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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방 그렇게 쫓기다 보니까 아이들이 도서관에 관심 가질 겨를이 없지 ④ 입시경쟁교육의 고착화와 학교도서관의 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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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6 22:33 조회 7,921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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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을 떠나는 학교도서관운동의 리더들
1960년대 중후반에는 초기 학교도서관 운동가들 대부분이 학교도서관 현장을 떠나게 된다. 학교
의 관리자나 교육전문직으로 승진하여 도서관을 떠나기도 하고, 아예 학교를 떠나 학계나 다른 분
야로 옮겨가기도 한다. 박태신, 조재후 등은 교육전문직과 학교경영자로 신분이 바뀌게 되고, 김두
홍과 김경일은 다른 기관으로 옮겨간다. 김세익과 이규범 등은 대학으로 진출하기도 한다. 1950년
대에 학교도서관 운동을 시작하여 그 전성기를 주도했던 리더들이 대부분 학교도서관 현장을 떠
나게 된 것이다. 이들이 도서관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지만 학교도서관 운동을 일선에서 이끌
어가는 위치에서는 벗어난 것이다.

도서관법의 공포에 따라 1960년대에 새롭게 사서교사 자격증을 취득한 교사들이 많이 증가했
다. 하지만 그들이 1세대 사서교사들의 빈자리를 메우기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요컨대 초기의
운동 지도자들이 이탈하고 신진 인력이 확충되었지만 운동의 역량이 충실하게 전수되지는 못한
것이다. 학교도서관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저변은 넓어졌지만 새로운 운동 에너지를 효과적으로
확보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요인만 가지고 1970년대 이후 우리 학교도서관 운동 쇠퇴의 배경을 모두 설명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학교도서관 외부에서 더 근원적인 요인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교육계 전반
에 몰아친 거대하고 전면적인 변화가 학교도서관 침체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학생수의 급증과 입시경쟁교육의 심화
베이비붐 세대의 취학과 교육에 대한 요구의 확대에 따라 1960년대부터 학생 수가 급격하게 증가
한다. 1960년에 359만 명이던 초등학생 수가 1970년에는 574만 명으로 증가했다. 1960년대 10년
동안 초등학생 수가 무려 200만 명 이상이나 증가한 것이다.

초등학생 수가 증가함에 따라 중학교 입시경쟁이 격화됐다. 중학교 시험에 대비하여 초등학생들
이 밤 늦게까지 과외를 받으러 다니는 등 사교육에 대한 의존 관행이 커지고, ‘국6병’이라는 신조어
가 생기게 될 정도로 중학교 입학시험이 사회적 문제가 됐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1969년에 중학
교 무시험제가 단행된다.

그러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중학교 무시험제가 단행되면서 중학생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이
다. 1965년에 75만 명이던 중학생 수가 1975년에는 202만 명이 됐다. 당연히 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서 경쟁이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명문 고등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중학생들의 입시경쟁은 날
로 심화되어 갔다. 이에 대응하여 정부에서는 1974년 서울과 부산을 시작으로 고교평준화 정책을
펴게 된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는 문이 넓어지면서 자연스럽게 고등학생 수가 늘어나게 되고 대학 진학 경쟁
이 심화됐다. 결과적으로 대학입시를 정점으로 하는 입시교육체제가 형성된 것이다. 학생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른 입시경쟁 문제를 완화하기 위해 중학교 무시험제, 고교평준화 등을 단행했지
만 심화되는 입시경쟁 분위기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뿐만 아니라 경제성장 과정에서 분출되는 교
육 요구와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대학입시를 지상의 과제로 설정하는 입시경쟁교육 체제가 고착
되기에 이른 것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교육은 전면적 입시경쟁교육으로 변질됐다.



학교 교육은 교실 중심, 교사 중심, 교과서 중심이라는 폐쇄적인 구조로만 이루어지게 됐다. 교
육의 성과가 오로지 대학입시 성적으로 평가되는 체제가 고착되면서 교실과 교과서와 교사의 가
르침 이외의 교육 요소는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다양한 자료를 활용하는 교육, 학생들의 능동적이
상 필요하지 않게 됐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학교도서관은 서서히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제도적 보호를 충분히 받
지 못하고 기본적인 조건이 불비한 상황에 있던 학교도서관은 그 철학과 가치 지향에서 양립할 수
없는 주입식 입시경쟁교육에 의해 밀려나게 된 것이다. 1960년대 초부터 숙명여중·고등학교 도서
관에 근무했던 사서교사 박희 선생의 증언은 이런 변화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문제는 1969년도 중학교 무시험, 1974년도 고등학교 평준화 때부터였습니다. 열람 및 대출이 급
격히 떨어졌어요. 3년 내에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더라구요. 그 이후로는 도저히 손을 쓸 수 없는
사태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과외열풍이 불기 시작해 감히 독서란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도서관문화 편집실, 「교육환경개선과 학교도서관-학교도서관이 교육환경개선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특집 좌담회>」, 《도서관문화》 39권 4호, 1998. 7·8, 311쪽)

충남 지역에서 학교도서관 운동에 매진했던 권양원 선생도 입시경쟁교육의 고착화에 따라 학교
도서관이 침체되고 소외됐음을 증언하며 우리 교육의 병폐에 대해 한탄했다.

그때 입시제도가 성적 우수자만을 인정하는 제도거든. 누가 어디 수석을 했네, 서울대학에 몇
명 들어갔네, 하는 식이죠. 그것이 승하면 승할수록 도서관 같이 입시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인성교육에 필요한 기관에는 관심이 줄어들고 소외되는 거지. 대학입시가 너무 극성을 부려 가
지고 그렇게 된 거죠. 아이들을 밤 열한 시 반, 열두 시까지 붙들어 놓고 보충수업을 하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게 교육인가요? 한심하죠. 그렇게 쫓기다 보니까 아이들이 도서관에 관심 가질
겨를이 없지. 그러니까 그러한 입시제도의 한국적인 병폐 때문에 도서관이 쇠퇴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고 볼 수 있을 거예요. (권양원 선생과의 대담, 1999. 1. 21. 13:00-15:00, 권양원 선생 자택, 대전
시 효동)

학교도서관의 독서실화와 사서교사직의 소외
학교도서관은 더 이상 교수 학습을 위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다양한 자료를 접하고
읽을 수 있는 독서활동 장으로서의 역할도 하지 못하게 된다. 그 대신 독서실, 책 창고로 전락하거
나 아예 문이 잠겨 있는 으스스한 공간으로 자리 잡게 된다.

학교도서관이 독서실 기능으로 왜곡되면서 자료는 가급적 최소한의 공간만을 점유하게 된다. 대
부분의 경우 자료는 조그만 서고에 조밀하게 쌓여 자물쇠로 꼭꼭 잠겨 관리되는 상황으로 변한다.
도서관이 책 창고로 변한 것이다. 자료에 대한 개념이 서비스의 원천에서 관리의 대상으로 전락하
고 만 것이다. 당시 학교도서관을 지키던 한 사서교사는 이렇게 증언한다.

입시경쟁 과열로부터 오는 도서관의 입시준비 독서실화로 인해 도서관 서고는 거미줄이 날고 또
한 묵직한 자물통으로 그 문은 잠겨져 있으며, 새로운 자료의 수집·정리·보존은 전혀 무관인 양
학교의 지원 미비로 학교도서관은 계속 죽어가고 있다. 어느 학교에서는 ‘가을은 독서주간이니
학생들에게 더욱 입시준비나 기말고사 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하라’는 학교장의 직원회의석에서
의 지시에 식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학교에서는 도서관이 존재하지 않은 지가 오래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다만 말 그대로 공부방만이 존재할 뿐이다. (김동철, 「미래의 학교도서관」, 《도서관
문화》 29권 6호, 1988. 11·12, 35쪽)

학교도서관이 그 기능을 상실하면서 도서관을 담당하는 사서교사도 소외된다. 점점 교사들은
도서관을 맡으려고 하지 않게 된다. 학교도서관이 교사들에게는 기피의 대상이 되고, 학교 경영자
에게는 애물단지가 된 것이다. 한마디로 공은 없고 책임은 많은 곳이며 자칫 잘못하면 욕만 먹을
수도 있는 것이 학교도서관 담당인 것이다. 새로운 교육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졌던 학교도서관이
교사들의 기피 업무가 됐고 골칫거리가 된 것이다. 박태신은 이러한 변화를 생생하게 전한다.
그래서 도서관은 누가 하냐 하면, 연구부 안에 도서관계라고 해서 갓 들어온 여선생들을 담당시
키는 겁니다.

도서관 몰라서 못하겠다 하면 “교과서만 주문해서 배부하면 되고 도서관에 가서
청소나 하면 되는 거요” 하면서, 학생도서위원 몇 명 뽑아줘서 적당히 떠넘기는 겁니다. 그러니
학생들이 책이나 보려고 가면 ‘오늘은 휴관합니다’라고 써 붙이고 문 잠궈 두는 겁니다. 그리고
뜻있는 선생들이 도서관 좀 활성화합시다 하면 “너 잘해 봐라” 하고 비아냥거리고 그러지요. 교
사들 인사기록카드에 보면 사서교사 강습 받은 것이나 자격증 사항이 나오거든요. 그래서 도서
관 담당해라 하면 절대로 안 하려고 해요. 차라리 청소 담당을 하면 했지 도서관 담당은 안 하려
고 해요. 그러니 안 되는 거지요. 해봐야 대우는 안 해주면서 책임은 많거든요. 감사 나오면 도서
원부 가져 오라 해서 이 책 찾아오라 그래요. 그리고는 책이 없으면 당신 책임져라 그래요. 또 화
재 날까 겁나지, 골치 아픈 거죠. 그러니까 안 합니다. (김종성, 「학교도서관이 살아야 교육이 선다:
대담, 학교도서관 운동가를 찾아서-②박태신 선생」, 《도서관문화》 39권 5호, 1998. 9·10, 29-30쪽)

1950년대에 도입되어 교육의 희망으로 인식되던 학교도서관은 1960년대에 크게 부흥했다. 그
러나 1970년대를 지나면서 우리 교육의 전면적인 변질과 왜곡 과정에서 소외되고 침체됐다. 물론
이 침체기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학교도서관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입시경쟁교육의 광풍은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거세어서 의미 있는 움직임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학교도서관 운동은 수면
속에 깊이 침잠하여 숨죽인 채 암흑기를 지나게 된 것이다.
며 자발적인 참여를 고무하는 수업, 유연하고 다양한 형태의 수업을 지향하는 학교도서관은 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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