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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상으로 가르치다]역사채널ⓔ로 조선시대 여행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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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11-24 16:37 조회 13,127회 댓글 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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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영기 서울교육연수원 교육연구관
 
우리는 역사를 공부할 때 ‘기억해야 할 사실’로 접근하는 경향이 강하다. 연대기중심의 학습 방법에 집착하는 것, 왕조나 사건을 쉽게 암기하는 방법 등이 유행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역사채널ⓔ(http://home.ebs.co.kr/historye/etc/4/htmlMenu, 세련된 영상과 짧지만 강한 메시지로 우리 역사의 뒷이야기를 들려주는 역사 전문 프로그램을 표방하고 있다. 친숙하지만 낯선 역사의 현장을 발견하는 시간을 마련하여 역사를 통해 현재를 살아가는 지혜를 전하고자 EBS에서 제작한 프로그램이다. 홈페이지를 방문하여 ‘다시 보기’를 통해 무료로 시청할 수 있다. EBS영상을 처음 보는 이들에게는 ‘실버라이트(Silverlight)’라는 플러그인을 설치하라는 메시지가 나올 것이다. 화면의 안내에 따라 간단한 설치 과정을 거친 후 브라우저를 다시 시작하면 고해상도의 영상을 감상할 수 있다)는 EBS 지식채널ⓔ의 역사 버전이다. EBS는 역사가 박물관과 교과서 속에 있다고 지적하면서 “세련된 영상과 짧지만 강렬한 메시지로 잠들어 있던 우리 역사에 숨을 불어 넣자.”라고 제작의 변을 밝혔다. 말하자면 학생들이 역사 공부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역사가 박물관이나 교과서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사는 후세 사람들이 해석하고 재구성한다. 전문가가 제작한 영상을 활용하여 공부하면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것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르게 형성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사들은 왕조나 연대기 중심이 아니라 특정 주제 위주로, 인류사에 큰 전환점이 됐던 사건을 모아서 공부하는 방식, 그리고 당대를 사는 인간의 입장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방식 등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들의 역사 인식을 도와주어야 한다. 시험에 대비하여 정해진 진도를 소화해야 한다는 강박은 수업을 몰아치는 방식으로 이끈다. 이렇게 되면 생각하는 역사보다 기억하는 역사 공부로 빠진다. 이번 호에서는 역사 영상을 보조 자료로 하여 학생들의 올바른 역사 인식을 돕는 기회를 마련해 본다.

왕의 하루
http://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336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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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학생들이 공부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고 있다. 학교와 학원을 순회하며 많은 양의 지식을 기억하고 상기하는 공부는 학생들을 공부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학생들은 “내가 조선시대 왕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공부 따윈 던져 버리고 먹고 싶은 것 마음대로 먹고, 실컷 놀기만 할 텐데…”와 같은 상상을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정말 조선의 왕들은 충분히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었을까? 이 같은 의문을 가지고 역사채널ⓔ ‘왕의 하루’를 감상해 보자.
 
“즉위 후 정사를 주관하면서 노심초사하는 바람에 수염이 다 세어버렸다.”
–조선 19대 왕 숙종
 
“가슴 통증 때문에 울부짖어 숨이 끊어질 것 같다. 그런데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밀려드는구나. 죽어가는 사람 좀 살려주라. 그러면 나랏일에도 다행 아닌가.”
–조선 14대 왕 선조
 
“바쁜 틈에 백성들에게 내릴 글을 짓느라 며칠째 밤을 새우고 닭 울음을 듣는구나. 괴롭다. 책을 읽고 온갖 문서를 보느라 심혈이 모두 메말랐구나.”
–조선 22대 왕 정조
 
실록을 통해서 본 조선 왕들의 하소연이다. 도대체 어느 정도로 업무의 압박이 있었기에 수염이 다 세어버리고, 숨이 끊어질 것 같은 가슴 통증을 느끼고 심혈이 메마를 정도였을까 궁금하다. 영상은 조선 왕의 하루를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오전 5시~7시, 기상 및 문안 인사
오전 7시~9시, 아침공부 ‘조강’
오전 9시~10시, 아침 식사
오전 10시~낮 12시, 오전 업무
낮 12시~오후 1시 30분, 점심식사 및 낮 공부 ‘주강’
오후 1시 30분~3시, 오후 업무
오후 3시~5시, 야간 당직자 확인
오후 5시~7시, 저녁 식사 및 저녁 공부 ‘석강’
오후 7시~8시, 문안 인사
 
왕도 조강, 주강, 석강을 통하여 꼼짝없이 하루 세 시간 이상 세미나 방식으로 공부했고, 신하들이 궐을 나간 후에도 개인 공부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여기에 더하여 왕의 또 다른 업무가 있었다. 국가 제례 전날 제사에 쓰일 축문 작성, 부족한 독서와 백성들의 상소문 정독 등 왕의 비공식적 업무는 늦은 밤까지 계속되었다. 이처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왕의 24시간, 휴일이 없었던 1년 365일 중 ‘유일한 휴가’는 언제였을까?
 
 
 
조선의 갑(甲), 양반
http://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307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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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500년, 임금 아래 가장 높은 신분은 법적으로는 양인에 속했던 양반이었다. 양인에는 양반 외에도 중인, 상민(평민) 등이 있었다. 이들은 누구나 과거시험에 응시하여 관직에 진출할 수 있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토지 소유를 기반으로 경제력을 갖추고 학업에 매진할 수 있었던 양반가 자제들이 훨씬 유리한 조건에서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다. 특히 4대 안에 벼슬한 이가 없으면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양반들은 학문을 수양하고 관료가 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신분제가 완전하게 폐지되었다는 오늘날은 어떠한가? 모든 법적 권리는 보장받지만 기회가 다르게 주어진다는 것은 명백하다. 소위 ‘있는 집안’의 자제들은 어려서부터 경제력과 정보력을 바탕으로 대학진학과 취업에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한다. 봉건적 신분제는 사라졌으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내면의 신분제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이다. 영상은 오늘날 숨어 있는 신분제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양반에 대하여 ‘갑’이라는 이름을 붙여 추적한다.
 
 
 
조선 운동회
http://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298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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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5월 2일 아침, 조선의 수도 한성 동소문 밖 들녘에서 열린 조선 최초의 근대식 운동회에서 외국인 교사와 양반집 자제들이었던 조선인 학생들은 실랑이를 벌인다. 달리기를 할 때는 운동장을 왼쪽으로 돌라는 교사의 지시에 “오른편을 숭상하는 전통을 가진 조선의 양반이 어찌 몸을 왼편으로 기울인단 말이요?”라고 되묻고, 걸음 폭을 크게 하라는 교사의 말에 “여인의 몸으로 방정맞은 달음질을 치라니요! 처녀들 치마 속을 엿보려는 수작이 아닙니까!”라고 항변한다.
이 운동회가 있은 뒤 5월 5일자 독립신문에서는 “마음과 지각만 배양할 것이 아니라 조선 사람들이 몸 배양하는 것도 매우 소중한 일”이라 적었다. 이후 운동회는 애국계몽 정신과 합해져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1909년 개성 공사립학교연합운동회는 10만여 명의 인파가 몰려들기도 했다. 화들짝 놀란 일제는 1910년 국권 찬탈 후 연합운동회 금지령을 선포하였다. 이후 교내에서만 허락된 운동회는 황국신민의 신체 발달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 군국주의 전쟁을 위한 모의군사 훈련으로 변질돼 갔다. 엄중하게 되새겨 볼 일은 해방 후에도 이런 방식의 국가주의적 운동회의 잔재가 지속되지 않았는지 하는 점이다.
 
 
 
 
최초의 만화
http://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328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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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漫畵, comics)는 말풍선이나 자막 형태의 글과 그림을 합쳐 표현하는 시각예술의 하나이다. 15세기 유럽에서 만화가 시작되었다고 하는 시각도 있으며,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 이집트 상형문자가 만화의 원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이 그림과 말풍선이 함께 나오는 만화는 19세기 후반에 생겨났다. ‘만화’라는 말도 그때부터 사용됐다.
전문가들은 화가 이도영이 1909년 6월 2일 창간된 대한민보 창간호에 그린 삽화를 한국만화의 효시로 꼽는다. 알려진 대로 1909년은 일본의 내정간섭이 극에 달했던 시기였다. <대한민보> 창간호는 지면 한가운데에 한 칸짜리 그림을 배치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다. 이 그림은 한 남성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말풍선에 “국가 정세를 바르게 이해하고, 한민족의 혼을 통합하여, 백성의 목소리를 모아, 보도 내용을 다채롭게 하겠다.”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네 가닥 말풍선과 그림으로 표현된 방식 때문에 한국 최초의 만화로 불린다. 의사 표현 수단의 하나로 자리 잡은 만화는 혼란스러웠던 당시 사회의 여러 단면을 날카롭게 풍자하면서 독자들의 공감과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에 열광하는 대중들 때문에 심기가 불편했던 친일 내각과 일제는 검열을 핑계로 기사와 삽화를 수시로 삭제하며 <대한민보>에 압력을 가했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이 멸망하고 이틀 뒤인 8월 31일 <대한민보>는 폐간되었다. 신문의 폐간과 함께 삽화도 막을 내렸고 조선 최초의 만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배움의 놀이터
http://www.ebs.co.kr/tv/show?prodId=10000&lectId=10283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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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에서는 학교 교육에서 놀이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블록타임의 첫 교시가 끝나면 반드시 중간 놀이시간을 가졌다.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놀이를 권하는 이유는 쉬는 시간에 충분히 놀아서 에너지를 발산해야 다음 수업 시간에 집중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튼튼한 몸을 유지하여 무상의료를 실시하는 이 나라의 의료재정을 축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학교와 학원을 전전하며 놀아야 할 시간을 과잉 공부로 소비하고 있다.
우리 선조들은 어땠을까? 이 영상은 조선시대 서당에서 글 공부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놀이학습을 특별히 강조했음을 보여 준다. 벼슬이 적힌 판을 놓고 누가 먼저 높은 관직에 올라 퇴관하는지를 겨루는 ‘승경도 놀이’는 재미있게 놀이를 하는 과정에서 관직의 종류와 역할을 익히도록 했다. 책 한 쪽을 펼쳐놓고, 고을 이름에 해당하는 글자를 찾아 더 많이 적은 사람이 이기는 ‘고을 모둠 놀이’는 가보지 못한 여러 고을의 지명을 익혀 장차 목민관으로서 자질을 갖추게 하였다. 일정한 길이의 끈에 불을 붙인 뒤, 끈이 다 타기 전에 글을 짓는 ‘화승작’, 촛불에 눈금을 그어놓고 초가 그만큼 탈 때까지 시를 짓는 ‘각촉부시’는 순발력을 바탕으로 한 글쓰기 훈련이었다. 이렇듯 조선시대 서당의 놀이는 모두 학습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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