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활용수업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말할 수 없는 것들의 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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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3-10 21:42 조회 7,701회 댓글 0건본문
김준산 원주 문막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1. 용들은 용들만의
규칙이 따로 있다
용 두 마리를 키우며 삽니다. ‘미르’라는 남자 아이와 ‘미리’라는 여자 아이지요. ‘미르’와 ‘미리’는 우리말로 용을 뜻합니다. ‘상상’을 숭배하며 살라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두 마리 용들은 별난 놀이를 좋아합니다. 가끔은 외계에서 온 존재들의 대화 같기도 합니다. 가만히 지켜봅니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문법이 제각각입니다. 오늘은 공룡 놀이 중입니다. “타르보사우르스와 티라노사우르스가 싸우면 티라노사우르스가 이긴다.”라는 명제가 논쟁 주제입니다. 이유를 들어봅니다. 티라노사우르스는 빨갛고 타르보사우르스는 파랗기 때문이랍니다. 첫째 용이 주장하고 둘째 용이 수긍합니다. 둘째 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어쩐지 빨간색이 더 쎄더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빨간색이 파란색보다 강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해하려 노력해도 답이 없습니다. 다시 지켜보니, 근거가 재밌습니다. 첫째 용이 말합니다. “소방차와 경찰차 중에 빨간 차는 소방차고 소방차가 더 크고 더 쎄.” 역시 상상의 동물 ‘미르’와 ‘미리’입니다. 소방차와 경찰차의 크기 비교를 통해 공룡의 크기를 유추하는 센스. 누가 지었는지 이름 참 잘 지었습니다.
곱씹어 생각해도 아이들의 판단은 오류입니다. 논리학에서 말한 범주의 오류이지요. 범주의 조건이 다른 대상을 비교하며 만들어지는 오류입니다. 크기와 색깔은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오류를 지적하고 가르칩니다.
“경찰차와 소방차의 색깔과 크기는 관계없어요.”
“빨간색이라고 다 큰 건 아니란다.”
큰 용이 말합니다.
“소방서가 파출소보다 크잖아.”
“그러니까 빨간 티라노사우르스가 파란 타르보사우르스보다 크지.”
작은 용이 또 고개를 끄덕입니다.
“맞아, 오빠는 역시 똑똑해.”
두 마리 용들의 논쟁을 설득시킬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마치 놀이에서 진 느낌입니다. 맞습니다. 졌습니다. 저는 용들의 놀이에서 완벽하게 졌습니다. 용들은 그들만의 놀이 규칙을 만들었고 저는 그 규칙 속에서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빨간 것은 크고, 파란 것은 작다는 놀이 규칙. 관찰해 보면, 빨간 것이 파란 것보다 큰 것이 저희 집엔 참 많습니다. 빨간 소파가 파란 의자보다 크고, 빨간 베개가 파란 베개보다 큽니다. 빨간 장난감 소방차는 파란 장난감 경찰차보다 무지 큽니다.
아이들은 귀납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유추하여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때문에 어른들의 규칙은 아이들 사이에 통용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이 쓰는 ‘언어 규칙’의 세계니까 말이지요. 재밌는 점은,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아이들은 공유하고 소통하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겐 틀린 규칙이 아이들에겐 맞는 규칙이고, 소통의 방식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용들만의 규칙은 단단합니다. 틀렸다는 지적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규칙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확장시킵니다. 논리의 연쇄작용이 이뤄지고 자발적인 학습 또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세계에 끼어들지 말라고 투쟁 중입니다. 오히려 아빠가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핀잔하기까지 합니다.
2. 언어는
다양한 게임이다
20세기 가장 문제적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서 “언어는 놀이다. 언어는 그 문맥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언어가 놀이라는 것은 언어의 규칙은 매우 다양하다는 의미입니다. 축구의 규칙과 배구의 규칙이 다르듯, 세계엔 다양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로 놀이화되어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용들의 규칙은 어른들에게 낯설지만, 아이들에겐 친숙한 세상입니다. ‘언어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옳다면, 아이들은 존재의 집을 스스로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아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류투성이의 단순한 세계이지만 무시할 순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언어의 세계가 단순하다고 해서 야만적일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복잡한 세계가 옳고 단순한 세계가 틀리다는 것은 오만과 편견이지요. 야구가 축구보다 규칙이 복잡하다고 해서 우등한 스포츠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인간만이 언어를 쓰는 우등한 존재라는 오만이 야만이며, 우리는 그 야만이 반복되는 비극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은 생각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지배하는 언어의 규칙들이 생각을 구조화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엔 넌센스였습니다. 생각의 명증이 존재의 명증을 만들어 내지 못하니까요. 또한 생각의 우월은 역사적으로 빈번히 삶의 우월과 차별과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의 언어 규칙을 무시하면 아이들은 어른들의 규칙을 그대로 답습하며 규칙을 만드는 그 ‘상상의 재미’를 맛볼 수 없습니다. 언어는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규칙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재미를 잃은 아이들에게 학습은 무기력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상상력만큼 중요한 배움의 동기는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아이들의 학습은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을 귀납적으로 용인해야 합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 철학인 『논리철학 논고』를 쓸 때만 해도 이러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어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면 철학적인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 그의 주장은 시대의 폭풍이었고, 비트겐슈타인 또한 철학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자부하고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서부터 그의 철학은 수정됩니다.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자신의 철학적 정당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말하기 위해 복잡한 논리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요. 다양한 사례와 천재적인 논증 방식을 그대로 전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시골에서 만들어낸 그들만의 ‘언어 놀이’로 소통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명제의 탐구나 논리의 중요성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동물처럼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아이들을 가혹하게 체벌했습니다.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그의 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가 교사를 그만두는 시점에서 그의 철학은 적극적으로 수정됩니다.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 천재였지만, 그의 철학은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을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근본부터 고치기 시작합니다.
언어란 마치 세상에 대한 복사물처럼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그림과 같은 것도 아니고, 세상의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물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언어는 ‘정적인 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체계’며 ‘언어 놀이’에 참여하는 무수한 활동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다양한 양식들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생들에게 한 수 제대로 배운 것이지요. ‘언어 게임’이 다양한 만큼 존재의 양식도 다양합니다. 철학은 그 다양한 양식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적극적인 활동이 돼야 합니다.
3. 일반성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수정된 그의 후기 철학을 시작하는 『철학적 탐구』 서문에서 오만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쓸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은 언제나 단지 철학적 소견으로서만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 만일 내가 나의 사고들을 그 자연스러운 경향에 반하여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더 강요한다면 나의 사고들은 곧 절름발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 그런데 이것은 물론 탐구 자체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광대한 사고 영역을 종횡무진으로, 모든 방향으로 편력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 이 책의 철학적 소견들은 말하자면 이 길고 얽히고설킨 여행에서 생겨난 다수의 풍경 스케치들이다.
기쁨과 고통, 즐거움과 슬픔과 같은 우리의 행위는 단순한 육체적 동작이나 움직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의미와 사유, 감정, 의지 등으로 물들어 있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은 특정한 양식을 기반으로 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가령, 기대하고, 의도하고, 기억하는 것과 같은 행위들이 언어의 사용이라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기반으로 해서 가능한 행위이듯이.
흔히 비트겐슈타인을 철학계의 암적인 존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급진적인 철학 세계는 철학 자체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픔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의 철학은 그의 윤리 그 자체입니다. 위대한 천재라고 칭송받는 대가의 겸손이 그의 서문에서 깊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학은 ‘다수의 풍경 스케치’에 불과합니다. 다수의 풍경은 다수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균형이지요. 다양화의 존중은 세상살이의 상식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이론은 꼭 한 그릇의 일반화로 강요하고 싶어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일반화에 대한 욕망’이라고 불렀지요. 철학자뿐만 아니라 범인들의 상식 또한 특수한 규칙은 특수한 상황에만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사한 것을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지점입니다. 이러한 일반화에 대한 욕망이 철학을 더럽히고 삶을 괴롭힙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을 고치기 위해 “철학은 완전히 단순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다양한 존재들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가 단순하다고 해서 거기에 도착하는 방법 또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결과는 과정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단순한 선언서라고 해도 그 결과의 경중을 그대로 답습할 때 삶에 변화는 누그러들고 우리는 또다시 지나친 회의주의자가 됩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그의 책 제목처럼 ‘탐구’를 결행하는 것입니다. 결과의 단순함을 알면서도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는 각오 같은 것이지요. 이러한 각오를 ‘윤리’라고 부릅니다.
4. 맥락을 오해하는 행위는
존재를 오해하는 행위
맥락이 문제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됩니다. 상황도 맥락의 중요한 요소지요.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의 다양화’라고 했습니다. 예컨대 색채의 문법이 있고, 소리의 문법이 있고 숫자의 문법이 있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이 있고, 어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문법으로 통일시키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폭력은 단 하나의 문법만을 고집하는 행위지요.
물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오해의 뿌리를 유일하게 뽑을 수 있는 무기는 날카로운 논리입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말해버리면 안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요. 쉽게 판단되지 않는 행위는 말함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들은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말함에도 윤리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세요. 침묵의 무게감은 논리의 예리함을 이깁니다.”
언어는 그 시대의 문맥입니다. 사회의 발견은 그 사회가 사용하는 ‘언어 놀이’의 발견이지요. ‘언어 놀이’는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 어린이가 학습을 통하여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 전체를 포괄합니다.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일상 언어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용법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맥락을 오해하는 행위는 존재를 착각하는 행위입니다.
두 마리 용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빨간 것은 크고, 파란 것은 작다.”라는 아이들의 명제는 아이들이 만들어낸 ‘언어 놀이’입니다. 그 놀이는 다른 게임에게도 적용됩니다. 비슷한 크기의 공룡의 무게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옷을 고를 때도 적용됩니다. 만약 아이들이 사용하는 그 명제의 잘못을 이리 지적하고 섣불리 고치려고 했다면, 아이들은 보다 큰 언어 게임을 발굴해 내지 못했을 것이고 게임 자체를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규칙을 논리적으로 만드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상의 다양한 규칙을 학습합니다. 자신의 규칙이 더 이상 유사한 다른 규칙과 접속하지 못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수정하고 보다 완벽한 ‘언어 놀이’를 진행합니다. 이것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학습의 시작입니다.
5. 존재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철학은?
반복합니다. 존재의 크기는 그 존재가 가진 ‘언어 놀이’의 가짓수입니다. 많은 놀이의 규칙을 가진 존재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많이 본다고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많은 규칙을 탐구하면서 많은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여행이 꼭 배움을 주는 것이 아님은 이 때문입니다.
기실 언어는 매우 능동적인 삶의 활동입니다. 우리가 언어의 규칙을 다양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선 다양한 언어 놀이에 참여하면서 단어와 문장들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사용되는가를 직접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린 다양한 존재들을 경험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들일수록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톨스토이는 특히 아이들에게 성실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거짓에 길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말이지요. 그의 주장에 덧붙여 저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주장합니다. 아이들을 성실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규칙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하는 정신을 길러야 합니다.
“어릴 때는 다 그런 거야.”라거나, “아이들은 시대의 희망이야.”라는 신비적인 태도만으로 아이들에게 희생하는 것만이 최선의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쓰는 ‘언어 놀이’를 높게 평가하고 그 규칙을 관찰하며 잘못된 규칙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관찰하고, 그 규칙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 전에 공부를 통해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아이들의 ‘언어 게임’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언어 게임’의 전체적인 체계나 맥락을 이해해야만 아이들의 본디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 용들은 용들만의
규칙이 따로 있다
용 두 마리를 키우며 삽니다. ‘미르’라는 남자 아이와 ‘미리’라는 여자 아이지요. ‘미르’와 ‘미리’는 우리말로 용을 뜻합니다. ‘상상’을 숭배하며 살라는 의미로 지었습니다.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두 마리 용들은 별난 놀이를 좋아합니다. 가끔은 외계에서 온 존재들의 대화 같기도 합니다. 가만히 지켜봅니다. 주고받는 대화 속에 문법이 제각각입니다. 오늘은 공룡 놀이 중입니다. “타르보사우르스와 티라노사우르스가 싸우면 티라노사우르스가 이긴다.”라는 명제가 논쟁 주제입니다. 이유를 들어봅니다. 티라노사우르스는 빨갛고 타르보사우르스는 파랗기 때문이랍니다. 첫째 용이 주장하고 둘째 용이 수긍합니다. 둘째 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 그렇구나, 어쩐지 빨간색이 더 쎄더라.”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빨간색이 파란색보다 강한 이유가 있을까요? 이해하려 노력해도 답이 없습니다. 다시 지켜보니, 근거가 재밌습니다. 첫째 용이 말합니다. “소방차와 경찰차 중에 빨간 차는 소방차고 소방차가 더 크고 더 쎄.” 역시 상상의 동물 ‘미르’와 ‘미리’입니다. 소방차와 경찰차의 크기 비교를 통해 공룡의 크기를 유추하는 센스. 누가 지었는지 이름 참 잘 지었습니다.
곱씹어 생각해도 아이들의 판단은 오류입니다. 논리학에서 말한 범주의 오류이지요. 범주의 조건이 다른 대상을 비교하며 만들어지는 오류입니다. 크기와 색깔은 범주가 다르기 때문에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아이들이 알지 못했던 것이겠지요. 오류를 지적하고 가르칩니다.
“경찰차와 소방차의 색깔과 크기는 관계없어요.”
“빨간색이라고 다 큰 건 아니란다.”
큰 용이 말합니다.
“소방서가 파출소보다 크잖아.”
“그러니까 빨간 티라노사우르스가 파란 타르보사우르스보다 크지.”
작은 용이 또 고개를 끄덕입니다.
“맞아, 오빠는 역시 똑똑해.”
두 마리 용들의 논쟁을 설득시킬 능력이 제겐 없습니다. 마치 놀이에서 진 느낌입니다. 맞습니다. 졌습니다. 저는 용들의 놀이에서 완벽하게 졌습니다. 용들은 그들만의 놀이 규칙을 만들었고 저는 그 규칙 속에서 이길 수가 없으니까요. 빨간 것은 크고, 파란 것은 작다는 놀이 규칙. 관찰해 보면, 빨간 것이 파란 것보다 큰 것이 저희 집엔 참 많습니다. 빨간 소파가 파란 의자보다 크고, 빨간 베개가 파란 베개보다 큽니다. 빨간 장난감 소방차는 파란 장난감 경찰차보다 무지 큽니다.
아이들은 귀납적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는 물건들을 유추하여 자신만의 규칙을 만들어 낸 것이지요. 때문에 어른들의 규칙은 아이들 사이에 통용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세계는 아이들이 쓰는 ‘언어 규칙’의 세계니까 말이지요. 재밌는 점은, 저는 이해할 수 없는 규칙을 아이들은 공유하고 소통하고 즐거워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겐 틀린 규칙이 아이들에겐 맞는 규칙이고, 소통의 방식으로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습니다.
용들만의 규칙은 단단합니다. 틀렸다는 지적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자신들이 만들어낸 규칙을 나름대로 발전시키고 확장시킵니다. 논리의 연쇄작용이 이뤄지고 자발적인 학습 또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의 세계에 끼어들지 말라고 투쟁 중입니다. 오히려 아빠가 이해력이 부족하다고 핀잔하기까지 합니다.
2. 언어는
다양한 게임이다
20세기 가장 문제적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라는 책에서 “언어는 놀이다. 언어는 그 문맥에 따라 쓰임이 다르다.”라고 했습니다. 언어가 놀이라는 것은 언어의 규칙은 매우 다양하다는 의미입니다. 축구의 규칙과 배구의 규칙이 다르듯, 세계엔 다양한 규칙이 있고 그 규칙들은 나름대로의 의미로 놀이화되어 작용한다는 것이지요.
용들의 규칙은 어른들에게 낯설지만, 아이들에겐 친숙한 세상입니다. ‘언어의 세계’가 ‘존재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 옳다면, 아이들은 존재의 집을 스스로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은 자신의 언어로 자아의 세계를 창조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오류투성이의 단순한 세계이지만 무시할 순 없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또한 언어의 세계가 단순하다고 해서 야만적일 수 없다고 지적합니다. 복잡한 세계가 옳고 단순한 세계가 틀리다는 것은 오만과 편견이지요. 야구가 축구보다 규칙이 복잡하다고 해서 우등한 스포츠가 아니니까요. 오히려 인간만이 언어를 쓰는 우등한 존재라는 오만이 야만이며, 우리는 그 야만이 반복되는 비극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을 이렇게 말합니다. “동물은 생각이 없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냥 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생각이 삶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지배하는 언어의 규칙들이 생각을 구조화합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엔 넌센스였습니다. 생각의 명증이 존재의 명증을 만들어 내지 못하니까요. 또한 생각의 우월은 역사적으로 빈번히 삶의 우월과 차별과 갈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아이들의 언어 규칙을 무시하면 아이들은 어른들의 규칙을 그대로 답습하며 규칙을 만드는 그 ‘상상의 재미’를 맛볼 수 없습니다. 언어는 하나의 적극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규칙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재미를 잃은 아이들에게 학습은 무기력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상상력만큼 중요한 배움의 동기는 없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아이들의 학습은 아이들 스스로 만들어낸 규칙을 귀납적으로 용인해야 합니다. 사실 비트겐슈타인이 전기 철학인 『논리철학 논고』를 쓸 때만 해도 이러한 사실을 몰랐습니다. 언어의 한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면 철학적인 문제는 모두 해결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 그의 주장은 시대의 폭풍이었고, 비트겐슈타인 또한 철학의 임무가 끝났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철학의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자부하고 시골 마을의 초등학교 교사가 되면서부터 그의 철학은 수정됩니다.
그는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자신의 철학적 정당성을 아이들에게 가르칩니다. 말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 말하기 위해 복잡한 논리학을 아이들에게 강요하지요. 다양한 사례와 천재적인 논증 방식을 그대로 전수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시골 아이들은 시골에서 만들어낸 그들만의 ‘언어 놀이’로 소통하고 싶어 했으니까요. 명제의 탐구나 논리의 중요성은 관심도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문제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위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것이면 충분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이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동물처럼 열등한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아이들을 가혹하게 체벌했습니다.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못했으며, 그의 교사 생활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가 교사를 그만두는 시점에서 그의 철학은 적극적으로 수정됩니다. 철학의 종언을 선언한 천재였지만, 그의 철학은 완벽할 수 없다는 생각을 스스로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근본부터 고치기 시작합니다.
언어란 마치 세상에 대한 복사물처럼 세상의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는 그림과 같은 것도 아니고, 세상의 사물을 가리키는 지시물도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컨대 언어는 ‘정적인 체계가 아니라 역동적인 체계’며 ‘언어 놀이’에 참여하는 무수한 활동들을 가능하게 해 주는 다양한 양식들입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초등학생들에게 한 수 제대로 배운 것이지요. ‘언어 게임’이 다양한 만큼 존재의 양식도 다양합니다. 철학은 그 다양한 양식들을 탐구하고 이해하는 적극적인 활동이 돼야 합니다.
3. 일반성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적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수정된 그의 후기 철학을 시작하는 『철학적 탐구』 서문에서 오만했던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쓸 수 있었던 최선의 것은 언제나 단지 철학적 소견으로서만 남아 있을 것이라는 것, 만일 내가 나의 사고들을 그 자연스러운 경향에 반하여 어떤 하나의 방향으로 더 강요한다면 나의 사고들은 곧 절름발이가 될 것이라는 것을. — 그런데 이것은 물론 탐구 자체의 본성과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탐구는 우리로 하여금 광대한 사고 영역을 종횡무진으로, 모든 방향으로 편력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 이 책의 철학적 소견들은 말하자면 이 길고 얽히고설킨 여행에서 생겨난 다수의 풍경 스케치들이다.
기쁨과 고통, 즐거움과 슬픔과 같은 우리의 행위는 단순한 육체적 동작이나 움직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의미와 사유, 감정, 의지 등으로 물들어 있으며, 이러한 모든 것들은 특정한 양식을 기반으로 해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가령, 기대하고, 의도하고, 기억하는 것과 같은 행위들이 언어의 사용이라는 특정한 삶의 양식을 기반으로 해서 가능한 행위이듯이.
흔히 비트겐슈타인을 철학계의 암적인 존재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의 급진적인 철학 세계는 철학 자체의 모순을 그대로 드러내는 아픔입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의 철학은 그의 윤리 그 자체입니다. 위대한 천재라고 칭송받는 대가의 겸손이 그의 서문에서 깊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의 철학은 ‘다수의 풍경 스케치’에 불과합니다. 다수의 풍경은 다수이기 때문에 의미 있는 균형이지요. 다양화의 존중은 세상살이의 상식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철학의 출발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하나의 이론은 꼭 한 그릇의 일반화로 강요하고 싶어 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를 ‘일반화에 대한 욕망’이라고 불렀지요. 철학자뿐만 아니라 범인들의 상식 또한 특수한 규칙은 특수한 상황에만 적용하려 하지 않습니다. 유사한 것을 같은 것이라고 착각하는 지점입니다. 이러한 일반화에 대한 욕망이 철학을 더럽히고 삶을 괴롭힙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와 같은 잘못된 인식을 고치기 위해 “철학은 완전히 단순해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다양한 존재들의 방식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그 결과가 단순하다고 해서 거기에 도착하는 방법 또한 그럴 수는 없습니다. 결과는 과정을 가르쳐 주지 않으니까요. 아무리 단순한 선언서라고 해도 그 결과의 경중을 그대로 답습할 때 삶에 변화는 누그러들고 우리는 또다시 지나친 회의주의자가 됩니다. 이를 극복하는 길은 그의 책 제목처럼 ‘탐구’를 결행하는 것입니다. 결과의 단순함을 알면서도 그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실험하는 각오 같은 것이지요. 이러한 각오를 ‘윤리’라고 부릅니다.
4. 맥락을 오해하는 행위는
존재를 오해하는 행위
맥락이 문제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이해됩니다. 상황도 맥락의 중요한 요소지요. 이것을 비트겐슈타인은 ‘문법의 다양화’라고 했습니다. 예컨대 색채의 문법이 있고, 소리의 문법이 있고 숫자의 문법이 있는 것이지요. 아이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이 있고, 어른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문법이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의 문법으로 통일시키려고 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폭력은 단 하나의 문법만을 고집하는 행위지요.
물론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오해의 뿌리를 유일하게 뽑을 수 있는 무기는 날카로운 논리입니다. 하지만 말할 수 없는 것까지 말해버리면 안됩니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은 판단을 유보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지요. 쉽게 판단되지 않는 행위는 말함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말할 수 없는 것들은 판단을 유보해야 합니다. 말함에도 윤리가 있습니다. 요약하면 이렇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말할 수 없는 것엔 침묵하세요. 침묵의 무게감은 논리의 예리함을 이깁니다.”
언어는 그 시대의 문맥입니다. 사회의 발견은 그 사회가 사용하는 ‘언어 놀이’의 발견이지요. ‘언어 놀이’는 단순한 형태에서 복잡한 형태에 이르는 다양한 언어, 어린이가 학습을 통하여 모국어를 배우는 과정, 인간의 의사소통 행위 전체를 포괄합니다. “문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은 일상 언어가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나는 다양한 용법을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따라서 맥락을 오해하는 행위는 존재를 착각하는 행위입니다.
두 마리 용의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겠습니다. “빨간 것은 크고, 파란 것은 작다.”라는 아이들의 명제는 아이들이 만들어낸 ‘언어 놀이’입니다. 그 놀이는 다른 게임에게도 적용됩니다. 비슷한 크기의 공룡의 무게를 가늠하는 척도로 작용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옷을 고를 때도 적용됩니다. 만약 아이들이 사용하는 그 명제의 잘못을 이리 지적하고 섣불리 고치려고 했다면, 아이들은 보다 큰 언어 게임을 발굴해 내지 못했을 것이고 게임 자체를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아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논리적으로 맞는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규칙을 논리적으로 만드는 적극적인 행위입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세상의 다양한 규칙을 학습합니다. 자신의 규칙이 더 이상 유사한 다른 규칙과 접속하지 못할 때가 되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신의 규칙을 수정하고 보다 완벽한 ‘언어 놀이’를 진행합니다. 이것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학습의 시작입니다.
5. 존재의 크기를 키우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철학은?
반복합니다. 존재의 크기는 그 존재가 가진 ‘언어 놀이’의 가짓수입니다. 많은 놀이의 규칙을 가진 존재는 다양한 세계를 경험합니다. 많이 본다고 많이 배우는 것이 아니라 많은 규칙을 탐구하면서 많은 세상을 살 수 있는 것이지요. 여행이 꼭 배움을 주는 것이 아님은 이 때문입니다.
기실 언어는 매우 능동적인 삶의 활동입니다. 우리가 언어의 규칙을 다양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살아간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삶을 풍요롭게 하기 위해선 다양한 언어 놀이에 참여하면서 단어와 문장들의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사용되는가를 직접 부딪쳐 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우린 다양한 존재들을 경험하고 탐구해야 합니다. 나와 완전히 다른 존재들일수록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른들보다 훌륭한 스승이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톨스토이는 특히 아이들에게 성실하게 대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이 거짓에 길들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말이지요. 그의 주장에 덧붙여 저는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라고 주장합니다. 아이들을 성실하고 따뜻하게 대하는 태도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규칙을 치밀하게 관찰하고 탐구하는 정신을 길러야 합니다.
“어릴 때는 다 그런 거야.”라거나, “아이들은 시대의 희망이야.”라는 신비적인 태도만으로 아이들에게 희생하는 것만이 최선의 교육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쓰는 ‘언어 놀이’를 높게 평가하고 그 규칙을 관찰하며 잘못된 규칙으로 나아가지 않도록 관찰하고, 그 규칙의 본질을 탐구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 전에 공부를 통해 다양한 맥락에서 다양한 의미로 해석되는 아이들의 ‘언어 게임’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언어 게임’의 전체적인 체계나 맥락을 이해해야만 아이들의 본디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