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활용수업 몸과 마음으로 겪은 공부가 삶이 되는 아이들 - 최은희 아산 거산초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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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4-01 02:02 조회 7,667회 댓글 0건본문
기르는 문화 속에서 때를 배우는 아이들
“이모, 거산학교 진달래꽃전 해 먹었어요?”
주말에 친정식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을 때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조카가 느닷없이 묻는다.
“진달래꽃전?”
“이 맘 때면 진달래꽃전 해 먹잖아요? 산 빛깔이 연한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쯤이면.”
“응, 지난주에. 근데 산 색깔만 봐도 진달래꽃이 필 때란 걸 알아?”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녀석은 히죽 웃고 만다.
“쟤는 거산 졸업한 지가 언젠데,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이 지금쯤은 냉이 캐서 국 끓여 먹겠다, 진달래꽃전 해 먹었겠다, 쑥떡 해 먹었겠다면서 줄줄이 읊는다니까. 지훈이 봄날은 아마도 거산 다니던 때였나 봐.”
옆에서 듣던 언니가 한 마디 거든다.
“어, 우리 조카가 때를 아는 구나! 사람이 때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데…….”
우리 학교는 산과 들, 냇가에 둘러싸인 산골 학교다.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찾아 산과 들을 누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풀이 무성해지면 절대로 산이나 풀숲에 들어가지 않는다. 가르치지 않아도 뱀이나 독충이 있는 철을 안다. 선배들의 놀이를 보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다. 또 하나 낯선 풀이나 열매를 보고 이름을 묻는 아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풀이나 열매를 보면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라고 묻는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선생들은 “우리 학교 애들은 왜 이름을 묻지 않고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를 묻지? 그런데 진정한 생태공부는 우리 아이들처럼 하는 것이 알짜배기가 아닐까?”하며 낄낄거리곤 했다. 풀 이름 몇 개, 꽃 이름 몇 개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어찌 보면 내가 먹어도 되느냐, 즉 나와 자연과의 관계를 명료하게 배우며 자연을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 학교의 자연을 활용한 체험활동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먹고 사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냉이 캐서 봄나물 비빔밥 해먹기부터 진달래꽃전, 쑥떡, 텃밭에 기르는 채소로 한솥밥 해먹기, 감자, 고구마 심고 캐기…. 일 년의 활동 모두가 먹고 사는 것을 기르고 가꾸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철 따라 자연에서 나오는 생명들을 내 몸의 에너지로 순환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아무리 진달래꽃전을 먹고 싶어도, 쑥떡을 빚어 먹고 싶어도 자연의 걸음걸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다만 자연의 걸음걸이로. 거산에 와서 내 몸에 배인 말이 있다면 ‘기다리자’이다. 조급한 아이들이나 학부모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기다려’이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배우면서 터득한 것이 때가 있음을 아는 것이고,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기다림을 무모한 낭비라 여기고 모두 ‘빠르게 빠르게’의 속도에 휘말린 채 살아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빨리 빨리”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언어이다. 언어는 그 시대의 사유체계이다. 언어 자체가 그 속에 그 시대의 생각이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여기저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속도’라는 말 역시 우리 시대의 사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속도는 이미 전쟁이 되었다. 속도에서 뒤쳐진다는 것은 살아남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정보를 좀 더 빨리, 남보다 좀 더 빨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외친다. 그 외침은 사람들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거역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성하게 떠받드는 이 ‘속도’ 때문에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삶이 즐거운가? 물어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남보다 빠르게, 그리고 뭐든 최대한 빨리 빨리를 외쳐대는 이 주문이 과연 우리 아이들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려 놓는가? 탐색해야 한다.
거산초등학교에서 생태교육을 하게 된 밑바탕엔 ‘속도’에 대한 삶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이 있다.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상품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효율과 능률을 앞세운 자본주의의 거대 논리에 묻혀 사람 역시 물건으로 취급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광풍과도 같은 속도의 전쟁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 속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한번 둘러보자.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을 거스르며 속도를 위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싹이 움돋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시드는 그 숱한 시간을 철저히 지켜내지 않던가? 거쳐야 할 어떤 것도 건너뛰거나 시간을 앞당기지 않는 자연을 보면서 우리는 아이들의 삶이 그러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과거 ‘기르는 문화’에 속한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았다. 그러나 ‘만드는 문화’로 넘어 오면서 인간의 삶은 극도로 황폐해졌다. 신문이나 뉴스를 뒤덮는 각종 범죄와 전쟁은 ‘만드는 문화’의 시대에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속도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과거로 회귀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의 허황된 꿈이 아닌 삶의 순리임을 깨닫고, 지금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춰 서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우리 학교의 생태체험교육은 아이들의 삶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고 인내와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우리와 함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배려하기 위한 공부이다. 자연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무자비한 속도의 전쟁을 과감히 거부한다. 빠르다는 것이 마치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연의 습성과 태도를 배운다는 것은 자칫 진부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만드는 문화’에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르는 문화’를 몸으로 겪으며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배움을 얻고 결과를 얻기까지 인내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참된 공부인 것이다. 봄에 씨감자를 잘라 땅에 묻고, 북을 주고 하얗게 핀 꽃을 보며 감자알이 굵어지길 기다리는 마음, 잘 영근 감자를 캐서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쪄먹으며 결실을 나누는 마음, 모심기를 하며 밥이 우리 입으로 오기까지 여든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함을 알며 밥 한 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태도가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식을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직접 배우는 공부, 우리 둘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공부인 것이다.
창 조 와 협 력 의 기 쁨 을 배 우 는 아 이 들
계절체험학습-그림 하나
“야, 흙인데 뭐 어때? 잘못되면 이렇게 막 뭉개고 다시 하면 되는데….”
혜원이의 야무진 말이다. 뭐든 잘하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미혜(가명)는 십 여분이 훌쩍 지나도록 흙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다. 불안한 눈으로 여기저기 다른 애들을 쳐다보며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다. 그때 혜원이가 나선 것이다.
혜원이는 2학년이지만 아직 맞춤법과 읽기에 서툰 아이다. 수학 시간에는 받아올림과 받아내림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연신 “도와줘요, 누구 나 도와 줄 사람?”하고 소리를 친다. 그래서 교과 공부시간에 혜원이는 조금 자신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름체험학습으로 배우고 있는 도예공부 시간에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 있다.
“이렇게 손바닥으로 흙을 가늘게, 아니 흙을 너무 많이 뗐어. 요만큼.”
미혜는 혜원이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흙을 떼고, 손바닥을 펴서 가늘게 민다.
“잘했어. 그 다음엔 이렇게 흙을 동그랗게 말어서 하나씩 하나씩 올리면 돼.”
“여기가 이렇게 떨어지는 데. 흙끼리 잘 안 붙어.”
“어, 그럴 땐 손가락에 물을 쪼금 묻혀서 흙에다 살짝살짝 발러. 그러면 지들끼리 붙어.”
참 훌륭한 선생이다. 나는 혜원이 어디에 저런 모습이 숨겨져 있나 싶어 놀랐다. 미혜는 도예선생님이 가르쳐 줄 때보다 더 신중하게 혜원이 말을 듣고, 열심히 따라 한다. 흐뭇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고 있는 데, 도예선생님이 내 어깨를 툭 친다.
“선생님,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그렇게 좋아요?”
“우리 애들 너무 멋있지 않아요? 쟤, 저기 꼬마 선생하고 있는 애가 공부 시간에는 늘 기가 죽어 있는 애예요. 그런데 지금 저 앨 보고 누가 기죽은 애라 하겠어요. 어~우, 우리 애들 진짜 대단해요.”
끝없이 애들 자랑을 늘어놓는 날 보며 도예선생님이 깔깔 웃는다.
“선생님, 지금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같은 거 아세요? 근데 대단한 건 선생님이 팔 걷어붙이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거예요. 여기 오는 어른들 대부분이 애들이 못하고 있으면 자기들이 후딱 해주거든요. 그리고 거산 애들도 확실히 달라요. 대부분 애들은 지들 것만 잘하려고 그러지 어려워하는 친구를 도와주지 않거든요. 보다 못해 우리가 서로 도와서 하라고 하면 싫은 내색을 하거나 왜 다른 사람 걸 해주냐며 짜증을 내곤 해요. 그런데 얘들은 말하지 않아도 저렇게 서로 돕는 걸 보면 학교에서 뭘 어떻게 배우는지 다 알 것 같아요.”
여름체험학습을 하는 5일 내내 혜원이는 미혜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느라 몹시 바빴다. 그렇지만 나는 혜원이의 자신에 차 있는 말투와 뿌듯한 표정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계절체험학습-그림 둘
“뚝딱 뚝딱 뚝, 텅~텅~.”
장맛비가 그친 틈으로 한껏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다. 새로 지은 건물그늘에서 아이들이 망치질과 못질을 하느라 비지땀을 흘린다. 매년 여름체험학습으로 5, 6학년 아이들이 목공체험학습을 하는데 올해는 학교 건물을 목각으로 새기고, 의자와 그늘막이 될 만한 간이 원두막을 만들고 있다. 잰 몸놀림으로 일을 하는 아이 몇과 뒤편에서 게으름을 피우다 모둠 아이들에게 눈총을 샀던 아이 몇은 못이며 대패 같은 물건들을 날라주고 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일은 종종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대부분이 참여와 협력, 일의 분배 문제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 모두 하나 같이 열심히 참여하면 좋으련만 모두가 똑같이 일하는 모습을 발견하긴 어렵다. 열심히 몸을 놀리는 아이들은 물론 짜증이 나는 일이다. 속이 상해서 친구에게 화를 내기도 하지만, 곧 그 애들에게 맞는 적합한 일거리를 찾아 나눠 주기도 한다. 목공 전문가가 아이들과 함께 계획한 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동안, 선생님들은 모둠 아이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무마시키기 위해 몇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일에 익숙한 우리 학교 아이들이지만, 어느 집단이든 꾀를 부리는 녀석이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선생님들은 꾸짖음과 다그침보다는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찾아보고 답을 찾아내길 기다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제각각 능력과 마음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한다. 이렇듯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더디지만 귀한 배움의 시간이다.
무더위와 싸우며, 뒤에서 딴청을 피우는 친구들 때문에 어려운 조율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멋진 학교 현판을 만들었다. 그 현판은 지금 학교 건물 곳곳에 붙어 있다. 이처럼 우리 학교 아이들은 주인으로서 아름다운 학교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해마다 5~6학년 아이들이 만든 목공품으로 학교 곳곳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어 그늘에서 쉴 수 있다. 또 급식실이 있는 은행나무동과 교실이 있는 느티나무동을 잇는 나무 데크를 만들어 신발을 신지 않고 운동장 쪽으로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모두 아이들의 땀과 지혜로 학교 건물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구성원들이 좀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한 창조적 결과물이다. 때문에 아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우리의 삶이 풍요로운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으로 창조해 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머리로만 움직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수업은 누가 더 많이 머릿속에 넣고 있느냐, 누가 더 빨리 머리에 있는 것을 꺼내서 시험 문제를 잘 푸느냐에 달려 있다. 누가 얼마나 수학 시험을 잘 보느냐, 국어 시험에서 몇 개를 맞느냐에 따라 공부를 잘 한다 못 한다 판단을 내린다. 똑같은 시험 문제를 한 날 한 시에 보고 일렬로 줄을 세워 평가한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가 협력자이며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야 할 동지가 아니라, 이겨야 할 경쟁자로 자리매김 된다. 친구가 잘하면 내가 못하는 것이 되는 치열한 경쟁 구조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있다. 자기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구조는 지금, 우리의 학교 현장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서로를 도울 줄 모른다. 아니 돕는 것은 뒤처지는 일임을 암암리에 알게 만든다. 내가 도와서 친구가 잘 되면, 나는 그만큼 순위에서 밀려나는 데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 “요즘 애들은 자기만 알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아이들을 끊임없는 경쟁의 자리로 내몬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들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교육 구조는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기쁨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본성적으로 약한 것에 마음을 쏟는다. 자기들 자신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 여름과 가을, 두 번 실시하는 계절체험학습은 아이들의 본성을잘 살려내기 위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무언가 끊임없이 만들고 창조해 내는 아이들의 창조적 본성, 사람에게는 누구든 잘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고 배워 존중해 주는 모습, 어려운 일에 맞닿은 친구를 도와주는 마음, 공부를 놀이처럼 즐기는 아이들의 신명을 여러 가지 프로그램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려내고 키워주려 한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기들에게 감춰져 있던 고귀한 본성들을 회복하고 있다. 놀랍게도 학년이 낮을수록 아이들은 자기가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발단 단계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가정이나 유치원에서부터 이미 알게 모르게 한 줄로 세우는 경쟁의 삶을 몸으로 배우고 익힌 까닭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러니 예능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치며 히히덕거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암담한 기분이 들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들의 말은 우리 사회에 전반에 만연해 있는 삶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어찌 협력과 진정한 경쟁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몸 으 로 배 운 공 부 가 삶 에 녹 아 든 아 이 들
우리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며 배운 공부를 마음에 내면화시키고 삶의 토대로 쌓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으로 구체화시키고 재구성해 나간다. 책읽기나 글쓰기로 드러나는 문학교육-실은 우리 학교에서 실시하는 글쓰기나 책읽기를 문학교육이라 일컫는 것은 이 공부를 협소화시킬 우려가 있다. 글쓰기나 책읽기는 단지 문학교육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사고와 세계관을 형성하는 인문학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나 영화 만들기, 악기 배우기, 미술관 체험학습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방금 체험한 것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에 체험으로 배운 것을 내면에서 재구성하여 드러내기도 한다. 또 직접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책을 읽으며 낯선 세계와 교감하고 삶을 통찰하는 활동을 통해 내 경험을 구체화시키고 좀 더 폭넓게 확장시키려고 한다. 여러가지 체험학습을 한 뒤에 하는 이런 활동들은 학년별로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학년의 발달 특성에 맞게 재구성하여 연계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이 쓴글이나 그림을 보면 체험학습을 한 뒤 어린이의 앎의 정도와 마음 상태,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가치들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글쓰기와 책읽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그림책 읽어주기, 옛이야기 읽고 들려주기를 하고 있으며 아침시간과 교과수업시간을 이용하여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하고 있다. 우리가 책읽기나 글쓰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책읽기는 능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므로 사고력을 기르고 보편적 삶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또 초등학교의 모든 학습에서 기초가 되어 자기주도적인 학습력을 기르게 하며, 새로운 세계를 알고 기초지식을 얻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서를 함양하여 바르고 고운 인성을 기르며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책읽기가 이바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책읽기를 통해 문학적 체험이 삶에서 실천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학기 초 개개 학생의 독서 실태를 검토하고 분석한 뒤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방법을 모색한다. 아울러 학년별 연계와 위계를 살린 책읽기지도(우리는 학년별로 그림책 목록과 동화책 목록, 시 암송 자료 목록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가 이루어져 심층적인 체험의 세계를 좀 더 풍부하고 깊게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은 마음을 움직이는 가르침이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가치 있는 삶을 향해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갈 수 있도록 그저 곁에서 조력자 구실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와이 하야오는 말했다. “체험이나 경험은 지혜화하는 과정”이라고. 그런데 나는 여기에 보태고 싶다.
“체험이나 경험은 삶을 지혜롭게 하는 밑거름이며,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돛이 될 것이다.”
거산은 모든 교육 구성원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교육의 본질에 가닿는 활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앞에서 살펴본 우리 학교의 체험학습을 모든 학교, 모든 선생님들이 하기는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시험 성적으로 선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학교, 좀 더 창의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면 불만을 말하고 외면하는 학부모 때문에 나는, 우리 학교에서는 힘들다며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도 있다. 보기 좋은 그림의 떡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학교 전체의 문화로 만들기 어렵다면 교실에서 단 한 가지 활동만이라도 아이들이 몸으로 배우고 겪을 수 있는 체험학습을 계획하고 실천해 보라 말하고 싶다. 아이들은 현재에 살며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먼 미래를 살아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작은 구멍 하나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리자고 제안하고 싶다. 지금의 거산 교육활동 역시 처음부터 체계가 잡히고 환영 받은 일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싶다.
“이모, 거산학교 진달래꽃전 해 먹었어요?”
주말에 친정식구들이 모여 저녁을 먹을 때 고등학교 3학년이 된 조카가 느닷없이 묻는다.
“진달래꽃전?”
“이 맘 때면 진달래꽃전 해 먹잖아요? 산 빛깔이 연한 갈색으로 변하기 시작할 때쯤이면.”
“응, 지난주에. 근데 산 색깔만 봐도 진달래꽃이 필 때란 걸 알아?”
놀란 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묻자 녀석은 히죽 웃고 만다.
“쟤는 거산 졸업한 지가 언젠데, 가만히 있다가 난데없이 지금쯤은 냉이 캐서 국 끓여 먹겠다, 진달래꽃전 해 먹었겠다, 쑥떡 해 먹었겠다면서 줄줄이 읊는다니까. 지훈이 봄날은 아마도 거산 다니던 때였나 봐.”
옆에서 듣던 언니가 한 마디 거든다.
“어, 우리 조카가 때를 아는 구나! 사람이 때를 안다는 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일인데…….”
우리 학교는 산과 들, 냇가에 둘러싸인 산골 학교다. 아이들은 스스로 놀이를 찾아 산과 들을 누빈다. 그런데 기막히게도 풀이 무성해지면 절대로 산이나 풀숲에 들어가지 않는다. 가르치지 않아도 뱀이나 독충이 있는 철을 안다. 선배들의 놀이를 보며 자연스럽게 터득한 것이다. 또 하나 낯선 풀이나 열매를 보고 이름을 묻는 아이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처음 보는 풀이나 열매를 보면 “이거 먹어도 되는 거예요?”
라고 묻는다. 그런 아이들을 보며 선생들은 “우리 학교 애들은 왜 이름을 묻지 않고 먹어도 되느냐, 안되느냐를 묻지? 그런데 진정한 생태공부는 우리 아이들처럼 하는 것이 알짜배기가 아닐까?”하며 낄낄거리곤 했다. 풀 이름 몇 개, 꽃 이름 몇 개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어찌 보면 내가 먹어도 되느냐, 즉 나와 자연과의 관계를 명료하게 배우며 자연을 친밀하게 느끼는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우리 학교의 자연을 활용한 체험활동을 들여다보면 대부분이 먹고 사는 일과 관련된 것이다. 냉이 캐서 봄나물 비빔밥 해먹기부터 진달래꽃전, 쑥떡, 텃밭에 기르는 채소로 한솥밥 해먹기, 감자, 고구마 심고 캐기…. 일 년의 활동 모두가 먹고 사는 것을 기르고 가꾸는 일이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철 따라 자연에서 나오는 생명들을 내 몸의 에너지로 순환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아무리 진달래꽃전을 먹고 싶어도, 쑥떡을 빚어 먹고 싶어도 자연의 걸음걸이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배운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자연으로부터 배운다.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다만 자연의 걸음걸이로. 거산에 와서 내 몸에 배인 말이 있다면 ‘기다리자’이다. 조급한 아이들이나 학부모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기다려’이다. 나 역시 아이들과 함께 배우면서 터득한 것이 때가 있음을 아는 것이고,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삶의 지혜임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기다림을 무모한 낭비라 여기고 모두 ‘빠르게 빠르게’의 속도에 휘말린 채 살아지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빨리 빨리” 지금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언어이다. 언어는 그 시대의 사유체계이다. 언어 자체가 그 속에 그 시대의 생각이나 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여기저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속도’라는 말 역시 우리 시대의 사유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속도는 이미 전쟁이 되었다. 속도에서 뒤쳐진다는 것은 살아남지 못함을 의미하고 있다. 어떤 정보를 좀 더 빨리, 남보다 좀 더 빨리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외친다. 그 외침은 사람들을 초조하고 불안하게 한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거역하지 못하고 오히려 신성하게 떠받드는 이 ‘속도’ 때문에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삶이 즐거운가? 물어보아야 한다. 과연 우리 아이들에게도 여전히 남보다 빠르게, 그리고 뭐든 최대한 빨리 빨리를 외쳐대는 이 주문이 과연 우리 아이들 마음에 어떤 그림을 그려 놓는가? 탐색해야 한다.
거산초등학교에서 생태교육을 하게 된 밑바탕엔 ‘속도’에 대한 삶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이 있다.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상품이 아니다. 최대한 짧은 시간에 많은 물건을 생산하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자본주의의 상품이 될 수 없다. 그럼에도 효율과 능률을 앞세운 자본주의의 거대 논리에 묻혀 사람 역시 물건으로 취급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 광풍과도 같은 속도의 전쟁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 속에 속해 있는 존재다. 한번 둘러보자. 자연이 스스로의 법칙을 거스르며 속도를 위반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싹이 움돋아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시드는 그 숱한 시간을 철저히 지켜내지 않던가? 거쳐야 할 어떤 것도 건너뛰거나 시간을 앞당기지 않는 자연을 보면서 우리는 아이들의 삶이 그러해야 함을 절실히 깨닫는다. 과거 ‘기르는 문화’에 속한 사회에서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았다. 그러나 ‘만드는 문화’로 넘어 오면서 인간의 삶은 극도로 황폐해졌다. 신문이나 뉴스를 뒤덮는 각종 범죄와 전쟁은 ‘만드는 문화’의 시대에 훨씬 더 많아졌다. 이제는 속도가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지 않음을 안다. 그래서 때를 기다리는 것이 과거로 회귀를 꿈꾸는 이상주의자의 허황된 꿈이 아닌 삶의 순리임을 깨닫고, 지금 숨을 고르고 잠시 멈춰 서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아야 한다.
우리 학교의 생태체험교육은 아이들의 삶에서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하고 인내와 자연의 순리를 배우고 우리와 함께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배려하기 위한 공부이다. 자연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무자비한 속도의 전쟁을 과감히 거부한다. 빠르다는 것이 마치 미덕인 것처럼 여겨지는 사회에서 자연의 습성과 태도를 배운다는 것은 자칫 진부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정한 교육은 ‘만드는 문화’에서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기르는 문화’를 몸으로 겪으며 하나하나의 과정에서 배움을 얻고 결과를 얻기까지 인내하는 마음을 배우는 것이 참된 공부인 것이다. 봄에 씨감자를 잘라 땅에 묻고, 북을 주고 하얗게 핀 꽃을 보며 감자알이 굵어지길 기다리는 마음, 잘 영근 감자를 캐서 교실에서 친구들과 함께 쪄먹으며 결실을 나누는 마음, 모심기를 하며 밥이 우리 입으로 오기까지 여든 번의 손길을 거쳐야 함을 알며 밥 한 톨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과 태도가 자연스럽게 길러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지식을 머리로 배우는 것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직접 배우는 공부, 우리 둘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는 것임을 깨닫는 것 자체가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공부인 것이다.
창 조 와 협 력 의 기 쁨 을 배 우 는 아 이 들
계절체험학습-그림 하나
“야, 흙인데 뭐 어때? 잘못되면 이렇게 막 뭉개고 다시 하면 되는데….”
혜원이의 야무진 말이다. 뭐든 잘하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강한 미혜(가명)는 십 여분이 훌쩍 지나도록 흙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있다. 불안한 눈으로 여기저기 다른 애들을 쳐다보며 울음을 터뜨리기 일보직전이다. 그때 혜원이가 나선 것이다.
혜원이는 2학년이지만 아직 맞춤법과 읽기에 서툰 아이다. 수학 시간에는 받아올림과 받아내림이 쉽게 이해되지 않아 연신 “도와줘요, 누구 나 도와 줄 사람?”하고 소리를 친다. 그래서 교과 공부시간에 혜원이는 조금 자신 없는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름체험학습으로 배우고 있는 도예공부 시간에는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처럼 신이 나 있다.
“이렇게 손바닥으로 흙을 가늘게, 아니 흙을 너무 많이 뗐어. 요만큼.”
미혜는 혜원이의 말에 따라 고분고분 흙을 떼고, 손바닥을 펴서 가늘게 민다.
“잘했어. 그 다음엔 이렇게 흙을 동그랗게 말어서 하나씩 하나씩 올리면 돼.”
“여기가 이렇게 떨어지는 데. 흙끼리 잘 안 붙어.”
“어, 그럴 땐 손가락에 물을 쪼금 묻혀서 흙에다 살짝살짝 발러. 그러면 지들끼리 붙어.”
참 훌륭한 선생이다. 나는 혜원이 어디에 저런 모습이 숨겨져 있나 싶어 놀랐다. 미혜는 도예선생님이 가르쳐 줄 때보다 더 신중하게 혜원이 말을 듣고, 열심히 따라 한다. 흐뭇한 표정으로 빙그레 웃고 있는 데, 도예선생님이 내 어깨를 툭 친다.
“선생님, 입에 파리 들어가겠어요. 그렇게 좋아요?”
“우리 애들 너무 멋있지 않아요? 쟤, 저기 꼬마 선생하고 있는 애가 공부 시간에는 늘 기가 죽어 있는 애예요. 그런데 지금 저 앨 보고 누가 기죽은 애라 하겠어요. 어~우, 우리 애들 진짜 대단해요.”
끝없이 애들 자랑을 늘어놓는 날 보며 도예선생님이 깔깔 웃는다.
“선생님, 지금 자식 자랑하는 팔불출 같은 거 아세요? 근데 대단한 건 선생님이 팔 걷어붙이고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지 않고 기다려 주는 거예요. 여기 오는 어른들 대부분이 애들이 못하고 있으면 자기들이 후딱 해주거든요. 그리고 거산 애들도 확실히 달라요. 대부분 애들은 지들 것만 잘하려고 그러지 어려워하는 친구를 도와주지 않거든요. 보다 못해 우리가 서로 도와서 하라고 하면 싫은 내색을 하거나 왜 다른 사람 걸 해주냐며 짜증을 내곤 해요. 그런데 얘들은 말하지 않아도 저렇게 서로 돕는 걸 보면 학교에서 뭘 어떻게 배우는지 다 알 것 같아요.”
여름체험학습을 하는 5일 내내 혜원이는 미혜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을 도와주느라 몹시 바빴다. 그렇지만 나는 혜원이의 자신에 차 있는 말투와 뿌듯한 표정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계절체험학습-그림 둘
“뚝딱 뚝딱 뚝, 텅~텅~.”
장맛비가 그친 틈으로 한껏 달아올라 숨이 턱턱 막히는 날이다. 새로 지은 건물그늘에서 아이들이 망치질과 못질을 하느라 비지땀을 흘린다. 매년 여름체험학습으로 5, 6학년 아이들이 목공체험학습을 하는데 올해는 학교 건물을 목각으로 새기고, 의자와 그늘막이 될 만한 간이 원두막을 만들고 있다. 잰 몸놀림으로 일을 하는 아이 몇과 뒤편에서 게으름을 피우다 모둠 아이들에게 눈총을 샀던 아이 몇은 못이며 대패 같은 물건들을 날라주고 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는 일은 종종 더 많은 갈등을 일으키곤 한다. 대부분이 참여와 협력, 일의 분배 문제 때문이다. 사람 사는 곳, 어디에나 이런 풍경이 벌어진다. 모두 하나 같이 열심히 참여하면 좋으련만 모두가 똑같이 일하는 모습을 발견하긴 어렵다. 열심히 몸을 놀리는 아이들은 물론 짜증이 나는 일이다. 속이 상해서 친구에게 화를 내기도 하지만, 곧 그 애들에게 맞는 적합한 일거리를 찾아 나눠 주기도 한다. 목공 전문가가 아이들과 함께 계획한 대로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보며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동안, 선생님들은 모둠 아이들 사이에 일어난 갈등을 무마시키기 위해 몇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몸을 움직이는 일에 익숙한 우리 학교 아이들이지만, 어느 집단이든 꾀를 부리는 녀석이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선생님들은 꾸짖음과 다그침보다는 무엇이 문제인지 스스로 찾아보고 답을 찾아내길 기다린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제각각 능력과 마음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한다. 이렇듯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은 더디지만 귀한 배움의 시간이다.
무더위와 싸우며, 뒤에서 딴청을 피우는 친구들 때문에 어려운 조율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이들은 멋진 학교 현판을 만들었다. 그 현판은 지금 학교 건물 곳곳에 붙어 있다. 이처럼 우리 학교 아이들은 주인으로서 아름다운 학교를 만드는 데 큰 몫을 하고 있다. 해마다 5~6학년 아이들이 만든 목공품으로 학교 곳곳에 나무 의자가 놓여 있어 그늘에서 쉴 수 있다. 또 급식실이 있는 은행나무동과 교실이 있는 느티나무동을 잇는 나무 데크를 만들어 신발을 신지 않고 운동장 쪽으로 다닐 수 있게 하였다. 모두 아이들의 땀과 지혜로 학교 건물을 새롭게 변화시키고 구성원들이 좀 더 편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한 창조적 결과물이다. 때문에 아이들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우리의 삶이 풍요로운 것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손이 있기 때문이다. 머리로 생각한 것을 손으로 창조해 내기 때문에 인간의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은 머리로만 움직이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 교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수업은 누가 더 많이 머릿속에 넣고 있느냐, 누가 더 빨리 머리에 있는 것을 꺼내서 시험 문제를 잘 푸느냐에 달려 있다. 누가 얼마나 수학 시험을 잘 보느냐, 국어 시험에서 몇 개를 맞느냐에 따라 공부를 잘 한다 못 한다 판단을 내린다. 똑같은 시험 문제를 한 날 한 시에 보고 일렬로 줄을 세워 평가한다. 같은 교실에서 함께 공부하는 친구가 협력자이며 어려움을 함께 해결해야 할 동지가 아니라, 이겨야 할 경쟁자로 자리매김 된다. 친구가 잘하면 내가 못하는 것이 되는 치열한 경쟁 구조에 아이들을 밀어 넣고 있다. 자기가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고 좀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구조는 지금, 우리의 학교 현장 어디에도 없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서로를 도울 줄 모른다. 아니 돕는 것은 뒤처지는 일임을 암암리에 알게 만든다. 내가 도와서 친구가 잘 되면, 나는 그만큼 순위에서 밀려나는 데 누가 도우려 하겠는가? “요즘 애들은 자기만 알아.”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우리에겐 없다. 아이들을 끊임없는 경쟁의 자리로 내몬 우리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들을 탓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교육 구조는 손을 움직여 무언가를 만들고, 창조하는 기쁨을 허용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본성적으로 약한 것에 마음을 쏟는다. 자기들 자신이 약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에서 여름과 가을, 두 번 실시하는 계절체험학습은 아이들의 본성을잘 살려내기 위한 활동 가운데 하나이다. 무언가 끊임없이 만들고 창조해 내는 아이들의 창조적 본성, 사람에게는 누구든 잘하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몸으로 보고 배워 존중해 주는 모습, 어려운 일에 맞닿은 친구를 도와주는 마음, 공부를 놀이처럼 즐기는 아이들의 신명을 여러 가지 프로그램 속에서 자연스럽게 살려내고 키워주려 한다. 다행히도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자기들에게 감춰져 있던 고귀한 본성들을 회복하고 있다. 놀랍게도 학년이 낮을수록 아이들은 자기가 최고가 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물론 발단 단계의 특성일 수도 있지만, 가정이나 유치원에서부터 이미 알게 모르게 한 줄로 세우는 경쟁의 삶을 몸으로 배우고 익힌 까닭도 무시하기 어렵다. 그러니 예능프로그램에 나오는 연예인들이 “나만 아니면 돼!”라고 외치며 히히덕거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암담한 기분이 들고 등골이 서늘해진다. 그들의 말은 우리 사회에 전반에 만연해 있는 삶의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 아이들이 어찌 협력과 진정한 경쟁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몸 으 로 배 운 공 부 가 삶 에 녹 아 든 아 이 들
우리 아이들은 몸을 움직이며 배운 공부를 마음에 내면화시키고 삶의 토대로 쌓기 위해 여러 가지 활동으로 구체화시키고 재구성해 나간다. 책읽기나 글쓰기로 드러나는 문학교육-실은 우리 학교에서 실시하는 글쓰기나 책읽기를 문학교육이라 일컫는 것은 이 공부를 협소화시킬 우려가 있다. 글쓰기나 책읽기는 단지 문학교육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사고와 세계관을 형성하는 인문학적 기반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이나 영화 만들기, 악기 배우기, 미술관 체험학습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이런 활동으로 방금 체험한 것을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활동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에 체험으로 배운 것을 내면에서 재구성하여 드러내기도 한다. 또 직접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탐구하기 위해 책을 읽으며 낯선 세계와 교감하고 삶을 통찰하는 활동을 통해 내 경험을 구체화시키고 좀 더 폭넓게 확장시키려고 한다. 여러가지 체험학습을 한 뒤에 하는 이런 활동들은 학년별로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학년의 발달 특성에 맞게 재구성하여 연계가 이루어지도록 하고 있다. 아이들이 쓴글이나 그림을 보면 체험학습을 한 뒤 어린이의 앎의 정도와 마음 상태, 그리고 삶을 바라보는 가치들이 어떠한지 짐작할 수 있다.
우리가 실시하고 있는 글쓰기와 책읽기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그림책 읽어주기, 옛이야기 읽고 들려주기를 하고 있으며 아침시간과 교과수업시간을 이용하여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하고 있다. 우리가 책읽기나 글쓰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은 책읽기는 능동적 사고를 가능하게 하므로 사고력을 기르고 보편적 삶에 대한 이해를 갖게 하기 때문이다. 또 초등학교의 모든 학습에서 기초가 되어 자기주도적인 학습력을 기르게 하며, 새로운 세계를 알고 기초지식을 얻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정서를 함양하여 바르고 고운 인성을 기르며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를 갖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데 책읽기가 이바지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책읽기를 통해 문학적 체험이 삶에서 실천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학기 초 개개 학생의 독서 실태를 검토하고 분석한 뒤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방법을 모색한다. 아울러 학년별 연계와 위계를 살린 책읽기지도(우리는 학년별로 그림책 목록과 동화책 목록, 시 암송 자료 목록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가 이루어져 심층적인 체험의 세계를 좀 더 풍부하고 깊게 할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들이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이다. 몸으로 보여주는 교육은 마음을 움직이는 가르침이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이 가치 있는 삶을 향해 스스로를 단련시켜 나갈 수 있도록 그저 곁에서 조력자 구실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와이 하야오는 말했다. “체험이나 경험은 지혜화하는 과정”이라고. 그런데 나는 여기에 보태고 싶다.
“체험이나 경험은 삶을 지혜롭게 하는 밑거름이며, 그가 나아가고자 하는 삶의 돛이 될 것이다.”
거산은 모든 교육 구성원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교육의 본질에 가닿는 활동을 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 보니 앞에서 살펴본 우리 학교의 체험학습을 모든 학교, 모든 선생님들이 하기는 만만치 않다. 그래서 이 글을 읽는 많은 분들이 시험 성적으로 선생의 능력을 평가하는 학교, 좀 더 창의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려 하면 불만을 말하고 외면하는 학부모 때문에 나는, 우리 학교에서는 힘들다며 씁쓸한 입맛을 다실 수도 있다. 보기 좋은 그림의 떡이라 여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학교 전체의 문화로 만들기 어렵다면 교실에서 단 한 가지 활동만이라도 아이들이 몸으로 배우고 겪을 수 있는 체험학습을 계획하고 실천해 보라 말하고 싶다. 아이들은 현재에 살며 우리가 경험하지 않는 먼 미래를 살아갈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작은 구멍 하나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릴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떠올리자고 제안하고 싶다. 지금의 거산 교육활동 역시 처음부터 체계가 잡히고 환영 받은 일이 아니었음을 고백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