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활용수업 책이 불편한 정아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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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20 22:38 조회 7,129회 댓글 0건본문
정아(가명)가 도서실에 펼쳐 놓은 그림책 『딸은 좋다』를 보더니 투덜거리며 책장을 넘기기 시작한다. 읽는 동안 표정이 좋지 않다.
“딸은 좋다? 치…”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해요? 딸이 좋다고?”
“모르겠네. 난 아들도 없고, 남자형제도 없어서… 책이 맘에 안 드는구나.”
“짜증나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해 놓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이런거…”
“그럴 수도 있겠네. 음… 네가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면 이 책 문제가 있군.”
“제가 이상한 걸까요?”
중학교 3학년인 정아는 전교생이 아는 모범생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고 성격 좋은 아이로, 선생님들 사이에는 성적도 좋은데 싹싹하기까지 한 아이로 유명하다. 게다가 반 회장인데 통솔력도 있어서 거친 남자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있다. 사실 정아 같은 아이들은 나 말고도 사랑을 줄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평소에는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침 방과후학교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이 몰려왔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이 책이 어떤지 봐달라고 했다.
“이 아이 못생겼는데 귀여워요.”
“우리 엄마도 아들보다 딸이 훨씬 낫대요.”
“맞아요. 제가 봐도 여자가 나은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남자애들은 다 이상하잖아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며 한 마디씩 하고 있는 동안 정아는 움직이지 않고 곁에 서 있었다.
“정아야, 애들 이야기 들었지? 너 이상한 거 맞지? 하하”
웃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정아가 웃지 않는다. 그리고 도서실을 나가려는 정아를 도와줄 일이 있다며 붙잡았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은 단순작업 함께하기이다. 그러다 보면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부담도 없으며 자기 이야기를 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저… 이상하게 남녀차별에 예민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여자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심하게 화가 나요.”
“학교 말고, 집에서도 그래?”
아마도 가족들 때문인 것 같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할머니, 오빠는 모두 엄마 앞에서는 폭군과 같은 존재이다. 항상 회사일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는 아버지, 마치 엄마의 실수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엄마의 작은 실수라도 크게 부풀려 이야기하는 할머니,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것도, 사고치고 다니는 것도 다 엄마 잔소리 때문이라는 오빠, 모두 다 엄마를 못살게 구는 사람뿐이다. 정아가 생각하는 엄마는 예쁘고, 음식도 잘하며, 착한 사람이다. 책도 많이 읽어서 아는 것도 많은데 이상한 집안에 시집와서 마치 조선시대처럼 살고 있으니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 그래서 자신만은 엄마 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안일도 돕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디 가서 엄마 흉이 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지냈다. 오늘 도서관에 온 것도 엄마가 읽을 만한 책을 빌려가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그런데 신기한 건요. 저는 책을 잘 못 읽겠어요. 공부도 하겠고, 운동도 잘하는 편인데 책 읽는 건 잘 안돼요. 책만 읽으면 다른 생각이 나고, 재미도 없고, 이제 책을 많이 읽어야한다는데 걱정이에요. 서울대 필독도서 이런 거 읽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실컷 욕하며 읽는 책들
방학 동안 엄마에게 책 빌려드리러 오면서 내가 권해주는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이제까지 내가 권해준 책을 재미없다고 하는 아이는 없었다고, 믿어도 좋다고 했다. 정아에게는 우선 등장인물에게 실컷 욕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나오는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단편을 읽어보라고 했다. 정아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지만 꼭 읽어보겠다고 했다. 저녁에 정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책은 읽을 만하지?”
“네, ㅠ”
“왜? 재미없어.”
“아니요. 열 받아서요.”
“그래 그래, 낼 만나서 실컷 욕이나 하자. ㅋ”
그 날 이후 정아는 내게 계속 책을 빌리러 왔다. 우리는 그때마다 마치 친구 흉을 보는 것처럼 등장인물을 욕하며 즐거워했다. 다음에 권한 책은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 중에 「하늘여자」였다. 정아는 이 책을 받아들며 『호기심』도 다 읽었다면서 이 책도 다 읽겠다고 했지만 나는 다른 편은 재미없으니 그것만 읽으라고 했다. 방학이니 한 권 더 빌려달라고 해서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이라는 동화책도 빌려주었다. 정아는 책을 읽다가 이렇게 화가 나기도, 슬퍼서 울기까지 한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선생님, 그런데 전 왜 남자들에게보다 책의 주인공인 여자들에게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저라면 안 그랬을 거예요. 선녀도 그래요. 이제 그렇게 착하기만 한 건 나쁜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도 요즘은 안 그러잖아요. 전 그렇게 멍청하게 착한 건 짜증나요.”
“그럼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에 나오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어? 치매 있는 할머니를 두고 자신의 일을 하다가 가족들에게 욕먹잖아.”
정아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런 정아의 손을 잡고 손톱을 보았다. 무척 짧은 손톱은 이미 여러 군데 피가 맺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우리 딸한테 하는 잔소리를 해야겠군. 이그… 입에 병균 들어가. 그리고 정서불안 같잖아. 하하”
“저 불안한가 봐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자꾸 불안해요. 마음도 급하고…”
정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감추었고 서가로 갔다.
“선생님이 권해주시는 책은 모두 쇼킹해요. 선생님이 이제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쇼킹한 책이 뭐에요?”
나는 정아가 말한 ‘쇼킹’이 ‘감정을 많이 흔들었던’으로 해석한다면 『마녀사냥』이라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인가 빌려 읽은 책인데 그 당시에는 『우리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라는 제목이었고, 마녀사냥이 한참이던 시대, 주인공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 죽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책이라고 하며 이 책 읽고 며칠을 쉽게 잠을 못 잤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엄마 편? 아빠 편?
정아는 이 책을 빌려갔고 며칠 후 평소 이른 시간에 왔던 것과는 다르게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나타났다. 책을 들고 도서실 문 앞에 서서 책을 돌려주는 것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 퇴근할 건데, 배고픈데 떡볶이 콜?”
정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앞 장 섰다.
바람이 너무 차가워 빠르게 걸어가는데 정아가 말을 시작했다.
“저…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아냈어요.”
정아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이번 일 년 간 엄마에게 짜증이 많이 났다. 예전에는 마냥 불쌍하기만 했던 엄마가 이제 답답하게 느껴졌다. 잔소리하는 할머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하지도 않고, 한 번도 아빠를 향해 웃어주거나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고, 사고치는 오빠에게 때리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하지 않는 엄마가 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일 이 셋 중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항상 어두운 엄마 얼굴을 보면 짜증나고, 자기까지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엄마처럼 살기 싫고,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는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마녀사냥』을 읽으면서 엄마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느끼며 자신이 느끼는 불안이 어쩌면 엄마가 죽거나,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엄마를 미워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없애버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정아에게 똑똑한 아이라서 생각을 깊게 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칭찬에 익숙하던 아이가 쑥스러워했다.
중학생이 되어서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모든 것을 짜증으로 표현해버리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부모의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인 것이다. 특히 어렸을 때 자신에게 커다란 존재였던 부모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럴 때면 아이들에게 제2의 탯줄 끊기(정서적으로 부모와의 분리 시작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예쁜 모양의 배꼽을 갖기 위해서 잘 이겨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정아는 가기 전에 엄마에게 줄 거라며 떡볶이를 포장했다. 할머니 몰래 엄마랑 숨어서 먹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자신이 엄마 편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바삐 집으로 향하는 정아에게 엄마랑 편을 먹고 적(?)들에게 이길 멋진 방법을 꼭 찾길 바란다고 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딸은 좋다? 치…”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해요? 딸이 좋다고?”
“모르겠네. 난 아들도 없고, 남자형제도 없어서… 책이 맘에 안 드는구나.”
“짜증나요.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해 놓고… 뭐 그런 거 있잖아요. 가난하지만 행복하다… 이런거…”
“그럴 수도 있겠네. 음… 네가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다면 이 책 문제가 있군.”
“제가 이상한 걸까요?”
중학교 3학년인 정아는 전교생이 아는 모범생이다. 친구들 사이에서 공부 잘하고 성격 좋은 아이로, 선생님들 사이에는 성적도 좋은데 싹싹하기까지 한 아이로 유명하다. 게다가 반 회장인데 통솔력도 있어서 거친 남자 아이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고 있다. 사실 정아 같은 아이들은 나 말고도 사랑을 줄 많은 선생님들이 계시기 때문에 평소에는 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마침 방과후학교 쉬는 시간이라 아이들이 몰려왔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이 책이 어떤지 봐달라고 했다.
“이 아이 못생겼는데 귀여워요.”
“우리 엄마도 아들보다 딸이 훨씬 낫대요.”
“맞아요. 제가 봐도 여자가 나은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남자애들은 다 이상하잖아요.”
아이들이 그림책을 보며 한 마디씩 하고 있는 동안 정아는 움직이지 않고 곁에 서 있었다.
“정아야, 애들 이야기 들었지? 너 이상한 거 맞지? 하하”
웃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정아가 웃지 않는다. 그리고 도서실을 나가려는 정아를 도와줄 일이 있다며 붙잡았다. 아이들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기 위해 내가 자주 쓰는 방법은 단순작업 함께하기이다. 그러다 보면 얼굴을 마주 봐야 하는 부담도 없으며 자기 이야기를 하기가 훨씬 쉽기 때문이다.
“저… 이상하게 남녀차별에 예민한 것 같아요. 학교에서도 ‘여자가…’라는 이야기를 들으면 심하게 화가 나요.”
“학교 말고, 집에서도 그래?”
아마도 가족들 때문인 것 같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버지, 할머니, 오빠는 모두 엄마 앞에서는 폭군과 같은 존재이다. 항상 회사일로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안일은 전혀 하지 않는 아버지, 마치 엄마의 실수만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엄마의 작은 실수라도 크게 부풀려 이야기하는 할머니, 자신이 공부를 못하는 것도, 사고치고 다니는 것도 다 엄마 잔소리 때문이라는 오빠, 모두 다 엄마를 못살게 구는 사람뿐이다. 정아가 생각하는 엄마는 예쁘고, 음식도 잘하며, 착한 사람이다. 책도 많이 읽어서 아는 것도 많은데 이상한 집안에 시집와서 마치 조선시대처럼 살고 있으니 엄마가 너무 불쌍하다. 그래서 자신만은 엄마 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집안일도 돕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어디 가서 엄마 흉이 될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으며 지냈다. 오늘 도서관에 온 것도 엄마가 읽을 만한 책을 빌려가기 위해서였다.
“선생님, 그런데 신기한 건요. 저는 책을 잘 못 읽겠어요. 공부도 하겠고, 운동도 잘하는 편인데 책 읽는 건 잘 안돼요. 책만 읽으면 다른 생각이 나고, 재미도 없고, 이제 책을 많이 읽어야한다는데 걱정이에요. 서울대 필독도서 이런 거 읽어보려고 노력했는데 안 되더라고요.”
실컷 욕하며 읽는 책들
방학 동안 엄마에게 책 빌려드리러 오면서 내가 권해주는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이제까지 내가 권해준 책을 재미없다고 하는 아이는 없었다고, 믿어도 좋다고 했다. 정아에게는 우선 등장인물에게 실컷 욕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호기심』에 나오는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이라는 단편을 읽어보라고 했다. 정아는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지만 꼭 읽어보겠다고 했다. 저녁에 정아에게 문자를 보냈다.
“책은 읽을 만하지?”
“네, ㅠ”
“왜? 재미없어.”
“아니요. 열 받아서요.”
“그래 그래, 낼 만나서 실컷 욕이나 하자. ㅋ”
그 날 이후 정아는 내게 계속 책을 빌리러 왔다. 우리는 그때마다 마치 친구 흉을 보는 것처럼 등장인물을 욕하며 즐거워했다. 다음에 권한 책은 『자린고비의 죽음을 애도함』 중에 「하늘여자」였다. 정아는 이 책을 받아들며 『호기심』도 다 읽었다면서 이 책도 다 읽겠다고 했지만 나는 다른 편은 재미없으니 그것만 읽으라고 했다. 방학이니 한 권 더 빌려달라고 해서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이라는 동화책도 빌려주었다. 정아는 책을 읽다가 이렇게 화가 나기도, 슬퍼서 울기까지 한 것도 처음이라고 했다.
“선생님, 그런데 전 왜 남자들에게보다 책의 주인공인 여자들에게 더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요. 저라면 안 그랬을 거예요. 선녀도 그래요. 이제 그렇게 착하기만 한 건 나쁜 것 같아요. 드라마에서도 요즘은 안 그러잖아요. 전 그렇게 멍청하게 착한 건 짜증나요.”
“그럼 『엄마의 마흔 번째 생일』에 나오는 엄마를 이해할 수 있겠어? 치매 있는 할머니를 두고 자신의 일을 하다가 가족들에게 욕먹잖아.”
정아는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런 정아의 손을 잡고 손톱을 보았다. 무척 짧은 손톱은 이미 여러 군데 피가 맺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우리 딸한테 하는 잔소리를 해야겠군. 이그… 입에 병균 들어가. 그리고 정서불안 같잖아. 하하”
“저 불안한가 봐요. 이유는 잘 모르겠는데 자꾸 불안해요. 마음도 급하고…”
정아는 얼굴이 빨개져서 손을 감추었고 서가로 갔다.
“선생님이 권해주시는 책은 모두 쇼킹해요. 선생님이 이제까지 읽은 책 중에 가장 쇼킹한 책이 뭐에요?”
나는 정아가 말한 ‘쇼킹’이 ‘감정을 많이 흔들었던’으로 해석한다면 『마녀사냥』이라고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쯤인가 빌려 읽은 책인데 그 당시에는 『우리 어머니는 마녀가 아니에요』라는 제목이었고, 마녀사냥이 한참이던 시대, 주인공의 어머니가 마녀로 몰려 죽는 과정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는 책이라고 하며 이 책 읽고 며칠을 쉽게 잠을 못 잤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엄마 편? 아빠 편?
정아는 이 책을 빌려갔고 며칠 후 평소 이른 시간에 왔던 것과는 다르게 퇴근 시간이 다 되어 나타났다. 책을 들고 도서실 문 앞에 서서 책을 돌려주는 것도, 이야기를 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 퇴근할 건데, 배고픈데 떡볶이 콜?”
정아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앞 장 섰다.
바람이 너무 차가워 빠르게 걸어가는데 정아가 말을 시작했다.
“저… 이 책을 읽으면서 제가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아냈어요.”
정아는 중학교 3학년이 된 이번 일 년 간 엄마에게 짜증이 많이 났다. 예전에는 마냥 불쌍하기만 했던 엄마가 이제 답답하게 느껴졌다. 잔소리하는 할머니에게 뭐라고 대답을 하지도 않고, 한 번도 아빠를 향해 웃어주거나 밝은 목소리로 이야기하지 않고, 사고치는 오빠에게 때리는 것도, 화를 내는 것도 하지 않는 엄마가 더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매일 이 셋 중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엄마를 보고 있으면 속이 터질 것 같았다. 항상 어두운 엄마 얼굴을 보면 짜증나고, 자기까지 우울해지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엄마처럼 살기 싫고, 연애만 하고 결혼은 하지 않는 멋진 커리어우먼으로 살 꿈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마녀사냥』을 읽으면서 엄마에게 느끼는 답답함을 느끼며 자신이 느끼는 불안이 어쩌면 엄마가 죽거나, 떠나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까지 엄마를 미워하는 것으로 두려움을 없애버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고 했다. 나는 정아에게 똑똑한 아이라서 생각을 깊게 했다며 칭찬을 해주었다. 칭찬에 익숙하던 아이가 쑥스러워했다.
중학생이 되어서 부모와의 관계를 다시 정립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모든 것을 짜증으로 표현해버리는데 자세히 살펴보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부모의 위치(?)를 정하는 과정에서 겪는 혼란인 것이다. 특히 어렸을 때 자신에게 커다란 존재였던 부모가 어느 날 갑자기 자신과 비슷한 인간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그럴 때면 아이들에게 제2의 탯줄 끊기(정서적으로 부모와의 분리 시작하기)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다. 예쁜 모양의 배꼽을 갖기 위해서 잘 이겨내 달라고 부탁하면서.
정아는 가기 전에 엄마에게 줄 거라며 떡볶이를 포장했다. 할머니 몰래 엄마랑 숨어서 먹을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예전처럼 자신이 엄마 편임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바삐 집으로 향하는 정아에게 엄마랑 편을 먹고 적(?)들에게 이길 멋진 방법을 꼭 찾길 바란다고 하며 손을 흔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