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이데아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교사에게도 욕망은 본질이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4-12 10:27 조회 7,367회 댓글 0건본문
자크 라캉 지음|맹정현, 이수련 옮김 l 새물결
1
눈이 왔다. 첫눈이다. 질퍽한 함박눈을 바랐지만 날쌘 싸락눈이다. 학교 아이들이 신났다. 가루눈이라도 뭉쳐서 내던지는 재미에, 학교의 아침은 활짝 피었다. 교실도 눈가루로 희다. 하얀 입자들은 증발을 아쉬워하며 아이들 몸에 덕지덕지 붙어 교실을 습기로 가득 채웠다. 겨울이다. 진짜 겨울임을 눈은 증표(證票)해 주었다. 아이들은 녹아가는 눈을 포식하며 종일 운동장 복판에서 뛰어논다. 나도 같이 놀다가 많이 넘어지고 굴렀다. 아쉽게도 눈은 우리의 욕망보다 일찍 멈췄다. 볕은 조금씩 함박 뭉치려는 눈들의 연대 의식에 심술부리듯 쏘아 내렸고, 아이들은 아쉬움으로 하늘을 째려봤다. 점심시간엔 다소 눅눅해진 눈밭에서 공을 찼다. 공은 미끄러지기보다 삐걱거리며 굴러갔는데, 평소보다 낯선 속도로 진행하는 꼴이 우리를 쌩쌩 웃게 했다. 우리들의 기획하지 않은 눈꽃 축제는 어수룩했지만, 예뻤다.
축제는 맛있었다. 그러나 축제에 참여한 우리가 학교 전체는 아니었다. 경망스레 호들갑을 부리는 우리들을 스크린에 내비친 영상처럼 감상하는 어른도 있었고, 계절의 변화와 자기 일상이 별반 관계없다는 듯 어제와 같은 시간을 꾸리는 아이도 있었다. 개중엔 아이보다 어른이 훨씬 관조적이었는데, 이유를 따지지 못하겠지만(따지는 게 고통스럽지만) 눈에 뒹군 우리들의 입장에선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그들의 무거운 몸이 안돼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고드름처럼 손을 헤집고 들어오는 느낌이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우린 축제를 즐겼고, 환호를 질렀고, 목이 쉬었고, 다음날 감기에 걸려 아팠다.
축제라는 영어 ‘Festival’의 어원은 ‘고기 먹는 날’이다. 고대 서양에서는 고기가 귀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시기와 장소를 종교가 통제했단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남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하여 축제는 평소에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을 먹고, 뻘뻘 노는 날이었다. 생경한 음식이 활발한 몸부림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고기의 영양분을 비축하기보다 산화했다. 고기가 준 힘으로 춤과 노래를 질렀다. 먹기 위해 놀지 않고 놀기 위해 먹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축제는 고기 맛을 향유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역마다 축제의 중심엔 먹을거리가 있다. 고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날의 축제는 먹는 것이 노는 것보다 위에 있다는 점이다. 놀기 위해 먹지 않고 먹기 위해 논다. 아니다. 먹는 것이 곧 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즐거움은 비우는 맛이 아니라 채우는 맛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득가득 무언가를 채우는 데 바쁘고, 꽉꽉 채우는 행위를 잘 놀았다고 말한다.
눈 오는 날의 축제도 그랬다. 눈을 관조하는 사람들에게 눈은 사소하다. 설렘보다 오고가는 교통량이 걱정이고, 추위와 젖은 옷이 주는 불쾌함이 더 걱정이다. 특별한 날의 재미보다 밋밋한 날의 연속에 집중한다. 그들에게 눈은 매력적인 얼음 결정체가 아니다. 축제의 맛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쾌감을 지속하고 싶다. 일상이 특별함을 지배해 버렸다.
축제 후 고민이 짙어졌다. 모두 함께 즐기는 축제를 안타까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학교육교에서 축제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태가, 교육 내에 있는 징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별한 날의 재미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혹여 첫눈이 너무 적어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탓은 아닐지, 그도 아니라면 눈싸움이 재미가 없는 것일까?
사실 축제를 즐기기엔 우린 너무 앞서간다. 예측을 벗어난 행동에 쉽게 움츠린다. 본디 축제는 돌발적인 맛이고, 오랜만에 먹은 고기의 열량을 다 써버리고 다시 배고파지는 무모함인데, 우리의 관조는 평평하고 재미없다. 앞뒤를 가늠하지 않고 바로 이 순간만을 즐기는 태도가 축제다. 축제적인 삶이란 다가올 고통보다 현시될 즐거움에게 몸을 태워 버리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축제가 그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진짜 재미에 무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방식이 평준화되어 별반 욕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의문은 아이들이 주워 던지는 눈 뭉치처럼 밀도 있게 비벼져 첫눈이 오는 밤 나를 괴롭혔다.
많은 아이들이 눈을 즐겼다. 눈과 함께 겨울을 반기고, 꿈을 꾸고, 뻘뻘 땀을 흘렸다. 그런데 왜? 몇몇 사람들은 이 즐거운 행위를 욕망하지 않는 것일까? 맞다. 욕망. 눈을 욕망하지 않는 사람들의 욕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욕망을 바짝 붙여 생각해 보자. 혹시 욕망이란 개념 안에 눈꽃축제를 즐기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욕망을 생각하니 다소 골치가 아프다. “골치 아픈 것은 실존이 시니피앙(기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기만이 실존의 증인이라는 것이다.”◆1그래서 나는 오늘, 내 나름대로의 욕망이론에 대해 말해 보련다. 실존의 증인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축제는 맛있었다. 그러나 축제에 참여한 우리가 학교 전체는 아니었다. 경망스레 호들갑을 부리는 우리들을 스크린에 내비친 영상처럼 감상하는 어른도 있었고, 계절의 변화와 자기 일상이 별반 관계없다는 듯 어제와 같은 시간을 꾸리는 아이도 있었다. 개중엔 아이보다 어른이 훨씬 관조적이었는데, 이유를 따지지 못하겠지만(따지는 게 고통스럽지만) 눈에 뒹군 우리들의 입장에선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그들의 무거운 몸이 안돼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 매서운 겨울바람이 고드름처럼 손을 헤집고 들어오는 느낌이 만족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여하튼 우린 축제를 즐겼고, 환호를 질렀고, 목이 쉬었고, 다음날 감기에 걸려 아팠다.
축제라는 영어 ‘Festival’의 어원은 ‘고기 먹는 날’이다. 고대 서양에서는 고기가 귀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시기와 장소를 종교가 통제했단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남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하여 축제는 평소에 먹을 수 없는 귀한 음식을 먹고, 뻘뻘 노는 날이었다. 생경한 음식이 활발한 몸부림을 만들었다. 사람들은 고기의 영양분을 비축하기보다 산화했다. 고기가 준 힘으로 춤과 노래를 질렀다. 먹기 위해 놀지 않고 놀기 위해 먹었다. 하지만 오늘날의 축제는 고기 맛을 향유하는 데 그치는 경우가 많다. 지역마다 축제의 중심엔 먹을거리가 있다. 고대와 다른 것이 있다면 오늘날의 축제는 먹는 것이 노는 것보다 위에 있다는 점이다. 놀기 위해 먹지 않고 먹기 위해 논다. 아니다. 먹는 것이 곧 노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즐거움은 비우는 맛이 아니라 채우는 맛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득가득 무언가를 채우는 데 바쁘고, 꽉꽉 채우는 행위를 잘 놀았다고 말한다.
눈 오는 날의 축제도 그랬다. 눈을 관조하는 사람들에게 눈은 사소하다. 설렘보다 오고가는 교통량이 걱정이고, 추위와 젖은 옷이 주는 불쾌함이 더 걱정이다. 특별한 날의 재미보다 밋밋한 날의 연속에 집중한다. 그들에게 눈은 매력적인 얼음 결정체가 아니다. 축제의 맛보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쾌감을 지속하고 싶다. 일상이 특별함을 지배해 버렸다.
축제 후 고민이 짙어졌다. 모두 함께 즐기는 축제를 안타까워하는 것만은 아니다. 학교육교에서 축제의 의미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태가, 교육 내에 있는 징후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특별한 날의 재미를 알지 못하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혹여 첫눈이 너무 적어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탓은 아닐지, 그도 아니라면 눈싸움이 재미가 없는 것일까?
사실 축제를 즐기기엔 우린 너무 앞서간다. 예측을 벗어난 행동에 쉽게 움츠린다. 본디 축제는 돌발적인 맛이고, 오랜만에 먹은 고기의 열량을 다 써버리고 다시 배고파지는 무모함인데, 우리의 관조는 평평하고 재미없다. 앞뒤를 가늠하지 않고 바로 이 순간만을 즐기는 태도가 축제다. 축제적인 삶이란 다가올 고통보다 현시될 즐거움에게 몸을 태워 버리는 행위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의 축제가 그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다면, 이는 순간에 모든 것을 거는 진짜 재미에 무감하기 때문은 아닐까?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방식이 평준화되어 별반 욕망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은 아닐까? 의문은 아이들이 주워 던지는 눈 뭉치처럼 밀도 있게 비벼져 첫눈이 오는 밤 나를 괴롭혔다.
많은 아이들이 눈을 즐겼다. 눈과 함께 겨울을 반기고, 꿈을 꾸고, 뻘뻘 땀을 흘렸다. 그런데 왜? 몇몇 사람들은 이 즐거운 행위를 욕망하지 않는 것일까? 맞다. 욕망. 눈을 욕망하지 않는 사람들의 욕망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욕망을 바짝 붙여 생각해 보자. 혹시 욕망이란 개념 안에 눈꽃축제를 즐기고 싶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욕망을 생각하니 다소 골치가 아프다. “골치 아픈 것은 실존이 시니피앙(기표)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말하기만이 실존의 증인이라는 것이다.”◆1그래서 나는 오늘, 내 나름대로의 욕망이론에 대해 말해 보련다. 실존의 증인을 발견하기 위함이다.
2
인간은 욕망하는 동물이다. 시인 스탠리 쿠니츠는 삶의 원동력을 첫째도 욕망, 둘째도 욕망, 셋째도 욕망이라 했다. 욕망은 인간을 이해하는 최전선이다. 인간의 특수성이 욕망이란 개념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동물에겐 없다. 동물은 본능(충동)이 충족되면 그 이상을 추구하지 않는다. 동물과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 그 중심에 욕망이 있다. 물론 동물에게도 충동은 있다. 대표적으로 식욕과 성욕이다. 동물은 두 가지 충동을 채우면 만족한다. 배부른 사자가 잠만 자는 이유다. 그러나 배부른 인간은 잠만 자지 않는다. 인간은 충동을 채운 뒤에도 결핍과 결여를 느낀다. 욕망은 근본적으로 비어 있다. 콩쥐의 항아리처럼 밑 빠진 독을 채우는 물이 욕망이다.
인간의 행위는 매우 복잡하고 이상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언어라는 기호 체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오묘한 언어는 인간을 굴절시키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모든 감각과 감정을 언어가 무결하게 반영할 수 없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언어가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언어와 충동의 불일치 때문에 인간은 자주 삐걱대고, 미끄러진다. 다 찾지 못하기에 더 찾으려는 욕망이 되레 인간을 지배한다. 욕망은 애매한 상태로 뿌연 연기처럼 인간이라는 주체 주위를 맴돈다.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현자도 군자도 욕망한다(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하는 것). 끝까지 채워지는 욕망이란 없다. 이 문제를 죽는 날까지 천착한 사람이 프랑스의 자크 라캉이다. 라캉이 말하길 욕망은 인간의 전부다. 인간은 주체로 세우는 것도 욕망이고,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도 욕망이며, 문명을 일궈낸 단초도 욕망이다. 따라서 욕망이론은 곧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이다. “실천이란 그것이 무엇이건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적인 것을 다룰 수 있도록 인간에 의해 의도된 행동을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2다. 상징은 언어고, 실천은 언어를 통해 욕망이란 불투명한 실체(인간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은 언어의 체계다. 욕망을 인간에게 유용한 수단으로 이해하려면 언어의 뜻과 질서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세계(실재계)로 잠시나마 근접해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잠시다. 욕망의 균열은 언제나 잠시의 포만만을 허락한다. 축제 후 감기로 아팠던 우리들의 모습처럼 욕망의 극단은 심한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고,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인간의 행위는 매우 복잡하고 이상하기까지 하다. 인간은 언어라는 기호 체계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이 오묘한 언어는 인간을 굴절시키고 왜곡시키기도 한다. 모든 감각과 감정을 언어가 무결하게 반영할 수 없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과 언어가 근본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언어와 충동의 불일치 때문에 인간은 자주 삐걱대고, 미끄러진다. 다 찾지 못하기에 더 찾으려는 욕망이 되레 인간을 지배한다. 욕망은 애매한 상태로 뿌연 연기처럼 인간이라는 주체 주위를 맴돈다.
욕망은 만족을 모른다. 현자도 군자도 욕망한다(욕망하지 않음을 욕망하는 것). 끝까지 채워지는 욕망이란 없다. 이 문제를 죽는 날까지 천착한 사람이 프랑스의 자크 라캉이다. 라캉이 말하길 욕망은 인간의 전부다. 인간은 주체로 세우는 것도 욕망이고, 타인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것도 욕망이며, 문명을 일궈낸 단초도 욕망이다. 따라서 욕망이론은 곧 인간을 이해하기 위한 실천이다. “실천이란 그것이 무엇이건 상징적인 것을 통해 실재적인 것을 다룰 수 있도록 인간에 의해 의도된 행동을 가리키는 매우 포괄적인 용어”◆2다. 상징은 언어고, 실천은 언어를 통해 욕망이란 불투명한 실체(인간 자체)를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라캉이 말하는 상징은 언어의 체계다. 욕망을 인간에게 유용한 수단으로 이해하려면 언어의 뜻과 질서를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진짜 세계(실재계)로 잠시나마 근접해 볼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잠시다. 욕망의 균열은 언제나 잠시의 포만만을 허락한다. 축제 후 감기로 아팠던 우리들의 모습처럼 욕망의 극단은 심한 고통을 동반하기도 하고, 우리를 괴롭히기도 한다.
3
라캉에 의하면 이 세계는 위상학적(단계적)으로 설계되어 있다. 첫 번째 단계는 거울단계(상상계)다. 거울단계는 자신의 정체성을 거울 안에 확보하는 시기다. 거울단계에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자기 자신과 일치시키면서 정체성을 찾는다. 거울에 비친 아이는 허구를 모른다. 완전체로서 자신을 확보한다. 불안이 상쇄된 주체인 거울단계의 아이는 완벽하다. 그러나 이 완벽함은 다른 차원의 타인(상징적인 아버지)이 개입한 후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자신을 충족시켜 주는 엄마에 대한 잠재적 경쟁자며, 이길 수 없는 절대 강자다. 반드시 패배하는 싸움에서 아이는 공포를 느끼고, 이내 지배자의 질서로 편입한다. 이 편입된 세계가 상징계다. 상징계 속으로 들어온 주체는 갈팡질팡한다. 상징계에서 극복해야 할 숙제는 거울 속 정보를 조합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다. 상징은 언어다. 언어가 지배하는 세계로의 이행은 곧 언어를 학습해야 하는 필연을 뜻한다. 언어의 세계에서 언어를 배우지 못하는 것은 죽음에 가까운 공포다. 언어를 기어이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가 흔들린다. 그러나 정확한 언어를 구사하더라도 상상계처럼 완벽한 주체성을 발견할 수 없다. 언어는 자의적인 기호(기표)이기에, 주체 전부를 표현할 수 없는 역설이 생긴다. 언어를 배워야 하지만 충분한 언어를 구사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이 인간이 욕망하는 주체로 변신하는 과정이다. 미운 다섯 살이 괜한 이야기가 아니다.
라캉은 이러한 현상을 ‘아버지의 이름(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적 원리)’으로 호명되는 과정이라 했다. 아버지는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이다. 규율과 규칙과 법칙의 세계다. 거울 밖으로 나온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세계 전체다. 아이는 어지럽다. 자신을 찾는 세계가 방대하고, 극복하는 과정 또한 험난하다. 탐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상징계에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대한 세계를 받아 안고 이해하는 것뿐이다. 이런 모순적 상황 속에서 아이는 마음 깊은 곳에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꿈틀거리는 그 무엇을 만든다. 바로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으로 흘러 의식으로 충족될 수 없는 영역을 만든다. 그 영역이 몸 밖으로 출몰하는 현상이 욕망이다. 상상계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내 욕구를 채워 주는 엄마가 존재했지만, 상징계에서는 내 전부를 만족시켜 줄 존재는 없다. 요구와 욕구가 갈라지고, 의식과 무의식이 멀어진다. 더구나 아버지란 절대적 존재가 이를 방해하고 언어는 무의식을 더 깊이 몰아내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구를 이 불완전한 언어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욕구(충동)와 요구(표현) 사이에 간극이 멀어진다. 간극을 채우고 싶은 주체는 필요 이상을 요구하고 만족을 모른다. 내가 가진 장난감보다 친구의 장난감이 부럽고, 친구가 즐기는 게임이 내가 하는 것보다 부러운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상상계 질서에서 상징계 질서로의 편입이 첫 번째 욕망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욕망이란 계단에 첫 디딤돌인 ‘위상학적 제1욕망’◆3이다.
욕망이 불투명해지면 인간(주체) 또한 불확실해진다. 무사히 상징계로 편입한 주체는 만족감을 누린다. 상징계 질서는 곧 세속이 만들어 내는 규범과 법규의 세계다. 상징계의 욕망은 상징계 질서를 만족하는 수준에서 작동한다. 프로이트는 이 세계의 원리를 쾌락원칙이라 불렀다. 쾌락원칙의 세계는 쾌락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욕망의 작동을 허가하는 세계다. 몸에서 나온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구의 범위는 한정적이다. 이제 욕망은 확실해졌다. 세속을 지배하는 자가 주인이다. 이 세계에서 성취한 사람은 진정한 주체다. 자본주의에서 주체는 자본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상징계 질서 안에서도 이탈은 있다. 무의식은 자유를 사랑한다. 세속에서 탈락하는 사람과 이탈하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상징계의 질서는 모두에게 욕망의 만족을 줄 수 없다. 더구나 욕망이란 순수한 자기 충동이 아니라 관계적 충동의 형태로 표상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상징계에서 욕망하는 주체로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수다. 욕망의 다른 층위만이 이 다수의 존재적 결핍을 해결할 수 있다.
이탈의 세계 혹은 상징계 내부의 균열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층위가 실재계다. 실재계는 진짜 세계다. 요구와 욕구가 통합된 세계다. 모순이 없다. 이 세계는 진실한 세계이고 모두가 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허술한 언어는 실재계 세계를 모두 표상할 수 없다. 표상해도 잔여물이 남고, 표상 안 해도 잔여물이 남는다. 말할 수 없는데 있는 세상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비틀어 실재계를 설명했다. 무지 난해하다. “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이 보기에 데카르트는 상징계 속에서 만족하는 유치한 어린아이다. 진정한 주체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상징계적 질서에 만족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는 다르다. 생각은 언어의 층위고, 존재는 언어의 층위를 포월(匍越)한다. 상징계적 욕망을 실현한 후에도, 결여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전히 욕망은 허기지다. 알 수 없는 실재계는 상징계적 만족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라고 두드린다. 깊은 세계가 저기 있다는 유혹인데, 종교적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부정하는 종교적 관점과 달리 라캉의 욕망이론은 금욕조차 실재계를 만나려는 욕망하지 않음의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해석을 멈추면 안 된다. “해석은 종국에는 욕망을 가리키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욕망과 동일한 것이다.”◆4 말을 멈추는 순간 실재계라는 원칙 없는 세계는 사라진다. 끝까지 말할 수 있을 때, 실재계는 새벽안개처럼 잠시 머무를 수 있다. 욕망을 해석하려는 내 욕망이 삭지 않는 순간 속에서만 실재계라는 항구에 닻을 내릴 수 있다.
‘위상학적 제1욕망’에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구조는, ‘위상학적 제2욕망’으로 나아가려 한다. 욕망을 지배해야 존재는 투명해진다. 그렇지만 이 위상학적 제2욕망은 고통스럽다. 상징계 질서의 위반 후에 나타나는 실재계는 규범과 규칙을 허문다. 허문만큼 실재계에 다가갈 수 있지만, 가면 갈수록 고통은 커진다. 상징계적 욕망 구조를 배반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다. 주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 실제로 그 현실에 대한 접근을 본뜬 것이라면, 개념의 완전한 실현은 오직 도약, 즉 극한으로의 이행을 통해서만 가능◆5하다. 실재계는 위험한 목적지요, 욕망의 최종 단계다.
라캉은 이러한 현상을 ‘아버지의 이름(세계를 지배하는 상징적 원리)’으로 호명되는 과정이라 했다. 아버지는 세계를 표상하는 상징이다. 규율과 규칙과 법칙의 세계다. 거울 밖으로 나온 아이를 괴롭히는 것은 세계 전체다. 아이는 어지럽다. 자신을 찾는 세계가 방대하고, 극복하는 과정 또한 험난하다. 탐할 수도 벗어날 수도 없다. 상징계에서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거대한 세계를 받아 안고 이해하는 것뿐이다. 이런 모순적 상황 속에서 아이는 마음 깊은 곳에 충분히 만족할 수 없는 꿈틀거리는 그 무엇을 만든다. 바로 무의식이다. 무의식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으로 흘러 의식으로 충족될 수 없는 영역을 만든다. 그 영역이 몸 밖으로 출몰하는 현상이 욕망이다. 상상계에서는 필요할 때마다 내 욕구를 채워 주는 엄마가 존재했지만, 상징계에서는 내 전부를 만족시켜 줄 존재는 없다. 요구와 욕구가 갈라지고, 의식과 무의식이 멀어진다. 더구나 아버지란 절대적 존재가 이를 방해하고 언어는 무의식을 더 깊이 몰아내기까지 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충동을 만족시킬 수 있는 요구를 이 불완전한 언어로는 모두 표현할 수 없다. 욕구(충동)와 요구(표현) 사이에 간극이 멀어진다. 간극을 채우고 싶은 주체는 필요 이상을 요구하고 만족을 모른다. 내가 가진 장난감보다 친구의 장난감이 부럽고, 친구가 즐기는 게임이 내가 하는 것보다 부러운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상상계 질서에서 상징계 질서로의 편입이 첫 번째 욕망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욕망이란 계단에 첫 디딤돌인 ‘위상학적 제1욕망’◆3이다.
욕망이 불투명해지면 인간(주체) 또한 불확실해진다. 무사히 상징계로 편입한 주체는 만족감을 누린다. 상징계 질서는 곧 세속이 만들어 내는 규범과 법규의 세계다. 상징계의 욕망은 상징계 질서를 만족하는 수준에서 작동한다. 프로이트는 이 세계의 원리를 쾌락원칙이라 불렀다. 쾌락원칙의 세계는 쾌락이 허용되는 범위 내에서 욕망의 작동을 허가하는 세계다. 몸에서 나온 욕구를 충족시키되, 욕구의 범위는 한정적이다. 이제 욕망은 확실해졌다. 세속을 지배하는 자가 주인이다. 이 세계에서 성취한 사람은 진정한 주체다. 자본주의에서 주체는 자본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나 상징계 질서 안에서도 이탈은 있다. 무의식은 자유를 사랑한다. 세속에서 탈락하는 사람과 이탈하는 사람이 존재하기에 상징계의 질서는 모두에게 욕망의 만족을 줄 수 없다. 더구나 욕망이란 순수한 자기 충동이 아니라 관계적 충동의 형태로 표상되는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상징계에서 욕망하는 주체로 사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다수다. 욕망의 다른 층위만이 이 다수의 존재적 결핍을 해결할 수 있다.
이탈의 세계 혹은 상징계 내부의 균열이 만들어 낸 또 다른 층위가 실재계다. 실재계는 진짜 세계다. 요구와 욕구가 통합된 세계다. 모순이 없다. 이 세계는 진실한 세계이고 모두가 참이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허술한 언어는 실재계 세계를 모두 표상할 수 없다. 표상해도 잔여물이 남고, 표상 안 해도 잔여물이 남는다. 말할 수 없는데 있는 세상이다. 라캉은 데카르트의 명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라는 말을 비틀어 실재계를 설명했다. 무지 난해하다. “나는 네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라캉이 보기에 데카르트는 상징계 속에서 만족하는 유치한 어린아이다. 진정한 주체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상징계적 질서에 만족하지 않는다. ‘생각하는 나’와 ‘존재하는 나’는 다르다. 생각은 언어의 층위고, 존재는 언어의 층위를 포월(匍越)한다. 상징계적 욕망을 실현한 후에도, 결여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여전히 욕망은 허기지다. 알 수 없는 실재계는 상징계적 만족을 괴롭히고, 더 나아가라고 두드린다. 깊은 세계가 저기 있다는 유혹인데, 종교적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 또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부정하는 종교적 관점과 달리 라캉의 욕망이론은 금욕조차 실재계를 만나려는 욕망하지 않음의 욕망이라고 설명한다. 복잡해졌다. 그렇지만 해석을 멈추면 안 된다. “해석은 종국에는 욕망을 가리키며, 어떤 의미에서는 그 욕망과 동일한 것이다.”◆4 말을 멈추는 순간 실재계라는 원칙 없는 세계는 사라진다. 끝까지 말할 수 있을 때, 실재계는 새벽안개처럼 잠시 머무를 수 있다. 욕망을 해석하려는 내 욕망이 삭지 않는 순간 속에서만 실재계라는 항구에 닻을 내릴 수 있다.
‘위상학적 제1욕망’에 만족할 수 없는 인간의 욕망구조는, ‘위상학적 제2욕망’으로 나아가려 한다. 욕망을 지배해야 존재는 투명해진다. 그렇지만 이 위상학적 제2욕망은 고통스럽다. 상징계 질서의 위반 후에 나타나는 실재계는 규범과 규칙을 허문다. 허문만큼 실재계에 다가갈 수 있지만, 가면 갈수록 고통은 커진다. 상징계적 욕망 구조를 배반하는 행위는 이 세계의 질서를 위반하는 행위다. 주체는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현실을 포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 실제로 그 현실에 대한 접근을 본뜬 것이라면, 개념의 완전한 실현은 오직 도약, 즉 극한으로의 이행을 통해서만 가능◆5하다. 실재계는 위험한 목적지요, 욕망의 최종 단계다.
4
고통스럽지만 멈출 수 없는 극치의 즐거움은 실재계와 접촉하려는 인간의 최종 욕망이다. 라캉은 이를 ‘주이상스’라 불렀다. 주이상스는 주체가 그곳을 응시할 때 작동한다. “응시는 타인의 실존이다.”◆6
타인이 실존할 때 욕망은 작동한다. 따라서 주이상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곳을 바라볼 때만이 존재는 충만하다. “진리란 진리를 뒤쫓는 무엇”◆7이고, 존재란 존재를 뒤쫓는 무엇이다. 응시하지 않으면 없고, 쫓지 않으면 무의미한 세계가 진짜 욕망의 궁극인 실재계다. 그렇다면 진짜 욕망을 해석하고 응시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과 대면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실재계로의 접근은 극도의 쾌락을 허가하지만, 그 쾌락의 두께만큼 처절한 고통도 다가온다. 심연으로 침식한 무의식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기 위해서는 세상을 구성하는 체제를 파괴하고,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실재계로의 접근은 모험이다.
설명이 조금 길었다. 눈이 축제가 아닌 사15람들의 욕망을 해석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이제 조금은 알겠다. 눈을 즐기는 아이들의 세계는 눈이 주는 실재계적 층위, 다시 말해 ‘위상학적 제2욕망’을 향한 응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욕망은 상상계적 층위, 곧 ‘위상학적 제1욕망’의 응시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적 욕망은 쾌락이고, 실재계적 욕망은 향락이다. 쾌락은 질서 안의 만족이고 향락은 질서 밖의 자유다. 쾌락하는 주체의 적은 권태고, 향락하는 주체의 적은 비실존이다. 우리의 욕망이 실재계를 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권태라는 적과 싸워야 하며, 향락의 욕망을 마주할 수 없다. 그리고 주체는 실재계로의 이행을 통해서만 실존과 가까워질 수 있다. 상징계는 인간을 왜곡한다. 만들어진 세계는 내 세계가 될 수 없다. 실재계로의 이행은 비실존의 세계와의 처절한 격투다. 이것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숙명과의 대결이라고 봐도 좋겠다.
내일도 눈이 온단다. 함박눈이라는 예보다. 나는 여벌을 챙긴다. 속옷까지 모두 넣었다. 함박눈이 내리면 수업 장소는 운동장이고, 내용은 눈에 관한 모든 이야기다.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밭 축구, 이글루 만들기 등이 주제다. 우리는 현실의 수업 내용과 법칙을 어기고 눈이 주는 진짜 세계 속으로 맹수처럼 달려들 것이다. 우리는 상징계에 머무는 만족의 욕망을 넘어, 진짜 세계로 뛰어들 것이다. 많이 웃겠고, 많이 뛰겠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지 않아 제제를 받을 수도 있고, 매운 추위 덕에 다음 날에 많이 아프겠지만, 나는 욕망한다. 축제는 욕망하는 사람만의 몫이니까. 교사에게도 욕망은 본질이다.
타인이 실존할 때 욕망은 작동한다. 따라서 주이상스의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곳을 바라볼 때만이 존재는 충만하다. “진리란 진리를 뒤쫓는 무엇”◆7이고, 존재란 존재를 뒤쫓는 무엇이다. 응시하지 않으면 없고, 쫓지 않으면 무의미한 세계가 진짜 욕망의 궁극인 실재계다. 그렇다면 진짜 욕망을 해석하고 응시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고통과 대면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실재계로의 접근은 극도의 쾌락을 허가하지만, 그 쾌락의 두께만큼 처절한 고통도 다가온다. 심연으로 침식한 무의식이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기 위해서는 세상을 구성하는 체제를 파괴하고, 빈틈을 만들어야 한다. 따라서 실재계로의 접근은 모험이다.
설명이 조금 길었다. 눈이 축제가 아닌 사15람들의 욕망을 해석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이제 조금은 알겠다. 눈을 즐기는 아이들의 세계는 눈이 주는 실재계적 층위, 다시 말해 ‘위상학적 제2욕망’을 향한 응시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욕망은 상상계적 층위, 곧 ‘위상학적 제1욕망’의 응시다. 라캉에 따르면 상징계적 욕망은 쾌락이고, 실재계적 욕망은 향락이다. 쾌락은 질서 안의 만족이고 향락은 질서 밖의 자유다. 쾌락하는 주체의 적은 권태고, 향락하는 주체의 적은 비실존이다. 우리의 욕망이 실재계를 환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영원히 권태라는 적과 싸워야 하며, 향락의 욕망을 마주할 수 없다. 그리고 주체는 실재계로의 이행을 통해서만 실존과 가까워질 수 있다. 상징계는 인간을 왜곡한다. 만들어진 세계는 내 세계가 될 수 없다. 실재계로의 이행은 비실존의 세계와의 처절한 격투다. 이것은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 숙명과의 대결이라고 봐도 좋겠다.
내일도 눈이 온단다. 함박눈이라는 예보다. 나는 여벌을 챙긴다. 속옷까지 모두 넣었다. 함박눈이 내리면 수업 장소는 운동장이고, 내용은 눈에 관한 모든 이야기다. 눈싸움, 눈사람 만들기, 눈밭 축구, 이글루 만들기 등이 주제다. 우리는 현실의 수업 내용과 법칙을 어기고 눈이 주는 진짜 세계 속으로 맹수처럼 달려들 것이다. 우리는 상징계에 머무는 만족의 욕망을 넘어, 진짜 세계로 뛰어들 것이다. 많이 웃겠고, 많이 뛰겠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지 않아 제제를 받을 수도 있고, 매운 추위 덕에 다음 날에 많이 아프겠지만, 나는 욕망한다. 축제는 욕망하는 사람만의 몫이니까. 교사에게도 욕망은 본질이다.
◆1 『자크 라캉 세미나 11』, 424쪽
◆2 같은 책, 19쪽
◆2 같은 책, 19쪽
◆3 라캉의 위상학은 단계학이다. 욕망에도 계단처럼 단계가 있다는 의미다. 단계에 비약은 없다. 제1단계 후, 제2단계로의 이행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적으로 위반할 수 없는 결정된 계단이다.
◆4 『자크 라캉 세미나 11』, 266쪽.
◆5 같은 책, 36쪽.
◆5 같은 책, 132쪽.
◆5 같은 책, 285쪽.
◆5 같은 책, 36쪽.
◆5 같은 책, 132쪽.
◆5 같은 책, 28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