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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이데아 [사서교사의 문해력 코칭 수업] 선생님, 저 한 글자도 못 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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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3-05-02 11:26 조회 1,367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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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한 글자도 못 쓰겠어요


허민영 전주 우림중 사서교사




계절의 변화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앙상하게 뻗은 나뭇가지에 연두색 점이 몽글몽글 찍히더니 어느새 초록색 이파리로 무성합니다. 몇 달 사이에 무슨 마법이 있었던 걸까요. 전 매일 출근길에 미묘하게 달라지는 풍경을 카메라로 담습니다. 그러다 문득 우람한 나무가 씨앗이었던 시절을 상상해 보았습니다. ‘오백 미터가 넘는 거대한 참나무도 처음에는 작은 도토리였다.’ 세계문학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셰익스피어 역시 저와 같은 생각을 했더군요. 제가 느낀 감정을 참나무와 도토리로 표현하다니 언어의 마술사 셰익스피어답습니다. 훌륭한 작품으로 아직도 우리 곁에 숨 쉬는 셰익스피어도 문자를 배우고 문장을 처음 쓰던 시절이 있었겠죠. 

<학교도서관저널> 4월호에서는 수업 흥미가 없는 학생에게 수업 흥미를 끌어올릴 방법을 알려드렸습니다. 5월호에서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지 몰라 한 글자 적기도 어려워하는 제이 이야기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서툴지만 제이가 자기의 이야기를 쓰기까지의 과정에 주목해 주세요. 제이가 훗날 언어의 마술사가 된다면 이 글을 꼭 보여 주고 싶습니다. 




빈칸으로 가득한 활동지를 내미는 제이


저는 중학교 1학년을 대상으로 자유학기 시간에 문해력 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수업 시간이 되면 도서관에는 문해력 수업을 신청한 학생 30명으로 가득하지만, 저를 보는 학생들의 눈빛은 천차만별입니다. 이 눈빛은 수업에 몰입하거나 그렇지 않은 상태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제이는 뭔가 달랐습니다. 눈은 말을 하는 저를 보고 있지만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저 역시 낯선 눈빛을 보내는 제이에게 자꾸만 시선이 향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배운 단어를 활동지 빈칸에 적는 활동 중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렸습니다. 마저 빈칸을 채우고 자유롭게 쉬라고 말한 후 잠시 자리에 앉았는데요.

제이가 활동지를 들고 성큼성큼 제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배웠던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제이를 옆에 앉히고 함께 빈칸을 채웠습니다. 제이가 내민 활동지를 보니 써넣어야 할 문항 12개 중 10개가 빈칸이었지만, 쉬는 시간에 선생님에게 모르는 것을 물어볼 만큼 의욕적인 학생이라고 생각하며 미소 지었습니다. 

배운 단어를 활용해 멋진 문장을 만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글쓰기에 매진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손을 책상 아래에 내리고 우두커니 앉아 있는 제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어떤 글을 쓸지 고민하고 있냐는 질문에 제이는 못 쓰겠다는 답을 했습니다. 저는 제이 옆에 앉아 글쓰기를 도울 수 있는 다양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오늘 선생님이랑 공부한 단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단어 2개를 골라 볼까?” 

“열불과 수치요.” 

“선생님은 열불이란 단어를 아주 많이 화가 났을 때 사용해. 제이가 최근에 화났을 때를 떠올려보자.” 

“학교에서 친구들이 놀릴 때 화가 났어요.” 

“어떤 상황이었는지 선생님에게 자세히 말해 줄 수 있어?” 



학교에서 화났던 여러 일을 말하는 제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수치라는 감정을 포착해 더 깊이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열불과 수치에 집중한 대화를 통해 제이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내가 넘어졌는데 친구들이 웃다니. 수치스러웠다가 열불이 났다.”

어렵게 하나의 문장을 쓴 제이가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글을 썼을까요? 아니요. 극적인 변화는 없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입니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달라진다면 삶이 얼마나 시시할까요. 한동안 제이는 수업 시간에는 글을 쓰지 못하고 쉬는 시간에 활동지를 저에게 가져왔습니다. 이 말과 함께요. “선생님, 못 쓰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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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을 쓰지 못하는지 관찰해라


생명과학자 김성호는 『관찰한다는 것』에서 관찰의 힘을 이야기합니다. 이 책의 첫 문장처럼 “우리의 일상은 보는 것의 연속”입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볼 순 없습니다. 운동화를 사고 싶다는 마음이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신고 있는 운동화를 보게 하는 것처럼 말이죠. 관찰은 의식의 영역입니다. 읽는 뇌를 만들기 위해 읽는 노력이 필요한 것처럼 관찰하기 위해서는 관찰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관찰했을 때 새로운 세상, 그러니까 사람과 만날 수 있습니다. 

왜 쓰기가 어려운지 학생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며 쓰는 방법을 묻는 학생부터 수업 시간 활동이 너무 어렵다며 토로하는 학생까지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답을 듣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우물쭈물 말을 삼키는 경우 더욱더 관찰이 필요합니다. 관찰로 모든 것을 알 수 없지만,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않겠습니까. 몇 년간 문해력 수업을 하며 여러 학생을 관찰해 보니 학생들이 글을 쓰지 못하는 몇 가지 원인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첫째, 나의 글에 자신감이 부족해요 

수영장에 처음 간 날이었습니다. 살에 붙은 수영복이 민망하여 고개가 푹 숙여지더군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두리번거리니 물개처럼 헤엄치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 사이에 있으니 괜히 왔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강사님은 물 위에 누워도 뜰 수 있다며 시범을 보여 줬고 저는 “강사님이니까 가능하죠.”라며 마음속으로 투덜거렸습니다. 잘하는 사람들과 비교하는 제가 수영을 잘 배울 수 있었을까요? 예상한 대로 온몸에 불필요한 힘이 들어가 자꾸만 몸이 물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이때 저에게 용기를 준 건 저와 수영 수준이 비슷한 다른 회원의 성공이었습니다. 

친구가 쓴 멋진 글만 보다 보면 나의 글은 감추고 싶은 것이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저는 수업 시간에 학생의 좋은 결과물만을 보여 주지 않습니다. 완성도 높은 문장부터 어색한 문장까지 학생들이 쓴 글을 공유하며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죠. 잘 쓴 글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기에 최대한 많은 글을 함께 맛봅니다. 물론 자신의 글을 함께 읽는 과정을 부끄러워하는 학생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활동을 수업마다 반복하니 부끄러워하는 학생들도 이내 자연스레 받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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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글을 써 본 경험이 없어요

대다수 사람들은 읽기와 쓰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읽기와 쓰기가 함께 이뤄져야 문해력이 향상된다는 사실은 종종 잊습니다. 읽기를 통해 채운 지식과 감정이 있어야 다채로운 쓰기가 가능하지요. 그러니 쓰기를 계속할 힘은 읽기에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저는 제이가 도서관에서 책 읽는 모습을 관찰한 적이 없습니다. 최근에 읽은 책을 물어보니 없다고 말하더군요. 그때 제이에게 제대로 된 읽기 경험이 필요하다는 걸 발견했습니다. 그 당시 수업에서는 월간지 <독서평설>에 실린 글을 함께 읽고 있었습니다. 저는 제이에게 글을 읽으며 중요한 문장을 밑줄 긋고 그 문장을 중심으로 전체 글을 정리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중요하다고 생각한 문장을 옮겨 적는 걸 시작으로 자연스럽게 꼼꼼한 읽기를 유도했습니다.


셋째, 선생님의 관심이 필요해요

제이는 수업 시간에 활동지를 작성하지 않고 쉬는 시간을 통해 교사의 개인 코칭을 원했습니다. 학기 초에 이런 일이 반복되자 제이가 원하는 건 교사와의 소통일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전 제이에게 도서관에 자주 놀러 오라고 말하며 제이를 수업 시간 외에도 만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쉬는 시간마다 도서관에 오는 제이에게 2학년이 되면 도서부 동아리에 지원하라고 권유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수업 외적으로도 지속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자 수업에 참여하는 제이의 눈빛은 서서히 변했습니다. 다른 생각으로 가득하던 눈빛은 서서히 수업에 집중하는 눈빛으로 달라졌습니다. 2학년이 된 제이는 도서부 지원서를 제출했습니다. 자기 생각으로 꽉 채운 지원서를 보니 제이의 과거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글쓰기 시간에 한 글자도 적지 못하고 손을 책상 아래로 내린 채 우두커니 앉아 있던 제이가 언제 이렇게 달라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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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가 참나무가 되기 위한' 지속적 연계의 중요성


제이는 저와 일 년 동안 문해력 수업을 하며 전보다 편하게 글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전에 썼던 활동지와 최근의 활동지를 비교해 보면 장족의 발전을 거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여기에서 만족하지 않습니다. 제이의 감정과 생각을 글로 끌어내고 싶습니다. 하지만 2학년이 된 제이는 더 이상 자유학기 수업으로 저를 만날 수 없습니다. 자유학기는 1학년을 대상으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엔진이 달구어졌는데 가속을 할 수 없다니 얼마나 아쉬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저는 1학년 때 문해력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의 지속적인 교육을 위해 방과 후 수업이란 묘책을 찾았습니다. 다행히 제이는 학원에 다니지 않아 월요일과 수요일에 진행하는 방과 후 수업에 함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방과 후 수업은 학생 10명 이내로 진행하기 때문에 30명이 참여했던 자유학기보다 훨씬 더 내밀하게 학생들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도토리가 참나무가 되기 위해선 찰나가 아닌 꾸준하고 지속적인 양분이 필요합니다. 스스로 양분을 끌어올 때까지 말이죠. 선생님이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학생 중 몇 명은 자기 스스로 양분을 끌어올 수 있지만 몇 명은 그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필요할지는 예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지켜보는 일은 매일 아침 달라지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는 것만큼이나 만물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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