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학교 안’에서의 로드스쿨링, 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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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4 16:01 조회 6,944회 댓글 0건본문
언제부터 책이 쓸모 있다고 생각했을까 하고 내게 물었다. 그러자 머릿속 스크린은 고등학교 도서관 내부의 모습을 보여 줬고, 스피커는 복도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고등학생들의 목소리와 발소리를 내기에 바빴다.
보라의 세계
고등학교 1학년, 무성했던 나뭇잎이 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점심시간, 식당으로 향하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복도는 늘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로 발 디딜 곳 없이 바빠 보이는 공간이었다. 전교생이 1,900여 명에다 교사까지 합하면 2,000명 남짓한 학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그 복도 끝, 한구석에 위치한 도서관은 늘한적했다. 입시 공부를 하려고 학교 꼭대기 층 열람실에 올라가면 그 넓은 공간조차 자리가 부족해 가방들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아야만 했는데, 열람실보다 더 작아 보이는 도서관에 들어서면 내 발소리가 나지막이 들릴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조금이나마 따스해 보였던 그 공간을 나는 좋아했다.
그날도 나는 밥을 먹으려고 친구들과 줄을 섰다. 아차, 조금 늦었는지 줄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나 도서관에 좀 다녀올게.”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점심시간 초입이라 사람은 얼마 없었다. 무슨 책을 읽을까? 어느 서가로 가지? 고민하던 나는 그때 자주 들락날락거렸지만 쉽게 책을 고르지 못했던 ‘철학’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서가에 꽂힌 책을 한참 들여다보다 엉덩이를 쭈그려 앉아 집어든 책은 『소피의 세계』였다.
진짜 공부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 하던 때였다. 0교시부터 9교시 혹은 10교시까지 계속되던 나날들. 거기에 반 강제 성격을 띤 야자까지. 그 속에서 종종 병든 닭처럼 졸기도 하고, 체육시간에만 반짝 깨어나 ‘체육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고, 학교 공부보다는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온 신경을 쏟거나 학생회 활동을 더 열심히 하던 그때. 창을 찌를 듯 뻗어 있는 나뭇가지의 잎을 보기보다는 칠판과 선생님의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봐야만 했던 그때.
야자시간에 몰래 들여다보기 시작한 『소피의 세계』는 난해했다. 소피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재밌어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한 번쯤은 들어본 철학자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때부터 그 철학자들과 소피는 알 수없는 난해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보고 머리를 쥐어짜며 “이건 어려운 내용이야!” 이상의 표현을 찾지 못한 나는 “이건 말장난에 불과해”라고 소피 옆에 끼어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교과서보다는) 재밌고 선명했다. 플라톤 어쩌고, 아리스토텔레스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좀 더 또렷하게 보였달까? 플라톤 할아버지는 엄청 깐깐하게 생겼을 것 같고 아리스토텔레스 아저씨는 이름에서 오는 부드러움이 살아 있을 것 같아,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후 나는 철학에 입문했다며 친구들에게 책에서 얻은 지식적인 즐거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철학이 뭔지 알아?” 하며 과시욕도 섞어서.
사실 그 이후로 철학책을 더 심도 있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여행서적을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학교를 그만두고(혹은 휴학하고) 더 큰 세상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뒤에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그걸 실행에 옮기면서 여행 사전 준비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매일 같이 여행 경비를 후원해 줄사람들과 여행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고, 주중에는 학교도서관에 들락날락거리며 얼마 되지도 않는 여행서적을 독파하겠다고 쉬는 시간에도 재빨리 달려가곤 했다. 책을 펴면, 형형색색 주인공들이 등장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인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참 잘해. 그런데 말이지, 나는 거기서 사람을 만났어.”
“네팔의 산은 사람을 안아주는 힘이 있단다.”
“여행은 나를 만나러 가는 거야. 한국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나를.”
도서관 역시 또 하나의 로드스쿨링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의자에 꼿꼿이 앉아 길고 긴 수업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 교실. 그곳에서 칠판과 선생님의 눈이 아닌, 창밖의 나뭇가지에 시선을 돌리게 한 건 바로 책과 도서관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나를 (정신적으로) 먹여 살린 한비야가 없었더라면, 학교를 그만두고 8개월간 동남아를 여행할 때 나를 지지했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나 자신을 ‘로드스쿨러’라 명명하고 학교 밖에서 외롭지만 자유로운 배움을 해 나갈 때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갖게 해줬던 인문.사회 서적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행하면서 꿈꿨던 다큐멘터리 공부는커녕 아직도 도서관언저리, 아니 한참 동떨어진 곳에서 ‘창’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았을까.
경계를 넘나들며 로드스쿨링(roadschooling)을 하는 내게 누군가 “도서관이 바로 로드스쿨링이 아닐까?” 하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에이 무슨, 나는 쉽게 동조할 수 없었다. 도서관, 그것도 갑갑한 학교 안에서 도대체 뭘 하자는 건데? 책만 가득할 뿐이잖아, 하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따스했던 도서관을 떠올려보니 그곳은 입시 위주의 빡빡한 체제 속에서 안식처이자 비로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임과 동시에 창 밖 나뭇가지로 세상과 학교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다큐멘터리 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배움을 계속하고 있는 지금, 나는 ‘어떤 책’들이 나를 ‘어떤 세상’으로 이끌어 갈지 기대하며 숨을 고르고 있다. 입시 경쟁에 불타는 입시 위주의 대한민국에서 책이 지독히 외로운 시절의 친구이며 스승, 또 하나의 학교가 될 수 있음을 솔직하게 큰 목소리로 재미나게 외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나뿐일까.
이 보 라 더 큰 세상을 보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서 인도 등 아시아 8개국을 여행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그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엮어 『길은 학교다』(한겨레출판)로 펴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길 위에서의 배움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학교 밖 친구들과 함께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을 공부하며 스스로 로드스쿨러라 명명하게 되었다.
보라의 세계
고등학교 1학년, 무성했던 나뭇잎이 지기 시작하는 때였다. 점심시간, 식당으로 향하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복도는 늘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로 발 디딜 곳 없이 바빠 보이는 공간이었다. 전교생이 1,900여 명에다 교사까지 합하면 2,000명 남짓한 학교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런데 그 복도 끝, 한구석에 위치한 도서관은 늘한적했다. 입시 공부를 하려고 학교 꼭대기 층 열람실에 올라가면 그 넓은 공간조차 자리가 부족해 가방들사이를 비집고 자리를 잡아야만 했는데, 열람실보다 더 작아 보이는 도서관에 들어서면 내 발소리가 나지막이 들릴 정도였다. 그래서인지 조금이나마 따스해 보였던 그 공간을 나는 좋아했다.
그날도 나는 밥을 먹으려고 친구들과 줄을 섰다. 아차, 조금 늦었는지 줄은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고 그 지루함을 견디지 못할 것 같아 “나 도서관에 좀 다녀올게.”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점심시간 초입이라 사람은 얼마 없었다. 무슨 책을 읽을까? 어느 서가로 가지? 고민하던 나는 그때 자주 들락날락거렸지만 쉽게 책을 고르지 못했던 ‘철학’ 서가로 걸음을 옮겼다. 서가에 꽂힌 책을 한참 들여다보다 엉덩이를 쭈그려 앉아 집어든 책은 『소피의 세계』였다.
진짜 공부
‘진짜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 하던 때였다. 0교시부터 9교시 혹은 10교시까지 계속되던 나날들. 거기에 반 강제 성격을 띤 야자까지. 그 속에서 종종 병든 닭처럼 졸기도 하고, 체육시간에만 반짝 깨어나 ‘체육인’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고, 학교 공부보다는 좋아하는 남자애에게 온 신경을 쏟거나 학생회 활동을 더 열심히 하던 그때. 창을 찌를 듯 뻗어 있는 나뭇가지의 잎을 보기보다는 칠판과 선생님의 얼굴을 무시무시하게 노려봐야만 했던 그때.
야자시간에 몰래 들여다보기 시작한 『소피의 세계』는 난해했다. 소피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자체가 재밌어 책장을 넘기다 보면 한 번쯤은 들어본 철학자들의 이름이 나왔다. 그때부터 그 철학자들과 소피는 알 수없는 난해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고, 그 광경을 보고 머리를 쥐어짜며 “이건 어려운 내용이야!” 이상의 표현을 찾지 못한 나는 “이건 말장난에 불과해”라고 소피 옆에 끼어들어 ‘말’하기 시작했다. 무언가 100%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닌데, 이상하게 (교과서보다는) 재밌고 선명했다. 플라톤 어쩌고, 아리스토텔레스 어쩌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가 교과서에서 만났을 때보다는 좀 더 또렷하게 보였달까? 플라톤 할아버지는 엄청 깐깐하게 생겼을 것 같고 아리스토텔레스 아저씨는 이름에서 오는 부드러움이 살아 있을 것 같아, 뭐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후 나는 철학에 입문했다며 친구들에게 책에서 얻은 지식적인 즐거움을 ‘자랑’하기 시작했다. “너희가 철학이 뭔지 알아?” 하며 과시욕도 섞어서.
사실 그 이후로 철학책을 더 심도 있게 들여다보기 보다는 여행서적을 들여다보느라 바빴다. 학교를 그만두고(혹은 휴학하고) 더 큰 세상을,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온 뒤에 공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있었고 그걸 실행에 옮기면서 여행 사전 준비를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매일 같이 여행 경비를 후원해 줄사람들과 여행을 도와줄 사람들을 만나러 다녔고, 주중에는 학교도서관에 들락날락거리며 얼마 되지도 않는 여행서적을 독파하겠다고 쉬는 시간에도 재빨리 달려가곤 했다. 책을 펴면, 형형색색 주인공들이 등장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인도 사람들은 거짓말을 참 잘해. 그런데 말이지, 나는 거기서 사람을 만났어.”
“네팔의 산은 사람을 안아주는 힘이 있단다.”
“여행은 나를 만나러 가는 거야. 한국에서는 만나지 못했던 나를.”
도서관 역시 또 하나의 로드스쿨링
교복을 정갈하게 입고 의자에 꼿꼿이 앉아 길고 긴 수업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그 교실. 그곳에서 칠판과 선생님의 눈이 아닌, 창밖의 나뭇가지에 시선을 돌리게 한 건 바로 책과 도서관이었다.
중학생 때부터 나를 (정신적으로) 먹여 살린 한비야가 없었더라면, 학교를 그만두고 8개월간 동남아를 여행할 때 나를 지지했던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와 나 자신을 ‘로드스쿨러’라 명명하고 학교 밖에서 외롭지만 자유로운 배움을 해 나갈 때 세상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시각을 갖게 해줬던 인문.사회 서적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여행하면서 꿈꿨던 다큐멘터리 공부는커녕 아직도 도서관언저리, 아니 한참 동떨어진 곳에서 ‘창’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았을까.
경계를 넘나들며 로드스쿨링(roadschooling)을 하는 내게 누군가 “도서관이 바로 로드스쿨링이 아닐까?” 하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 에이 무슨, 나는 쉽게 동조할 수 없었다. 도서관, 그것도 갑갑한 학교 안에서 도대체 뭘 하자는 건데? 책만 가득할 뿐이잖아, 하며 결국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의 따스했던 도서관을 떠올려보니 그곳은 입시 위주의 빡빡한 체제 속에서 안식처이자 비로소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창’임과 동시에 창 밖 나뭇가지로 세상과 학교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다큐멘터리 공부를 하겠다고 다시 학교로 돌아와 배움을 계속하고 있는 지금, 나는 ‘어떤 책’들이 나를 ‘어떤 세상’으로 이끌어 갈지 기대하며 숨을 고르고 있다. 입시 경쟁에 불타는 입시 위주의 대한민국에서 책이 지독히 외로운 시절의 친구이며 스승, 또 하나의 학교가 될 수 있음을 솔직하게 큰 목소리로 재미나게 외쳐줄 누군가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건 나뿐일까.
이 보 라 더 큰 세상을 보겠다며 학교를 그만두고 혼자서 인도 등 아시아 8개국을 여행하며 봉사활동을 했다. 그 여행의 기록을 책으로 엮어 『길은 학교다』(한겨레출판)로 펴냈다. 한국에 돌아온 뒤에도 길 위에서의 배움을 계속하기로 결심하고, 학교 밖 친구들과 함께 글쓰기, 여행, 영상 제작을 공부하며 스스로 로드스쿨러라 명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