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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귀농인과 상경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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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1 14:37 조회 6,223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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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되도록 피했으면 하는 두 가지 삶이 있다. 대도시에서 사는 것, 그리고 회사원으로 사는 것. 알다시피,도시는 인간의 삶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공간이 아니라 부르주아들이 장사를 하기 위해 만든 공간이다. 애초부터 조화로운 삶이나 공동체적인 삶과는 동떨어진 욕망과 경쟁의 공간이라는 말인 것이다. 대도시란 그런욕망과 경쟁이 다른 삶의 공간들을 빨아들이고 먹어치워 만들어진 괴물이다. 대도시에선 누구도, 부자든 가난뱅이든 진정으로 행복하기 어렵다. 여유와 온정이 있는 삶이 용서되지 않기 때문이다.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대도시 밖에서 쉬고 싶어 한다.

‘회사원’이란 대다수 도시인의 삶이다. 대기업, 중소기업. 폼 나는 회사, 쪽팔린 회사. 이런 회사 저런 회사. 아무튼 대부분의 도시인들은 회사원이라는 삶의 방식으로 살아간다. 대부분의 회사는 대도시에 몰려있고 회사원은 대도시라는 괴물의 세포를 이룬다. 인간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뭐하나 주체적으로 선택하기 어려운 옴짝달싹 못하는 삶이란 말이다. 회사원으로 살면서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은 뭐가 있을까. 존경하는 운동단체에 CMS 후원하는 것, 그리고 촛불 시위(대도시 한복판에서 진행되는, 중간계급 시민들의 삶을 기반으로 하는 비교적 안전한 시위) 말고는 딱히 꼽을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대도시, 회사원의 삶은 그 형식으로 딱 나누어지는 건 아니다. 이를테면 운동단체 활동가들은 대도시에 살지만 대도시의 시스템과 가치관을 거스른 대도시에 사는 귀농자들이다. 내가 일하는 <고래가 그랬어>는 주식회사인데 직원들 모두 다른 회사에 다니다 옮겨온 사람들이다. 형식으로 보면 한 회사에서 다른 회사로 옮긴 것이지만, 적은 급여를 받는 대신 좀 더 여유롭고 자기존중을 가질 수 있는 일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그들 역시 대도시에 사는 귀농자들이다. 반면에 일찌감치 대도시의 삶을 접고 귀농했지만 여전히 대도시 회사원의 감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다. 식구들과 강원도오지에 파묻힌 지 십 수 년인데 부인과 아이들은 교육문제 때문에 서울에 따로 사는 사람은 오지에 사는 대치동 주민이다. 삶의 형식이 아니라 양식이 중요하다.

대입문제를 ‘교육문제’라 바꿔 부르는 기괴한 한국의 교육현실에서 내 두 아이가 별 무리 없이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대도시에서 회사원으로 살아가는 삶을 그들 스스로나 그들의 부모나 전혀 근사하지 않은 삶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이름 없는 회사에 다니느냐, 남들이 선망하는 대기업 사원이냐의 차이는 그 시스템에 끼어 살아가는 사람에게나 대단한 차이일 뿐이다. 대도시라는 욕망과 경쟁의 세포로 생존하는데 어느 세포인가가 뭐 그리 다를까. 여유 없고 각박한 삶은 다르지 않다. 그 삶을 포장하는 껍질만 다를 뿐.

그런데 그런 차이를 인생의 진정한 차이라 여기도록 만드는 게 대학입시를 향한 19년의 레이스이다. 그레이스에 참여하는 것만으로 정상 범주의 인간으로 자라는 데 어려움이 많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모든 농사에는 절기마다 혹은 정해진 시기마다 하고 넘어갈 일들이 있다. 그 시기를 놓치면 돌이킬 수 없다. 수확하기 전에 몰아서 한다고 해서 복구가 되는 게 아니라 농사를 완전히 망치게 된다. 교육이란 농사와 같다. 아이가 5살 때 느끼고 배워야 할 일이 있고 10살때 느끼고 배워야 할 일이 있고 15살 때 느끼고 배워야할 일이 있다. 그걸 느끼고 배우지 못할 때 교육은 완전히 망치게 된다. 옛사람들이 아이를 키우는 일을 ‘자식농사’라 한 건 바로 그래서다.

그 19년의 레이스에 투여되는 돈과 엄마(부모가 아니라 엄마다)의 가장 소중한 3,40대의 인생과 허다한공력들을 아이가 어릴 적부터 그 반의반만 차근차근 투자한다면 대학을 꼭 나오지 않아도, 대도시의 회사원으로 살지 않아도 먹고살 방도는 충분히 나온다고 믿는다. 설사 시행착오가 좀 있다손 치더라도 아이가 정상범주의 청년으로 자라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일이다. 만일 아이가 아귀다툼을 벌이지 않으면 나중에 꼼짝없이 굶어죽는다면 나는 생각을 고쳐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기아가 만연한 절대빈곤 국가는 아니다. 뭘 해도 먹고는 산다는 말이다. 중요한 건 아이가 정상범주의 사람으로 자라는 것,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뭐라던 개의치 않고 제 인생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걸 갖지 못한 아이가 제아무리 좋은 학벌과 스펙을 가지면 뭣 할 것인가.

<고래가 그랬어>엔 ‘고래토론’이라는 꼭지가 있다. 아이들이 한 주제를 가지고 저희들끼리 마음껏 떠들어 대는 꼭지다. 83호가 나왔으니 여든 번이 넘게 했는데 실패한 게 딱 두 번이다. 둘 다 부자 동네의 초등학교에 서였다. 그 한 주제는 ‘공부만 하느라 놀 시간이 없어요’였다. 그런데 막상 토론이 시작되자 아이들이 입을 모아 그러는 것이다. “경쟁 당연히 해야 한다.”, “경쟁에서 이겨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 수 있다.”, “경쟁에서 이겨야 내가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다.”

다음날 서민지역의 다른 초등학교에서 보충토론을 마치고 편집장과 소주를 하는데 둘 다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초등학교 5, 6학년 아이가 “경쟁에서 이겨야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살 수 있”고 “경쟁에서 이겨야 내가 원하는 상대와 결혼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 아이가 스무 살 청년이 되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일까 생각하니 너무나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대개의 부모들은 제 아이들과 성적 경쟁에서 월등히 앞서는 그 아이들과 그 아이들의 ‘교육환경’을 부러워한다.

사람이란 자기가 못 가진 게 더 가치 있게 보이는 법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고생하며 자란 사람은 부자가 되면 행복할거라는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그래서 부자가 된 그는 행복한가? 만날 돈 돈 하면서 사람들에게 욕먹고(물론 그 앞에서 굽실거리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제 인생을 소진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컬어 ‘졸부’라 부르며 경멸한다. 이상한 일은 그런 우리가 어느새 ‘졸부’의 감성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게 인간적으로 사회적으로 어떻다 따지려는 게 아니다. 중요한 건 이렇게 키우면 우리 아이들은 불행해진다는 사실이다. 우린 아이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권리를 부여받은 적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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