 책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학생들에게 다양한 삶의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즉, 이해의 영역에는 손을 뻗지 못하지만, 도움의 영역에는 손을 뻗을 수 있다. 그래서 학생들이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에는 세대 공감 수업에서 『열세 살 여공의 삶』을 쓰신 신순애 노동운동가의 ‘사람책3)’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3) 덴마크 사회운동가 로니 에버겔이 2000년대 시작한 운동으로, 사람이 책이 되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삶의 경험을 대출 신청자에게 들려주는 활동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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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청년 시절에 되고자 했던 사서교사의 모습과 현재의 내가 되고자 하는 사서교사는 어떤 모습인가?


신규 교사인 과거에도, 중견 교사인 지금도 내가 한결같이 강조하는 사서교사의 바람직한 모습은 ‘교수 협력자’이다. 발령 첫해에 나는 학교도서관 이용자교육을 했다. 당시 한 학년은 15개의 학급으로 이루어졌는데, 3개 학년을 합하면 총 45개의 학급이다. 즉, 같은 내용을 45번 반복해서 말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니, 특히나 반복적인 것을 싫어하는 나로서는 일반 교과교사들의 고충을 더욱 선명하게 느꼈다. 1년 내내 3번 내지 많게는 10번 이상까지 같은 내용을 계속해서 설명하는 것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란 말인가? 나는 그때의 경험을 계기로 ‘어떻게 하면 교과교사의 어려움을 덜 수 있을까?’, ‘권태로운 수업 속에서 재미의 요소를 더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에 대해서 매 순간 고민했다. 비단, 교사 뿐만이 아니라 학생을 위해서도 이 고민은 유효하다. 협력수업은 강의식 수업이 아닌 활동 중심 수업에 기초한다. 학생이 중심이 되기에 학업 성취적인 측면과 자아존중감 함양에 있어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무엇보다 협력을 잘하는 교사가 되고 싶고, 지금도 되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Q. 학교도서관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해 왔다. 가장 보람 있었던 성과는 무엇인가?


2020년 학교 공간 재구조화 사업을 통해 3층에 북카페 공간을 조성했다. 본디 이 공간은 교실 다섯 칸 크기로 이뤄진 자율학습실이었다. 이제는 학생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누가 몇 시까지 어떻게 공부해서 명문대에 진학했다더라 하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내려오는 활용도 제로(zero)의 공간이었다. 이 공간을 완성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첫째는 이 공간이 자율학습실의 공간으로 계속해서 유지되었으면 하는 학년부장들을 차례대로 설득하는 과정이었다. 둘째는 학생들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해서 작성한 도서관 리모델링 계획서를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예산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일련의 과정에서 많은 갈등과 조정이 있었지만, 끊임없는 양보와 합의를 통해 모두가 꿈꾸는 공간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발길이 멎었던 공간이 학생들로 붐비는 공간으로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쉼터와 놀이터와 배움터라는 교집합의 벤 다이어그램으로 활용되는 도서관을 마주하자 보람되고 가슴이 벅차올랐다. 



소망의 역에 닿아 함께 나아가길


일정을 마치고 각자 집으로 귀가하기 위해 그와 함께 학교 근처에 위치한 양원역으로 향했다. 시린 겨울 바람이 얼굴에 찰박이던 그 와중에도 열변을 토해 내는 그의 불그스름한 얼굴이 선명하다. 그 순간에는 사서교사의 인력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장난스레 “이제 다음 꿈은 무엇이냐?”라고 넌지시 묻자 이덕주 사서교사는 “사서교사가 두 명 이상 근무하는 도서관을 꿈꾼다.”라는 대답을 주었다. 제 얼굴에 침 뱉기와 다를 바 없으나, 나는 그에게 “매우 비현실적인 꿈이다.”라고 일러 주고 싶었다. 

그가 먼저 내린 지하철 안에서 빈 나의 옆자리는 ‘덜컹’이는 소리로 슬그머니 자리를 채웠다. ‘덜컹’이고 또다시 ‘덜컹덜컹’인다. 고요히 생각해 보면 지하철의 삶이 그렇다. 목적지로 가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의 풍화를 느껴야 하며, 불쾌한 덜컹거림을 온몸으로 감당해야 하는가. 하물며 물체의 삶도 그러한데 살아 있는 사람의 삶은 어떠하겠는가. 

이덕주 사서교사의 마지막 말을 곰곰이 되뇌어 본다. 30년 전 출발역에 서 있었던 그 자신도 예상했었을까? 30년 후 그토록 바라던 세 개의 꿈의 역을 도달한 현재의 모습을 말이다. 나는 조금 주제넘게 예감해 본다. 이덕주 사서교사라면 그가 소망하는 꿈의 역으로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다시금 매 구간마다 미처 헤아리지 못할 소음과 진동을 감내해야만 하리라. 그런 그를 위해서 ‘불가능’이라는 단어를 발설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말없이 덜컹거리는 지하철에 슬그미 동승하고자 한다.

 그가 먼저 내린 지하철 안에서 나의 빈 옆자리는 여전히 ‘덜컹’이고 반복해서 ‘덜컹덜컹’인다. 어둠 속을 헤집으며 무수히 달린들 도착 예정 시간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소리는 언젠가 멎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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