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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학교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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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1-25 14:13 조회 7,77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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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다로운 인문학 도서를 선정하고 교육 사례를 중심으로 사건의 본질을 벼리 잡을 수 있는 방법으로 시대의 위기를 재해석해 봅니다. 다각적으로 읽고 다변적으로 독해하는 숙고의 시간을 공유해 보겠습니다. 아픈 상처를 드러내 본질적인 치유의 방법을 고민하고 제시해 보겠습니다. “이론은 그 자체로 실천”이라는 들뢰즈의 격언을 끝까지 밀고 나아가 보겠습니다. 위기의 순간, 자신을 둘러싼 공포의 시간을 정확하게 꾈 수 있는 언어를 찾아 가겠습니다. 병원을 정확하게 알 때 질병은 치유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독자 분들의 많은 도움이 필요하겠습니다. 같이 고민해 주시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비판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제게도 글쓰기의 행위는 치유의 과정인 까닭입니다. 새로 공부하겠습니다. 제 안의 병을 치유한다는 각오로 교육의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석해 보겠습니다.

정치에 쫄지 말고, 경제에 속지 말고, 교육에 흔들리지 않을 당당함을 인문학을 통해 가속화해 봅니다.

–시인을 꿈꾸는 교육평론가 김준산 씀


학교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

김준산 원주 문막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시작하기 전 학교 폭력에 대한 심리학적 접근은 참 많습니다. 상담이 그 대표적인 사례지요. 독재 시절부터 너무 오랜 시간 노출된 학교폭력에 대한 배려(?)라는 측면에서 나쁘다고 말할 순 없겠네요. 하지만 심리학적 접근 방식은 보다 적극적인 폭력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기도 합니다. 심리학은 폭력의 문제를 부적응이란 개인적 문제로 돌려버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해서 학교폭력을 대하는 심리학적 접근을 넘어 보다 다각적인 측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학교폭력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란 무거운 제목을 붙여 봅니다. 지젝이란 걸출한 철학자의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참조했습니다. 어려운 책은 아니지만 난해한 방식으로 쓰여 있으니 찾아 읽으실 때는 두통과 울렁증을 염두에 두시길 권고 드립니다. 그렇다고 너무 얼 필요는 없답니다. 아무리 어려운 책도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얼개들이니까요. 그럼 본격적으로 ‘학교 폭력’에 대한 인문학적 접근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변에 상처받은 아이들이 있다면 그 아이들의 문제와 연결해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중에
어떤 것이 더 나쁠까요?

꽤 유명한 인질극이 있습니다. 1977년 2월 8일 미국의 소시민 엔소니 키리치스가 일으킨 사건입니다. 사건의 개요는 간단합니다. 자신이 거래하는 은행의 은행장이 어렵게 모은 자신의 돈을 갈취했다는 것입니다. 키리치스는 리처드 홀이라는 은행장이 자기뿐 아니라 은행과 거래하는 많은 사람들의 돈을 빼앗은 주범이며 이를 응징하기 위해 자신이 나섰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증거도 증인도 법률적인 근거도 없습니다. 키리치스가 가진 것은 오직 분노와 엽총뿐이었다지요. 은행장 리처드 홀의 몸을 전선으로 묶고 생중계되는 카메라를 응시하며 화끈한 인질극을 벌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영화 같은 행동에 관심을 보입니다. 미디어는 키리치스를 영웅처럼 미화하고 연신 특집 기사를 쏟아냅니다. 마침내 키리치스는 기자회견을 엽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미친 사나이의 헛소리처럼 회자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국민적 영웅이다. 잊지 마라.” 키리치스의 분노는 방향없는 대상을 향해 있었습니다. 왜 그는 자신을 국민적 영웅이라 말했을까요?

사건은 매우 심리학적인 법률 해석으로 끝이 납니다. “키리치스는 정신병을 앓고 있으니 지속적인 정신 치료를 받으라”는 권고로 갈무리되지요. 중죄가 아니라는 판결입니다. 살인교사이지만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죄를 짓지도 않았다는 것이 판결의 요점입니다. 시대의 인질극은 허무하게 마무리되지만, 키리치스의 근본적인 분노는 해석도 해결도 그 어떤 판결도 없었습니다.

사건을 벌이기 전 키리치스의 분노는 그의 말 속에 분명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자신이 국민적 영웅이라는 외설이 그것이지요. 자신을 국민적 영웅으로 착각한 그의 모습이 사건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열쇠입니다. 사건을 벌이기 전, 그는 자신의 분노를 다른 사람들도 공유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자본의 횡포에 재산을 날린 많은 사람들이 공조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겠지요. 기회의 평등을 이념으로 하지만 결코 평등하지 않다는 우리 시대의 이율배반적인 폭력을 폭로하고 싶었을 텁니다. 누구도 자신처럼 거대 자본을 가진 자본가의 이득을 위해 희생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촉발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것이 그가 결행한 살인교사의 동기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그 동기는 그가 벌인 환상적인 제스처(물리적 폭력)에 묻혀 버리고 대중들의 관심은 과격한 그의 문제 행동에만 집중합니다. 키리치스를 비난하는 여론이 증폭된 까닭입니다. 결국 그가 행한 물리적 폭력이 구조적 폭력에 분노했던 동기 자체를 삼켜버립니다. 사건은 정신 이상자의 폭력적 괴 행동으로 여론화되고, 키리치스의 분노는 그의 무죄 판결과 함께 사라져 버립니다. 사건을 요약하자면, ‘시대의 구조는 완벽합니다. 다만 한 정신 이상자에게 잠시 폭력을 허락했을 뿐이지요.’

아이들이 학교에서 벌이는 폭력 상황도 유사합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의 분노는 그 이유를 묻기 전에 물리적 폭력의 과격함 때문에 단죄로 몰립니다. 사회 구조적인 모순에 대한 분노는 그 이유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키리치스의 분노나 아이들의 분노나 동기를 드러내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더욱이, 분노하는 자는 언어적 표현 능력 또한 수려하지 못하지요. 방향을 잃어버린 분노가 과격함으로 이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키리치스의 판결처럼 분노의 원인이 정신이상 증세였다고 단순히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를 둘러싼 구조의 메커니즘은 완벽성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러나 아이들의 분노 또한 심리적 불안상태만이 그 원인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며, 그 모순을 정확하게 들여다 볼 수 없는 자신의 한계 언어적 한계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폭력에 대한 원인을 한 가지로 국한할 때 폭력에 대한 다각적인 시선은 사라집니다. 폭력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폭력의 원인 또한 다양하거든요.


폭력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은
이데올로기다
슬로베니아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폭력을 바라보는 이러한 관점을 ‘관용이라는 자유주의적 이념’이라고 말합니다. 그의 책 『폭력이란 무엇인가』를 보면 폭력의 본질에 대해 조금 더 명석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의 책에서 말한 교훈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 “폭력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쁜 것’으로 매도하는 것은 하나의 탁월한 이데올로기적 조작이다. 사회적 폭력이 가진 형식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신비화하는 것이다.”
둘. “진정으로 폭력적이 되는 것. 사회적 삶의 기본 변수를 폭력적으로 뒤흔드는 행위를 감행하는 것은 어렵다.”
셋.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이다. 폭력은 행위와 그 행위가 이루어진 맥락 사이에, 그리고 어떤 행동이 활동적인 것과 비활동적인 것 사이에도 퍼져 있다.”
–『폭력이란 무엇인가』(슬라보예 지젝, 난장이, 2011)

요컨대 폭력은 탈신비화돼야 합니다. 지젝에 의하면 폭력은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을 정확하게 사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는 폭력 그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맥락이 빠진 폭력은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입니다. 맥락 혹은 구조를 파악하지 않고 단도리 치는 폭력에 대한 판단은 그 자체로 난센스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이념의 관점일 뿐이지요. 중요한 것은 폭력 그 자체가 아니라 폭력의 효과며 폭력 그 이후입니다. 진정한 폭력에 눈을 뜨기 위해선 폭력이란 이데올로기를 해방시켜야 합니다.

학교에서 폭력적 상황이 되풀이될 때 교사들이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 인식은 여기에 있습니다. 아이들의 분노는 아이들이 받은 상처나 내면의 아픔만이 그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이지요. 아이들의 분노 중 상당수는 키리치스의 경우처럼 자신을 영웅이라고 착각할 때 발생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우울함이나 사회에 대한 분노 같은 것이지요. 민주와 평등을 이념으로 하지만 사실상 계급과 불평등이 농후한 사회에 대한 분노가 폭력의 원인일 수도 있습니다. 엄청난 폭력 후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아이들의 모습 또한 착각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표상하는 것이겠지요. 폭력을 행한 아이들은 자신을 영웅이라 확신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벗어날 수 없는 억압의 공간에서 자유의 분노를 외설할 수 있는 유일한 주체라고 자만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학교폭력의 상당수는 키리치스처럼 환상적인 제스처에서 끝이 납니다. 분노 자체가 그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아이들은 학교라는 벗어날 수 없는 피로 속에 너무 장시간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자유와 즐거움을 오랫동안 잃어버릴 때, 혹은 희망이 씨앗조차 보이지 않을 때 누구라도(주체) 그를 둘러싼 세계에 분노하게 됩니다. 은행장이었던 홀이 합법적으로 은행 돈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착복한 순간, 가난한 샐러리맨 키리치스의 희망은 사라졌습니다. 근면과 성실로 모아온 희망의 돈이 한 순간에 사라진 허무함이 몰려왔을 테지요.

사람은 자신을 둘러싼 구조적 폭력을 직감할 때 물리적 폭력은 총처럼 무섭고 우발적으로 발생됩니다.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권태와 피로가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임을 직감할 때 학교 폭력은 과격한 형태가 됩니다. 학교의 모순이 버거워 이탈하는 아이들이나 교사들의 이율배반을 참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구조적 폭력에 대한 분명한 분노가 있습니다. 돈을 뺏긴 아이가 돈을 뺏는 경우나, 맞았던 아이가 오히려 가혹하게 때리는 경우는 모두 이러한 분노의 증상입니다. 아이들이 가진 분노의 일차적 원인은 학교폭력이 노골적으로 일어나는데도 해결 자체가 어려운 학교의 구조적 모순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분노의 원인을 찾아주고 사회적 모순을 힘을 모아 해결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꾸준히 우린 학교폭력을 일으킨 학생 그 자체에만 집중합니다. 성적 신화에 지치고, 권위주의에 지치고, 무관심에 장시간 노출된 구조적 폭력은 사라집니다. 학교폭력 앞에 우리 모두가 공범인 이유입니다.


보이지 않는 폭력 속에
폭력의 본질이 있습니다
물리적 폭력은 폭력의 본질에 비해 매우 가볍습니다. 보이지 않는 폭력이 보이는 폭력보다 무섭지요. 가르치는 자들은 이 보이지 않는 구조적 악에 대해 통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젝은 우리 시대가 “필요하면 폭력을 쓰되, 폭력이 결코 합법적이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폭력이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르게 쓰인다는 말이지요. 유시민은 이와 같은 구조적 폭력을 “큰 고래만 빠져 나갈 수 있는 촘촘한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힘을 가진 고래는 폭력을 합법적으로 쓸 수 있지만, 작은 물고기들은 실수조차 범죄가 되어버리는 것이지요. 구조적 폭력이란 이런 것입니다. 사회에 내재되어 있는 근원적인 폭력입니다. 키리치스나 아이들의 이유 없는 반항은 이 구조적 폭력에 대한 직감입니다. “주체적 폭력과 구조적 폭력 사이의 복잡한 관계가 말해주는 교훈은 폭력이 어떤 행위의 직접적인 속성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폭력이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는 의미지요. 폭력을 총체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기실 우리 시대의 폭력은 물리적 폭력에만 너무 집중합니다. 하나를 보고 다른 하나를 놓치는 것을 흔히 이데올로기라고 하지요. 이데올로기란 한 측면을 보고 다른 측면을 보지 못하게 하는 이념입니다. 다른 하나는 은폐하고 조작합니다. 학교폭력의 이해 방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의 물리적인 폭력제스처만 집중하고 학교라는 구조가 가진 구조적 폭력성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우리가 목숨 안 걸 것에 목숨을 운운하고, 목숨 걸 것들에는 지질하게 도망 다니는 데는 우리 시대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이 정신지체 누나를 집단 성폭행한 사건이 이슈화된 적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야한 동영상을 흉내 냈다고 합니다. 해당 학교는 난리가 났지요. ‘성폭력 예방 교육이 얼마나 이루어졌는지, 학교폭력 실태를 학교 당국에서 정확하게 파악하고 예방적 차원에서 교육하고 있는지’ 철저히 조사했습니다. 매체는 연신 자극적인 기사를 내고 교육이 파국으로 가고 있다며, 아이들의 잘못된 성 인식에 원인을 쏟아냈습니다. 폭력의 제1 원인으로 스마트폰이 지적됐습니다. 학교에서 스마트폰 사용 금지를 합법화해야 한다는 서명운동도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은 마녀사냥을 당하듯 동네에서 격리되고 안개처럼 사라져 버렸습니다. 아이들이 사라진 학교는 특정한 아이들의 문제 때문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아이들의 법적 신변 처리 후 마치 사건이 없었던 듯 조용히 운영되고 있답니다. 그 후 다른 기사나 관심은 없었습니다. 물론 이 문제는 아이들의 잘못된 성 의식이 만들어낸 물리적, 주체적 폭력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잘못을 묻기 전에 살펴야 할 사항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성을 노출시킨 어른들의 탐욕이 그것이지요. 범행이 이루어진 장소는 부동산 경기 침체 때문에 부도난 모 건설회사의 아파트 건축 현장이었습니다. 그 현장은 몇 해 동안 버려져 흉물이 되어 있었지요. 현장 부근엔 은밀한 어둠이 깊게 배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 은밀한 장소로 몇 년 동안 어른들의 눈을 피해 은밀한 쾌락을 즐겼습니다. 담배도 피고, 술도 마셨겠지요. 술만 먹고 오면 아이들을 혼내주었던 아빠를 원망하며 따라하고 싶었을지도 모릅니다. 반복된 자극은 더 큰 자극을 부르고, 아이들은 조금씩 잘못된 어둠의 세계로 빠져들어 갑니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펴도 제재 없는 그곳에서 아이들은 조금 더 과감한 쾌락을 향해 질주합니다. 동네에서 친하게 지내던 20살의 장애우 누나와 어른들을 흉내 내고 싶었을 테지요. 옷을 벗고 야한 동영상을 따라합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나 봅니다. 한 아이가 먼저 하고 다른 아이가 따라합니다. 이렇게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한 아이들은 누나와 간식을 먹고 헤어집니다.

다음날 정신지체 장애우 누나는 아주 천연덕스럽게 자기와 오랜 시간 상담을 해 준 시민운동가에게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성에 대한 의식이 발달할 수 없었던 누나에게 다행스럽게도 트라우마는 없었습니다. 성에 대한 죄책감이나 여타의 윤리의식도 없었습니다. 다만 아이들과의 관계 후 생식기가 많이 아팠다고 합니다. 하지만 시민운동가는 분노에 사로잡혔습니다. 장애우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자괴감도 컸을 텁니다. 언론에 고발하고 교육청에 신고합니다. 극악무도한 초등학생의 추태란 프레임이 만들어지고 사건은 떠들썩 해집니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공사 현장에 몇 년 동안 방치되어 나쁜 어른들의 쾌락을 흉내 내고, 지방 소도시의 경제적 불황이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구조적 폭력인데 말이지요. 미성년자인지라 구속수사나 형벌을 내릴 수 없었답니다. 때문에 아이들에 대한 법률을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됩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 아이들 또한 피해자입니다. 불쌍한 아이들이지요. 초등학교부터 자기들끼리 즐거움을 찾아야 했던 아이들의 뒷모습을 상상해 보세요. 매일매일 놀아줄 상대를 찾아다니는 그 비굴함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어른이라면 아이들이 방치되는 것을 방기해서는 안 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먹고 살기 바쁜 우리는 아이들이 PC방에서 영혼을 썩히고 있을 때, 공사판에서 나쁜 어른들의 욕망을 흉내 내고 있을 때 무관심하게 내 자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렇게 버려두고 있었습니다.

폭력은 탈신비화돼야 합니다. 폭력은 다각적입니다. 폭력은 현상 그 자체로만 이해할 수 없는 복합적 메커니즘들의 징후입니다. 학교폭력이 문제화될수록 자극적 사례를 찾아 그 사례를 가지고 예방교육에 힘 쓸 때가 아니라 폭력이 가지고 있는 다각적 문제를 성찰해야 합니다. 폭력은 우리들을 바보로 만들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구조입니다. 물리적 폭력은 구조적 폭력에 비해 가볍다 못해 단지 교통사고처럼 일회적인 자극일 뿐입니다. 물론 물리적 폭력 자체가 폭력이 아니라는 사실은 아닙니다. 물리적 폭력의 양적, 질적 효과가 그 수위를 넘어섰을 때, 우린 그 폭력을 직시하고 폭력 자체를 의심해 봐야 한다는 주장이지요. 물리적 폭력의 스펙터클 때문에 구조적 폭력의 난폭성이 보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학교폭력의 안녕을 위해 싸워야 할 적은 거대하며 싸워야 하는 건 우리 모두의 몫입니다. 학교폭력을 저지른 나쁜 학생들만의 잘못은 아니지요. 어른이라면, 희망을 쓸 아이들에게 정직하게 말해야 합니다. 방치된 구조를 물려 준 우리들의 잘못이 더 크다고 말이지요. 언제나 아이들은 어른들의 거울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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