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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메뚝샘의 교사들을 위한 인문에세이] 시인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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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3-16 08:48 조회 7,445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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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산 홍천 매산초 교사, 『교사, 가르고 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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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프리드리히 니체 지음|정동호 옮김ㅣ책세상|2000
『니체와 철학』질 들뢰즈 지음|이경신 옮김|민음사|2001
『헌사』오장환 지음|열린책들|2004
 
1_ 우연이라 불리는 하늘 아래서 놀기
주말마다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다. 초등학교 때 가르친 녀석들인데 벌써 20대 중반이다. 1년 넘게 거르지도 않고 온다. 내방 시간은 토요일 오전 11시다. 오자마자 제자들은 내 아이들(8살 아들과 5살 딸)과 한나절 신나게 논다. 놀아 주는 게 결단코 아니다. 진짜 재밌게 논다. 멀리 보면 식구 같고, 가까이 보면 또래친구들보다 더 살갑다. ‘술래잡기’도 하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도 하고, 역할 놀이도 한다. 아이들이 창조한 세계에서 그들의 규칙을 존중하는 제자들 덕에, 나는 자주 그 공간에서 쫓겨나곤 한다. 놀이에서 어른 역할은 필요 없기에, 나는 자동 퇴출 대상이고 이방인이다. 8살 아들은 “아빠가 우리 노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는, 나를 슬쩍 밀쳐낸다. 아빠는 ‘우리’가 아니다. 여기서 ‘우리’란 재미를 증폭해 주는 친구를 말하고, 새로운 규칙을 진심으로 인정하며 기꺼이 그 배역을 맡아 웃는 친구다.
아빠가 알면 재미없어지는 그들만의 비밀이 있다. 비밀은 가벼운 은밀함이다. 은밀함은 대부분 어른들이 유치하다고 정의 내린 것들이다. 궁금해 살짝 엿보았는데, 신통한 비밀 같은 것은 분명 없었다. 제자들이 사육사가 되면 아이들은 동물이 되어 복종하고, 반대로 아이들이 사육사가 되면 다 큰 제자들은 동물이 되는 등의 역할 놀이였다. 개나 소, 돼지와 말 등 역할 범위는 다양했다. 밥도 주고 잠도 재우고 먹이도 주다가, 가끔 싸우게도 했다. 가상 세계를 만들어 놓고 그 속으로 전력으로 들어가는 환상 놀이었다.
그들의 비밀은 작고 허약한 상자에 살포시 보관하고는, ‘비밀’이라고 크게 써 붙인 보물 상자 같다. 어른들 입장에선 별무소용이지만, 아이들은 이 소용 없음에 집중한다. 유용 없이 몰입한다. 그리고 몰입은 편견 없이 매섭다. 시간을 잡아채고 제 몸을 모두 소모해 버린다. 아닌 게 아니라 제자들과 노는 날은 아이들이 쉬려 하지 않고, 잠도 자려 하지 않는다. 잘 시간을 괴로워한다. 더 빠져들고 싶은 욕구가 몸이 주는 위험 신호를 과히 무시해 버린다. 때문에 자주 아프다. 반대로 제자들은 지쳐간다. 무용의 놀이를 정리하고, 유용 있는 자기들의 시간을 꾸리고 싶기 때문이다. 어른들은 몸이 지치면 쓸모를 고민한다. 아이들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서 바삐 이탈하고픈 신호가 강하다. 어른의 세계로, 질서의 틀로 회귀하고프다. 제자들의 몸이 아이들처럼 제 에너지를 탈진해 버린 지점에서 최초의 ‘논다’는 긍정은 ‘놀아준다’는 부정으로 바뀐다. 제자들에게 아이들이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아이들이 어서 쉬었으면 하는 바람일 테다. 그들도 나처럼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과의 놀이에서 어른들은 제자들처럼 자주 약해진다. 무엇인가 끝까지 몰입하는 데 간혹 어려움을 느낀다. 끝없는 반복은 피로하고 갑갑하다. 종착지점을 향해 매어 달리는 데는 익숙하지만, 종착 없는 달리기엔 허무하게 패배하기 일쑤다. 어른들은 이해되지 않으면 불안해하기까지 한다. 똑같은 놀이 방식을 무한히 반복하고, 반복되는 마디마디마다 차이를 발명하는 놀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반복은 무의미요, 무가치다. 반면 아이들의 놀이는 축제다. 반복이지만 같은 반복만은 아니다. 놀이는 매번 다르게 배치되고 새로운 형식이 구안되고 창조된다. 의미 없는 놀이임은 맞지만, 자기 것의 전부를 쏟을 만한 재미가 충분한 매혹적인 축제다. 질서를 창안하는 것보다 박진감 넘치는 유혹이 어디 흔하겠는가.
아이들의 놀이는 우연을 긍정하는 놀이다. 자세히 보면 놀이 방식이 미묘하게 자주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뜻을 찾겠다고 덤벼든 놀이가 아니기에 어떤 목적이 도드라지지 않는다. 결과 없는 과정이고, 긍정이다. 니체는 이것을 ‘우연이라는 하늘’에서 노는 풍경이라 쓴 적이 있다. “모든 사물 위에 우연이라는 하늘, 천진난만이라는 하늘, 의외라는 하늘, 자유분방함이라는 하늘”◆1을 품은 존재들의 놀이다. 이 하늘을 긍정하는 것이 진짜 축제다. 목적도 필연도 없다. 다만 그 긍정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몰입하는 시간, 끝까지 빠져드는 시간, 결과나 유용을 계산하지 않는 축복의 시간이다.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피로를 느끼지 않는 시간이고, 매번 반복해도 질리는 않는 시간이다. 권태와 반대편이 꼿꼿하게 선 시간이기에 천진난만하게 새롭다.
니체가 아이들을 존재의 사탑 맨 꼭대기에 세운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지닌 억센 정신”의 낙타에서, “자유를 얻어내고 의무에 대해서조차도 신성하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자까지 변신을 감행한 후에야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단계가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이고 최초의 운동이자 신성한 긍정”인 아이들이다.◆2아이들은 우연이란 하늘에서 부유하는 새롭고 거룩한 긍정이다. 그들의 놀이 덕에 어른들은 낙타처럼 메마른 근성에 살고 있는 자신의 굴레를 반추할 수 있고, 낯설게 수용할 수 있으며, 치유받기까지 한다. 근면과 성실과 유용과 필연이라는 빳빳한 의무의 세계를 밀어내고, 천진과 나만(懶慢)과 무요의 말랑한 세계를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건 아이들과 함께 살기 때문이다. 어른은 아이를 키우지만, 아이들을 통해 숙성된 존재로 발효될 수 있다. 아이들은 “창조의 놀이를 거룩하게 긍정”하게 하는 어른들의 교사인 셈이다. 아이들은 우연의 하늘에서 자신을 긍정하는 몰입을 즐기는 기술자며 장인이다.
 
2_ 마치 시인처럼
아이들이 자고 나면 제자들과 공부를 시작한다. 대략 늦은 9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다. 짧지 않은 기간을 빼놓지 않았기에, 공부 두께가 제법 쌓였다. 인간의 일곱 가지 감정을 해석한 ‘감정 이론’과, 청춘을 술과 함께 탐구한 ‘청춘인 문학’은 이미 종강했고, 지금은 ‘시인과 니체’를 공부한다. 시인 공부는 특히 우리에게 중요하다. 시인이야 말로 인간을 규정하는 언어를 끝막까지 밀어붙이는 존재들이기에 그렇다. 훌륭한 시인들을 일컬어 ‘언어의 연금술사’, ‘언어의 정원사’라고 부르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언어를 통해 인간성의 궁극을 실험하는 모험가며, 세상을 여행하는 고독한 실험가이기도 하다. 물론 니체가 비판한 낭만적인 수사가로서의 시인은 제외다. 우리에게 시인은『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파우스트』 같이 매섭게 아름다운 언어들을 자유자제로 다루는 존재고, 자기가 쓴 대로 삶을 애착하는 ‘적극적인 인간’이다. 우리가 선택한 시인이 백석, 이상, 정지용, 임화, 김수영, 신동문, 신동엽, 오장환, 천상병, 고은, 김남주, 황지우, 기형도인 이유도 이와 같다.
시인 수업에선 가르치는 내게도 숙제가 있다. 배운 시인처럼 살아내는 것이다. 지난주엔 오장환을 공부했기에, 일주일 동안 그처럼 사유하고, 행동하고, 느꼈다. 한국의 랭보, 1930년대 백석과 이용악 그리고 서정주보다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던 코뮤니스트, 오장환을 묘파(描破)하는 역할 놀이는 꽤 위험했고 신기했다. 코뮤니스트인 그를 따라 현재를 지배하는 세력들의 부조리가 역겨워 토해내기도 했다. 일주일 동안 정치 기사를 보고 자본주의 모순을 꾸역꾸역 그의 감성으로 견뎌 읽는 고통은 심히 아팠다. 그러나 오장환의 대표 시를 읽고, 그가 시를 썼던 그 시점에서 상상하고 물드는 일은 신기하기도 했다. 구체적인 설명을 위해 오장환의 시를 한 편 붙인다.
 
The Last Train

저무는 역두(驛頭)에서 너를 보냈다.
비애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청춘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병든 역사(歷史)가 화물차에 실리어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나는 이곳에서 카인을 만나면
목 놓아 울리라.
 
거북이여! 느릿느릿 추억을 싣고 가거라.
슬픔으로 통하는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3
 
오장환의 시상을 이해하기 위해 역사로 갔다. 그곳에서 시인 오장환이 느꼈던 감정을 자기 시선으로 재생하고 음미해 봤다. 예컨대 첫 행을 외며, 간직하고 있는 비애 목록을 작성하고, 비애를 보내야 하는 오장환의 마음과 나 자신을 대비하면서, 그의 마음을 추측하고 구체화했다. 묘사를 머릿속에 그린 후, 기차가 가는 풍경을 빗대어, 내 언어로 이미지화하고 이를 기록하기도 했다. 내 슬픔의 지도를 그리고 이를 긍정하는 훈련 또한 숙제의 한 영역이었다.
이러한 일련의 숙고에서 우리는 청춘의 찢긴 상흔들이 병들어 가는 고통을 비관하지 않고, 온몸으로 긍정하는 오장환을 만났고, 그와 대화할 수 있었다. 시적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시 공부가 아니라, 마치 시인처럼 시인의 입과 귀와 눈으로, 그와 같이 살아보는 공부다. 시뿐 아니라 시인을 탐독하는 공부는 시를, 세상을 아름답게 묘파하는 세련된 낭만만이 아니라, 비극적 환경을 긍정하고 독파하려는 의지를 학습하는 과정이다. 이런 공부 방식은 “가치들 자체의 가치가 파생하는 미분적 요소를 나타내는”◆4 비판 정신이라고 할 만하며, 비극까지도 긍정하려는 삶의 의지라고도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의 재해석 방식이 나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방식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공부 방식은 자주 마르고 권태롭다. 내가 바라본 방식, 나만이 경험할 수 있는 언어로 시인의 가치를 새로 발굴하는 공부가 더 깊고 더 옳다고 믿는다. 이것이 그 유명한 니체의 권력의지다.
역할 놀이를 통해 긍정적 놀이를 창안하는 아이들처럼, 우린 시인을 통해 비극적 상황을 긍정하는 권력의지를 느낀다. “비판으로부터 가치들을 박탈하고, 현행 가치들의 목록을 만들거나, 기존의 가치라는 이름 아래서 상황들을 비판하는 데 만족하는”◆5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시인이 되어 살아내는 것이다. 시인의 유전자가 따로 있다는 나태한 판단을 넘어, 시인이 되고 시인처럼 존재해 보는 시간을 얻는 것이다. 시인을 통해 내 생의 의미와 가치를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이다.
철학자 들뢰즈는 “어떤 것의 의미는 그것과 그것을 독점하는 힘의 관계이고, 어떤 것의 가치는 복합적인 현상인 한에서 사물 속에 표현되어 있는 힘들의 서열”이라 했다.◆6 나와 무관한 의미는 없으며, 나와 무위한 가치도 없다. 의미는 내 주변을 내 스스로 독점할 때 생겨나는 힘이고, 가치는 사물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때 얻어지는 힘이다. 내가 직접 의미와 가치에 관여할 때에만 그것들은 살아 있다.
아이들이 놀이 규칙을 창안하고, 그들이 만든 세상이 진실인 것처럼 믿는 것과 같이, 시인이 되겠다는 제자들과 내 시간은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생성하는 삶을 배우겠다는 의사(意思)다. 주어진 것을 받아 갖는 데 만족하지 않고, 없는 것이라도 발굴하는 노래며, 몰입이다. “긍정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의 짐을 떠맡는 것도 책임을 지는 것도 아니고, 살아 있는 것을 해방시키고, 짐을 덜어주는 것이다. 긍정하는 것은 가볍게 만드는 것이다. 우월한 가치들의 무게 아래서 삶에게 짐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삶의 가치들인 새로운 가치들을 창조하는 것이며, 그것은 삶을 가벼운 것, 적극적인 것으로 만든다.”◆7 가볍기에 나아갈 수 있는 한 끝까지 나아갈 수 있다.
끝까지 가보려는 배움의 방식, 그것이 나와 내 제자들이 시인을 통해 얻고자 하는 시간이다. 현학적인 수사나 낭만적인 시어를 부리는 사람이 시인은 아니다. 비극적인 상황에서도 비관하지 않고 긍정을 창조하며, 이를 지독하게 부여잡으려는 끈기의 존재가 바로 시인이다. 그것은 제자들과 내가 답습과 연습을 통해 얻고자 하는 존재방식이기도 하다. 마치 시인처럼, 마치 아이들처럼.
 
3_ 시인이 되겠습니다
시 수업을 하면서, 틈틈이 시를 쓴다. 올해 신춘문예에 도전하기 위함이다. 일곱 번째다. 거의 예선에서 낙방했지만, 도전을 끝내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대단한 시인이 되고자 하는 바람은 아니다. 시를 벼리잡고 내 삶 내부에 작은 영토로 충실하게 받아들이고픈 긍정적 욕심이다. 가을이 가면 나는 나 자신에게 시를 쓰라고, 시인이 되라고 명령한다. 자발적 구속이다. “모든 명령에는 시도와 모험이 따른다. 그리고 명령을 할 때 생명체는 언제나 자기 자신을 거는 모험을 한다.”◆8 나는 내게 모험하라 명령하고는, 그 명령하는 입술을 스스로 대견해 한다.
니체는 “모험과 위험, 목숨을 건 주사위 놀이, 이것이 더없이 큰 자가 하는 헌신”◆9이라 했다. 물론 내가 목숨을 걸 만큼 대단한 시인이 되겠다는 각오는 아니다. 니체의 위버멘쉬(초인)를 꿈꾸는 것도 아니며, 그런 그릇을 내가 구울 수 있다고 믿지도 않는다. 다만, 무명 가수 한돌의 노래 <꼴찌를 위하여>처럼 살고 싶은 바람을 가르치는 나 자신부터 실천하겠다는 의지는 다소 깊게 심장 속에 파여 있다. 노래 가사는 이렇다. 자랑이지만 하도 많이 불렀기에, 외워 쓴다.
 
지금도 달리고 있지 하지만 꼴찌인 것을 그래도 내가 가는 이 길을 가야 되겠지
일등을 하는 것보다 꼴찌가 더욱 힘들다
바쁘게 달려가는 친구들아 손잡고 같이 가보자
보고픈 책들을 실컷 보고, 밤하늘에 별님도 보고 이 산 저 들판 거닐면서 내 꿈도 지키고 싶다
어설픈 일등보다도 자랑스런 꼴찌가 좋다
가는 길 포기하지 않는다면 꼴찌도 괜찮은 거야
 
나를 거쳐 간 아이들에게 이 노래만은 필히 가르쳤다. 특히 “가는 길 포기하지 않는다면꼴찌도 괜찮은 거야.”라는 가사는 아이들의 가슴을 후비고, 외우도록 강요했다. 이유는 삶의 정답은 없어도 자기가 선택하고 창조한 삶의 방식만은 끝까지 가야 한다는 긍정을 아이들 삶에 뿌리박고 싶었기 때문이다. 비단 아이들뿐이겠는가. 시와 니체를 공부하는 어른이 된 내 제자들의 가슴에도, 내가 사랑하고 아끼는 소중한 사람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한돌의 노래가 기쁘게 자리하길 바란다. 모두가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마치 시인처럼 “보고픈 책들을 실컷 보고, 밤하늘에 별님도 보면서” 축제를 누릴 자격은 누구에게나 긍정돼야 할 가치가 아니겠는가.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인 아이들처럼, 마치 시인처럼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시인이 되겠다고 스스로에게 명령한다. 위대한 1등이 아니라 거룩한 꼴찌는 지긋지긋하게 꿈꾼다. 살랑살랑 웃으면서 지독하게 끝까지.
 
◆1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71쪽
◆2 같은 책, 40~41쪽
◆3 오장환, 『헌사』, 열린책들, 21~22쪽
◆4 질 들뢰즈, 이경신 역,『니체와 철학』,민음사, 17쪽
◆5 같은 책, 17쪽
◆6 같은 책,29쪽
◆7 같은 책, 319쪽
◆8 프리드리히 니체, 정동호 역,『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189쪽
◆9 같은 책, 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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