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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이들에게 고독을 허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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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4 17:56 조회 6,89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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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위해서는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가 필요하다. 요즘 아이들의 정보 검색 능력과 프레젠테이션 제작 스킬은 매우 뛰어나다. 그러나 자기 제시(self-presentation)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나’로 시작하는 주어로 말을 하고 글로 표현하지 못한다. 인터넷 정보 검색에서 얻은 이미지를 통해 어떤 것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대체로 아이들의 착각에 불과하다. 자신의 신체적 감각을 활용해 스스로 얻은 정보와 지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어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칼로 연필을 깎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이에 누구나 “예!”라고 대답했지만, 정작 60%의 어린이들이 연필을 깎지 못했다고 한다. 인터넷 같은 미디어로 ‘매개된’ 경험으로는 정보와 정보를 연결하고 자신의 생각을 이어붙이는 훈련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런 매개된 정보와 지식이 과연 배움의 목적인 ‘발견하는 재미’를 느끼게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위해서는 살아 있는 실재의 세계를 직접경험할 수 있는 토대가 더없이 중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아이들이 몸으로 깨닫는 과정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스스로 언어화하는 능력과 공감능력을 배우게 되는 것, 나는 이것이야말로 독서교육이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닌가 싶다.

아이들의 독서교육을 위해서는 좋은 정책도 필요하고, 국어교사와 사서교사들의 열정도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아이들을 위해 더없이 필요한 것은 아이들 혼자 놀고 생각할 수 있는 ‘구석’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조용히 어느 한쪽 구석에 몸을 숨기고는 곰곰이 뭔가를 생각할 수 있는 장소와 시간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한마디로 말해 고독을 위한 시·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미국 사회학자 일리즈 보울딩은 「어린이와 고독」에서 고독을 “세상과 통합하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경험”이라고 지적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오늘의 교육 현실은 아이들 내면의 삶을 평가절하 내지는 무시하면서 오로지 외적 행동수칙의 매뉴얼에 따르도록 종용한다.

하지만 우리는 삶에서 결코 매뉴얼화될 수 없는 ‘빈 구석’이 많아야 풍요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다. 분리하되 분리되지 않는 삶을 위해서는 고독이 주는 은밀한 시간들의 생기가 응당 필요한 것이다. “그런 ‘비어 있는’ 시간이 창조적으로 ‘사용하는’ 정신으로 이끌 수 있문화칼럼는 것이 아닐까?”라는 일리즈 보울딩의 의문은 전적으로 정당하다.

내 경우도 그랬다. 고2 때 셋째 형의 자살 이후 마음의 골방에서 혼자 놀았던 고독한 시간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학창 시절 내내 마음의 질병을 앓았을 것이다. 그 무렵에 나만의 시·공간에서 책을 보고, 노래를 듣고, 몽상을 하고, 뭔가를 쓰적이는 등의 ‘홈스쿨링’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삶의 의미를 향한 갈증을 결코 채우지 못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표현하는 삶은 소유하는 삶보다 더 행복할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고독은 내 인생의 멘토였다고 단언할 수 있다.

어른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도 고독할 줄을 모른다. 고독을 ‘심심하다’와 같은 의미로 이해하는 아이들이 의외로 많다. 아이들에게 장래희망을 말하라고 하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할 것 없이 특정의 직업들을 나열하는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희망은 직업이 아니다! 어쩌면 직업이 곧 희망이 되는 사회는, 일본 사상가 모리오카 마사히로가 말한 무통문명無痛文明의 징후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괴로움과 아픔이 없는 문명을 추구함으로써 안락을 위한 전체주의를 용인하는 문명을 구축하지는 않았는지 자문자답을 해야 한다. 그런 문명사회에서는 오직 자기 가축화의 윤리학을 내면화하게 된다. 자기 가축화란 인간이 인간 자신을 가축의 상태로 몰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아이들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와 열정을 누구나 갖고 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예를 보자. 프랑스의 한 라디오 방송사가 어린이를 대상으로 진짜 속마음을 알아보려는 실험을 했다. 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만난 어린이들에게 마이크를 주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라고 했다. 그리고는 아이들의 말을 그대로 생방송으로 내보냈다. 결과는 어땠을까? 아이들의 입에서는 어른들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이른바 방송 불가용 멘트들이 봇물을 이루었다고 한다.
만일 우리 아이들이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 나는 우리 아이들의 입에서 나올 것으로 짐작되는 나쁜 언어들이 몹시 두렵다. 한 해에 십대 청소년 200명 이상이 자살을 하는가 하면, 초·중·고 학생 가운데 약 5만 명이 학업 스트레스 등의 이유로 자퇴를 하는 나라에 사는 우리 아이들은 오죽 ‘할 말’이 많을까. 그러나 아이들은 제 속마음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아이들이 아는 사람들일수록 더욱 그러지 않을까.

박성우의 시 <지나가는 사람>은 그런 아이들이 어느 경우에 말문을 여는지를 잘 포착한 작품이다. “꼭 비밀로 하고 싶었던 말들을 아저씨한테 다 했다”. 아이들이 “다시는 볼 일이 없는 사람”한테만 제 속마음을 털어놓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저마다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열망은 갖고 있으되, 부모님과 선생님 같은 아는 사람한테는 자기 극화劇化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정책보다도 아이들이 고독할 수 있는 자유와 시·공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 ‘비어 있는’ 시간에, 아이들은 가면과 갑옷을 벗고서 스스로에게 진실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때 아이들이 만나는 친구가 반드시 책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앎을 즐기는 것을 배우는 것으로도 훌륭한 홈스쿨링이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아이들에게 이런 고독의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아직도 학교와 동네에 도서관을 짓는 운동조차 ‘기적’을 운운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삶을 가꾸는 책읽기 교육에 대한 무수한 열정들이 아직 남아 있다면 못할 것도 아니다. 아이들의 독서교육을 생각할 때, 그래도 ‘허무주의적 낙관’의 태도를 갖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고독을 허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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