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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나는 다른 아이들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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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12-20 04:05 조회 7,156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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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산 원주 문막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1.
비가 유난합니다. 학교에선 비가 내리면 실내가 유독 시끄럽습니다. 운동장에 나갈 아이들이 실내에서 욕구를 풀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의 소란은 수업을 방해하고, 교사들의 쉬는 시간까지 앗아갑니다. 우선은 참습니다. 참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믿어 봅니다. 하지만 인내의 임계점은 서둘러 옵니다. 소리를 지릅니다. “조용히 해.” 다가가서 협박도 해 봅니다. “말로 할 때 들어라, 혼난다.” 조용히 앉아 고상하게 공부하고 쉬는 시간이 되면 공부한 내용을 사색하고 안정 있게 쉬면 좋으련만, 교양 있는(?) 저와는 달라도 한참 다릅니다. 진한 에스프레소 커피 향기에 취해 소곤소곤 떨어지는 빗방울을 관찰하며 잠시 현실을 잊는 몽상의 즐거움을 아이들은 알지 못합니다. 웃고 떠들고 장난치고 별로 재미도 없어 보이는 놀이를 하고 깔깔 참 많이도 즐거워합니다. 어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이들의 세상입니다.

점심시간. 시간의 여유가 조금 생겼습니다. 수업을 방해하는 유난한 아이들 몇 명을 불러 대화를 해 봅니다. 수업 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를 묻습니다. 대답은 신속합니다.


“오늘 유난히 떠드는 이유가 뭐니?”
“비가 오잖아요.”

(와우, 비와 공부 시간의 태도가 인과관계가 있다는 창의적인 발상을 저는 배운 적이 없습니다. 다시 묻습니다.)
“비가 오면, 공부 안 해도 되니?”
“그럼요. 비가 아주 많이 오잖아요. 조금이 아니라 많이 오니까 많이 떠들 수밖에 없어요.”
(태풍이 올까 두려워집니다.)
“K군, 너는 비가 오지 않았던 어제도 떠들었었는데?”
“선생님 어제는 어제고 오늘은 오늘이에요.”
(수사관 선생님의 약점을 꿰뚫는 알리바이입니다. 제가 오늘도 졌네요.)

더 이상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아이들의 세상은 교사의 세상과 너무나도 다릅니다. 포기하고 말았네요. 대화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에게 눈높이를 맞춰야 한다는 신념이 깨지는 순간입니다. 민주주의적 대화를 버리고 전통적인 훈계를 시작합니다.

“좋은 말로 타이르고 싶었는데 너희들이 선생님을 화나게 했다.”
(빗소리가 크게 들립니다. 아이들이 격양된 제 목소리에 얼었습니다. ㅋㅋ 작전 성공.)
“다음 시간은 사회고 공부 주제는 민주주의다.”
“더 떠들고 싶으면 아주 민주적이고 합법적으로 너희들을 위한 재판을 열어주지.”
“판사는 나고 집행관도 나고 검사도 나다.”

대답이 없습니다. 급냉 모드. 아이들의 입가에 약간의 두려움이 보입니다. 무에타이를 오래 배운 메뚝샘의 패기에 얼었습니다. 이겼습니다. 기 싸움에서 이겼으니 이제 수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을 듯했습니다.

수업시간입니다. 과목은 사회고, 주제는 민주주의입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인 자유에 대해 가르칩니다. 자유란 억압의 반대말이라고 칠판에 썼습니다. K군이 한숨을 쉽니다. 떠들지는 않습니다. 집중하지도 않았고 자유로워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했습니다. 억압된 분위기 속에 자유를 배우는 이율배반이 느껴집니다. 실수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 원칙을 무시하고 말았네요. 미안해집니다.


2.
사실 저는 K군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K군을 이해하는 것보다 제 자신이 편안해지고자 했습니다. 왜 K군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생각해봅니다.생각만으로 풀리지가 않네요. 책을 듭니다.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는 철학자 김영민의 격언을 믿어봅니다. 생각을 돕는 지식인을 찾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을 택했습니다. 10년 전 대학 동기가 추천한 일본의 비평가입니다. 같이 철학동아리에 참여했던 친굽니다. 당시 동양 고전의 아우라에 깊게 빠져 있던 저를 서양 철학으로 인도한 전도사입니다. 그때 그 시절, 그 친구는 고진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읽은 내용을 녹음해서 MP3플레이어에 저장하고 다니기도 했네요. 집요한 친구였습니다. 책 제목이 묵직합니다. 『탐구』, 과학도 아닌데 탐구를 한다니요.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는 우리가 쓰는 과학적 탐구방식이 아닙니다. 그의 탐구론은 “기존의 모든 철학과 사유 체계에 대한 전복적 사유를 통해 위기를 탐구해 나가면서 새로운 윤리를 탐색하는 지적 여행”입니다. 요컨대 전복을 통해 새로운 윤리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윤리가 중요합니다. 고진의 윤리는 전통적인 윤리가 아닙니다. 종교적 윤리도 거부합니다. 양보와 관용이 윤리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타자를 인식하는 우리의 상식을 진정으로 전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선 제가 이해하지 못한 K군과의 관계부터 해석해 봅니다. 왜 나는 K군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고진은 말합니다. “타자와 대화하는 것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선다는 뜻”이라고 말이지요.“공통 규칙은 오직 ‘가르치고–배우는’ 관계 후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고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선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의미가 쉽지 않습니다. 늘 ‘가르치는 자’들은 ‘배우는 자’들과 ‘가르치고-배우는’ 관계 속에서 생활한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는 ‘말하고-듣는’ 관계와 다릅니다. ‘말하고–듣는’ 관계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배려라는 덕목으로 유지되는 방식입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유사합니다.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가 가능
하다는 원리입니다. 고진은 이와 같은 원리가 신화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공통의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공통의 규칙이란 공통의 원리를 말하기 전에 이미 합의된 규칙입니다. 언어의 세계는 대화하기 전에 같은 규칙을 합의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대칭적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가 전제
돼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도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대칭적 관계의 대화는 같은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에 대화라기보다 독백입니다. 고진은 자기대화 또는 자신과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와 동일한 규칙을 지닌 사람과의 관계는 ‘말하다–듣다’의 입장에서 행하는 모놀로그(독백)입니다.

비대칭적 관계, 다시 말해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합니다. 비대칭적 믿어봅니다. 생각을 돕는 지식인을 찾습니다. 가라타니 고진을 택했습니다. 10년 전 대학 동기가 추천한 일본의 비평가입니다. 같이 철학동아리에 참여했던 친굽니다. 당시 동양 고전의 아우라에 깊게 빠져 있던 저를 서양 철학으로 인도한 전도사입니다. 그때 그 시절, 그 친구는 고진을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읽은 내용을 녹음해서 MP3플레이어에 저장하고 다니기도 했네요. 집요한 친구였습니다. 책 제목이 묵직합니다. 『탐구』, 과학도 아닌데 탐구를 한다니요. 가라타니 고진의 『탐구』는 우리가 쓰는 과학적 탐구방식이 아닙니다. 그의 탐구론은 “기존의 모든 철학과 사유 체계에 대한 전복적 사유를 통해 위기를 탐구해 나가면서 새로운 윤리를 탐색하는 지적 여행”입니다. 요컨대 전복을 통해 새로운 윤리를 탐색하는 과정입니다.

새로운 윤리가 중요합니다. 고진의 윤리는 전통적인 윤리가 아닙니다. 종교적 윤리도 거부합니다. 양보와 관용이 윤리라고 주장하지도 않습니다. 때문에 이 책은 타자를 인식하는 우리의 상식을 진정으로 전복하는 힘이 있습니다. 우선 제가 이해하지 못한 K군과의 관계부터 해석해 봅니다. 왜 나는 K군을 이해하지 못했을까요?

고진은 말합니다. “타자와 대화하는 것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선다는 뜻”이라고 말이지요. “공통 규칙은 오직 ‘가르치고–배우는’ 관계 후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다.”라고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에 선다는 것을 무엇일까요? 의미가 쉽지 않습니다. 늘 ‘가르치는 자’들은 ‘배우는 자’들과 ‘가르치고-배우는’ 관계 속에서 생활한다고 믿고 있으니까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는 ‘말하고-듣는’ 관계와 다릅니다. ‘말하고–듣는’ 관계는 화자와 청자 사이의 배려라는 덕목으로 유지되는 방식입니다.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과 유사합니다. 평등한 관계에서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는 대화가 가능하다는 원리입니다. 고진은 이와 같은 원리가 신화적이라고 비판합니다. 우리가 쓰는 언어는 공통의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공통의 규칙이란 공통의 원리를 말하기 전에 이미 합의된 규칙입니다. 언어의 세계는 대화하기 전에 같은 규칙을 합의합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진정한 대화를 위해서는 대칭적 관계가 아니라 비대칭적 관계가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도 유사합니다. 왜냐하면 대칭적 관계의 대화는 같은 규칙을 공유하기 때문에 대화라기보다 독백입니다. 고진은 자기대화 또는 자신과 동일한 규칙을 공유하는 사람과의 대화를 대화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자기와 동일한 규칙을 지닌 사람과의 관계는 ‘말하다–듣다’의 입장에서 행하는 모놀로그(독백)입니다.

비대칭적 관계, 다시 말해 완전히 다른 타자와의 조우를 통해서만 대화가 가능합니다. 비대칭적 관계는 타자의 타자성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비대칭적인 관계를 이해하려면 말을 하지 못하거나 한국말이 서툰 외국인들과 소통하려는 대화 방식을 상상해 보면 될 것 같습니다. 외국인들에게 특정한 대화를 요구할 때 말하는 입장은 반드시 자신의 언어를 소통시키기 위한 노력을 행해야 합니다. 매우 천천히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야겠지요. 이때, 외국인은 나와 다른 세계의 공통규칙(언어)을 쓰는 타자입니다. 외국인과 아이의 공통점은 다른 규칙 속에 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는 일종의 태도 변경입니다. ‘말하고-듣는’ 입장에서 ‘가르치고–배우는’ 입장으로의 근본적인 시점의 전환이지요. “공통의 언어 게임(공동체) 안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전제할 수 없는 장소에 선다는 것”입니다. 이는 전복입니다. 타자를 발견하기 위해 애써 불편해지려는 노력입니다.

K군과의 관계 속으로 다시 들어가 봅니다. K군과 대화를 청했던 그 순간 저는 K군을 저의 공통 규칙 안으로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처음에 대칭적 관계를 유지하려고 애쓰기도 했습니다. 대칭적 관계가 평등한 관계고, 평등한 관계만이 소통이 가능하다는 저만의 규칙을 강요한 것이지요. 하지만 K군은 완벽하게 다른 타자였습니다. K군의 공통규칙은 저와 달랐습니다. “비가 많이 오기 때문에 떠든다.”란 규칙은 소란의 원인이 비가 아니라 비가 주는 그 느낌이 일상적인 학교생활을 방해한다는 의미였습니다. K군의 이야기는 K군의 세계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K군의 규칙을 환대하기보다 제 규칙을 강요하는 데 몰두했습니다. K군은 자기를 이해하지 못한 저를 아쉬워했을 텁니다. 전 그 아쉬움마저 무시했네요. 비오는 날 클래식한 음악을 듣고 사색을 하며 사상을 나누는 고즈넉한 제 세상을 요구했을 뿐입니다.


3.
이러한 일방적인 소통방식을 고진은 “타자의 타자성을 사상한 곳에서 타자와의 대화는 자기대화가 되며 자기대화는 타자와의 대화와 동일시된다.”라고 했습니다. 타자의 타자성을 사상한 곳은 타자를 타자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장소입니다. 형식은 대화지만 본질적인 대화가 이루어질 수 없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아이들과의 진정한 대화는 교사 자신과 아이들이 다르면 다를수록 좋습니다. 나랑 다른 아이들만이 진정한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교사는 궁합이 맞는 아이들보다 궁합이 맞지 않는 아이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사진작가 최민식은 “교육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 중 하나는 인간의 세계를 넓힘으로써 진실한 사고를 통해 현상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교육은 인간의 세계를 확장하는행위입니다. 세계를 확장한다는 것은 나와 다른 존재(타자)를 인정하고 그와 소통하는 시공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아이들의 내면에 다가서려 하지 말고 아이들의 차이 그 자체를 존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아이들의 차이를, 차이 그 자체로 인정하고 그들의 규칙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대화는 가능하고 교육은 독창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육이 인간에게 미치는 가장 숭고한 영역은 진실한 사고를 통해 현상을 독창적이고 신선하게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진실 되고 신선하지 않은 배움은 진솔하지도 않습니다. 독창성은 이 진실 된 섬세함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진실 된 섬세함’이란 단독적인 차이를 생성해 낼 수 있는 자존감을 뜻합니다. 교육은 차이를 생성할 수 있는 지독한 자존감을 가르치는 일이지요. 때문에 교육은 자기와 다른 타자를 섬세하게 환대해야 합니다. 흔히 섬세함을 천부적인 재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틀렸습니다. 타자를 환대하는 윤리적 섬세함은 후천적인 능력입니다. 가르칠 수 있는 영역이며 교육의 한 부분입니다. 차이를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은 키워지고 닦아지는 것이지요. 섬세한 자존감을 위한 교육은 타자를 받아들이는 ‘가르치고–배우는’ 관계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예민하고 날카로운 교육만이 차이를 생성할 수 있습니다. 나와 같은 사람과 살고 싶은 욕구보다 교육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나와 다른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차이의 발견은 자존감을 숙성시킵니다. 하지만 교사와 학생 간의 관계는 대칭적 방식을, 교육적이란 이념을 신봉하곤 합니다. 한 해 동안 6~7만 명의 아이들이 더불어 사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학교를 그만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 아이들에게 개인의 잘못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교육의 기본 목적인 소통을 가르치지 못한 채 아이들 자신의 문제로 떠넘기는 교육적 난센스입니다. 그들의 학교 이탈 책임이 전적으로 교육 내부에 있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책임을 당당하게 짊어져야 하지요. 그것이 바로 교육의 사회적 책무이고 고진이 말한 전복적 탐구를 통한 새로운 윤리의 창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당하고 섬세하고 독창적인 자기를 만들어 주지 못한 건 바로 우리 어른들이니까요. 6~7명의 낙오자가 있어도 그들을 위해 사회 구성원 전체가 아파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름다운 사회이며 윤리의 근본 원칙입니다. 하물며 6~7만 명의 아이들이 자기의 세계를 인정받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관이나 체제로 떠넘기고 있습니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더러움을 만지듯 피하기까지 하지요. K군을 불편해하고 곧바로 교사의 권위라는 공권력을 발동했던 저처럼 말이지요.


4.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이들을 망치고 있습니다. 아이들 내부에 가득한 분노는 바로 자기들의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기하였던 어른들의 대화 방식 때문입니다. 더불어 살라는 강령 덕분에 잃어버렸던 소통의 기본 양식(비대칭성)이 아이들을 더불어 살기 싫게 만들었을지도 모릅니다. 중요한 것은 차이를 사상하고 타자를 동일화시
키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고 타자에게 배우는 행위인데 말이지요.

스스로 살지 못하는 사람(독창적 세계가 없는 사람)은 ‘가르치고–배우는’ 관계의 대화를 할 수 없습니다. 때문에 더불어 살 자격 또한 적습니다. 진정한 대화를 위해 단독이 연대보다 앞서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리고 단독적인 세상을 가진 독특한 아이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당하게 살도록 가르치지 못해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이탈한 아이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라도 해야 할 듯합니다. 이것이 가르치는 자들의 윤리입니다.

따라서 교사들에게 나와 같은 아이들과의 반복적인 만남은 달갑지 않아야 합니다. 나와 같은 아이들과의 만남은 교사들의 성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타자만이 나에게 독백이 아닌 대화를 가능하게 합니다. 고진은 이러한 존재를 ‘타자’라고 부릅니다. “공동체 외부에 존재하면서 단독자로서 의심하는 일이 아무런 근거가 없다고 해도, 자신을 그렇게 재촉하는 무언가가 있으며 그러한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의심”할 수 있는 존재가 타자입니다. 타자 없는 영혼은 빈곤합니다. 대화를 가장한 독백이 배움의 장소에서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때 이 땅에 K군은 내 아이들이 될 것이고, 6~7만 명의 탈학교 아이들은 바로 내 자식이 될 수 있습니다.

교사와 완벽하게 다른 아이들일수록 교사 자신에게 완전한 타자가 될 수 있습니다. 완전한 타자는 나의 관성을 의심하고 구태한 습성을 터부시하게 하며, 차이를 생성할 수 있는 자존감을 키워줍니다. 타자인 학생을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를 고민하기보다 타자인 학생과 어떻게 대화할 것인가를 고민할 때, 우리 교육은 새로운 윤리로 거듭날 것입니다. 상생의 배움은 “나는 다른 아이들이 좋아요!”라는 구호의 연장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이라고 고백한 고진처럼 교사들 또한 배우는 일이 곧 가르치는 일이요, 살아가는 일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자! 이제 K군의 비의 느낌을 대화하러 갑니다. 조금은 알 수 있겠지요. 비가 오면 떠들 수밖에 없는 K군의 세상을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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