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시 읽어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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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3 16:12 조회 6,551회 댓글 0건본문
몇 해 전이었다.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찾아왔다.
“선생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시집한 권 소개해 주세요.”
그는 고3이었고,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며칠째 힘들어 하던 그 녀석 얼굴이 해쓱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가.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아뜩함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인생을 물어오는 학생에게 시집을 권해야 하는 나는 과연 성공한(?) 문학 선생일 것이다. 이미 그 애는 도서관에서 며칠째 머물면서 시집을 읽고 있었는지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제 성에 차지 않던 모양이었다. 아침 모임 때 심심찮게 시를 읽어주고, 수업 때도 시만 나오면 침을 튀기던 내 모습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 이것이다’ 하고 그에게 권해 줄 시집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많은 시인과 시집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기껏 내가 한 말이라는 게 “그런 시집 있으면 내가 먼저 읽어야겠다.”였다. 그 애는 실망이 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그 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문득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못>
윤효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반칠환 엮음, 백년글사랑)이라는 시선집이 마침 책꽂이에 꽂혀 있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이 시를 함께 읽었다. 굳이 서로 말을 하지않아도 한 문장짜리 짤막한 산문시 한 편이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애는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해 슬펐을 텐데, 그 순간 그것이 도리어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애가 하고 있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전략)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얼마 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침, 나는 학생들 앞에서 이 시를 읽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 너희들 소속은 어디냐?”라고 묻고 싶었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큰 대안학교 학생들인데도 자기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배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먹을거리 입을 거리 스스로 마련하는 것도 배우는 학교. 공부를 대안적으로 해서 대학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대안적인 삶을 꿈꾸기 위해 모여든 우리 학생들에게 나는 늘 욕심을 내게 된다. 요즘처럼 효율을 중시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시대를 살아가려면 자기 ‘소속’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칫하다가는 이 무섭고 잘못된 흐름에 휩쓸려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내게도 묻고 있었던 것이었다. 네 소속은 어디냐고.
시 읽기는 이런 것이다. 시 읽기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괴롭게 돌아보면서 내가 위로받고, 우리가 구원받는다. 또한 이 시대의 촉수가 되기도 하는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한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한다. 조금만 눈을 옆으로 돌리면 시는 우리 곁에 흔히 있다. 우리나라처럼 시인이 많은 나라도 없다지 않은가. 좋은 시와 시집들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가운데는 어려운 시도 있고 쉬운 시도 있다. 자기에게 맞는 시를 찾아 읽으면 된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자주 읽어준다. 의미 있는 날이면 거기에 맞는 시를 찾아 읽는다. 어느 때는 내가 직접 쓴 시를 읽어주기도 한다. 우리 학생들과 나는 한 편의 시를 통해 긴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보면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울 날이 올 것이다.
“선생님,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려주는 시집한 권 소개해 주세요.”
그는 고3이었고,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진 지 얼마되지 않은 때였다. 며칠째 힘들어 하던 그 녀석 얼굴이 해쓱했다.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던가.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아뜩함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인생을 물어오는 학생에게 시집을 권해야 하는 나는 과연 성공한(?) 문학 선생일 것이다. 이미 그 애는 도서관에서 며칠째 머물면서 시집을 읽고 있었는지 시집 한 권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런데 제 성에 차지 않던 모양이었다. 아침 모임 때 심심찮게 시를 읽어주고, 수업 때도 시만 나오면 침을 튀기던 내 모습에서 답을 구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진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 이것이다’ 하고 그에게 권해 줄 시집을 떠올리지 못했다. 수많은 시인과 시집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으나 기껏 내가 한 말이라는 게 “그런 시집 있으면 내가 먼저 읽어야겠다.”였다. 그 애는 실망이 컸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그 애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 문득 시 한 편이 떠올랐다.
<못>
윤효
가슴에 굵은 못을 박고 사는 사람들이 생애가 저물어가도록 그 못을 차마 뽑아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을 거기 걸어놓았기 때문이다.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반칠환 엮음, 백년글사랑)이라는 시선집이 마침 책꽂이에 꽂혀 있었고, 그 안에 들어있는 이 시를 함께 읽었다. 굳이 서로 말을 하지않아도 한 문장짜리 짤막한 산문시 한 편이 우리를 하나로 묶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애는 그동안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라고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가슴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해 슬펐을 텐데, 그 순간 그것이 도리어 ‘자기 생의 가장 뜨거운 부분’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그 애가 하고 있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이었을까.
<사소한 물음들에 답함>
송경동
(전략)
십수년이 지난 요즈음
다시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이 자꾸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다시 숨김없이 대답한다
나는 저 들에 가입되어 있다고
저 바닷물결에 밀리고 있고
저 꽃잎 앞에서 날마다 흔들리고
이 푸르른 나무에 물들어 있으며
저 바람에 선동당하고 있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의 무너진 담벼락
걷어차인 좌판과 목 잘린 구두,
아직 태어나지 못해 아메바처럼 기고 있는
비천한 모든 이들의 말 속에 소속되어 있다고
대답한다 수많은 파문을 자신 안에 새기고도
말없는 저 강물에게 지도받고 있다고
얼마 전 새 학기가 시작되는 날 아침, 나는 학생들 앞에서 이 시를 읽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너희들은 어느 조직에 가입되어 있느냐? 너희들 소속은 어디냐?”라고 묻고 싶었다. 학교에 대한 자부심이 큰 대안학교 학생들인데도 자기 정체성이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배우고,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고, 먹을거리 입을 거리 스스로 마련하는 것도 배우는 학교. 공부를 대안적으로 해서 대학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대안적인 삶을 꿈꾸기 위해 모여든 우리 학생들에게 나는 늘 욕심을 내게 된다. 요즘처럼 효율을 중시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시대를 살아가려면 자기 ‘소속’이 분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칫하다가는 이 무섭고 잘못된 흐름에 휩쓸려 어디로 떠내려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은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내게도 묻고 있었던 것이었다. 네 소속은 어디냐고.
시 읽기는 이런 것이다. 시 읽기는 우리 삶을 돌아보게 만든다. 괴롭게 돌아보면서 내가 위로받고, 우리가 구원받는다. 또한 이 시대의 촉수가 되기도 하는 시를 읽으면서 우리는 시대의 아픔과 희망을 한 가슴에 품을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당연히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한다. 조금만 눈을 옆으로 돌리면 시는 우리 곁에 흔히 있다. 우리나라처럼 시인이 많은 나라도 없다지 않은가. 좋은 시와 시집들은 산처럼 쌓여 있고, 그 가운데는 어려운 시도 있고 쉬운 시도 있다. 자기에게 맞는 시를 찾아 읽으면 된다.
나는 학생들에게 시를 자주 읽어준다. 의미 있는 날이면 거기에 맞는 시를 찾아 읽는다. 어느 때는 내가 직접 쓴 시를 읽어주기도 한다. 우리 학생들과 나는 한 편의 시를 통해 긴 말이 필요 없을 때가 종종 있다. 그러다보면 서로 얼굴만 봐도 즐거울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