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이데아 [사서교사의 문해력 코칭 수업] 비경쟁 토론으로 우리의 해상도 올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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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11-04 15:17 조회 125회 댓글 0건본문
비경쟁 토론으로
우리의 해상도 올리기
허민영 전주 우림중 사서교사
독서 모임에서 서머싯 몸의 『달과 6펜스』를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이 책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나병에 걸려 시력을 잃고 천천히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에서 아내 아타에게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자신이 죽으면 집을 남김없이 전소시켜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타는 그의 요청대로 집을 태우는데, 그 과정에서 천재로 평가받던 그의 모든 작품도 사라집니다. 왜 스트릭랜드는 간절히 그려 온 자신의 그림을 모두 불태우길 원했을까요? 이 장면을 두고 사람들은 각기 다른 해석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작품 세계를 완성했지만 이내 허무와 경멸을 느꼈고, 그러한 부정적 감정의 표현으로 그림을 태웠다고 보았습니다. 하지만 타인의 해석은 저와 달랐습니다. 어떤 이는 그의 요청을 세속적인 삶으로부터의 완전한 단절이라 해석했으며, 다른 이는 그가 자신이 원하는 작품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좌절감의 결과라고 해석했습니다. 덧붙여 스트릭랜드가 작품을 불태워 달라고 하는 대목은 예술에 대한 그의 집착을 보여 주는 장면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작품 속에서 스트릭랜드는 자기 행동에 관한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입니다. 이처럼 생각과 해석을 자유롭게 나누는 것이 비경쟁 토론의 매력입니다.
비경쟁 토론의 매력은 정답이 없다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명확한 답을 찾아내는대신, 자신의 경험과 관점을 바탕으로 다양한 해석을 제시하는 방법의 토론입니다. 자신의 해석을 존중받으며 표현하는 기회는 전인교육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스스로 사고하고, 타인의 생각을 존중하며, 다양성 속에서 조화롭게 대화하는 비경쟁 토론은 탁월한 전인교육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비경쟁 토론을 문해력 수업에서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방법을 소개하겠습니다. 문해력 수업에서 할 수 있는 심화 단계 활동을 고민하는 선생님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질문’이 부재하는 사회
최근 챗gpt 같은 인공지능 도구를 수업이나 보고서 작성 등 일상에 자주 사용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습니다. 질문하는 능력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좋은 질문을 던지는 능력은 단순히 정확한 정보를 얻는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문제를 깊이 있게 탐구하고, 새로운 관점을 열어 주며, 더 나은 질문을 제시하게 합니다. 이는 최선의 의사결정을 도와주고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인공지능과 상호작용하는 현대 사회에서 좋은 질문을 하는 능력은 선택이 아닌 필수적 역량이 되었습니다.
질문의 중요성을 이야기할 때면 2010년 서울에서 열린 G20 폐막 기자회견을 떠올리게 됩니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 기자에게 질문권을 주었지만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민망함이 감돌던 순간은 14년이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 수많은 질문을 쏟아낸다고 하는데, 제가 중학교에서 만나는 학생들은 질문이 많지 않습니다. 왜 질문들이 점차 사라지게 되는 걸까요?
키워드 질문 만들기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이지도어 아이작 라비(Isidor Isaac Rabi)는 자신이 노벨 물리학상을 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어릴 적 어머니의 교육을 언급했습니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어머니는 “학교에서 어떤 질문을 했니?”라고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물어보는 일반적인 질문과 확연히 다른 관점입니다. 질문과 가깝게 지낸 그는 더 좋은 질문에 도달했고 그렇기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는지 모릅니다. 이처럼 질문하는 데도 연습이 필요합니다.
문해력 수업에서 비경쟁 토론을 할 때 질문 만들기는 가장 중요한 활동입니다. 저는 이 과정에서 키워드를 활용해 질문을 만듭니다. 방법은 간단합니다. 책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생각 그물로 정리한 후 핵심 키워드를 선정합니다. 그리고 그 키워드가 들어간 질문을 만듭니다. 이렇게 만든 질문은 핵심 키워드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중요한 가치가 들어가기 때문에 가볍지 않으며, 자신이 느낀 책의 주제와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김동식 작가의 『회색인간』을 읽은 후 학생들과 비경쟁 토론을 진행하면서 작성한 활동지를 예시로 들어 보겠습니다. 한 학생은 생각 그물을 통해 책 내용을 정리하면서 ‘회색’과 ‘빵’을 책의 핵심 키워드로 선정했습니다. 그 후 ‘회색’이라는 키워드에 주목해 “회색이란 단어는 책에서 어떤 뜻일까요?”라는 질문을 만들었습니다. 이 질문은 ‘회색’이 단순한 색을 넘어 어떤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는지 탐구하게 하는 좋은 질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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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둠 내 대표 질문 선정하기
내가 만든 질문에 답하는 시간도 유의미하지만, 서로의 질문을 나누는 시간 역시 중요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여러 학생이 하나의 모둠을 만들어 질문을 공유하게 합니다. 그런 다음, 모둠 내에서 대표 질문을 고릅니다. 이때 최대한 많은 학생이 만족하는 질문을 선정하기 위해 투표를 활용합니다. 투표 방법은 수업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제가 주로 사용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 번 투표하는 과정은 번거로울 수 있으나 학생들에게 숙고하는 시간을 충분히 주어 장난스럽거나 수업 의도에 맞지 않는 질문을 선택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비경쟁 토론에서 아이패드나 노트북 같은 전자기기를 활용하면 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모둠 활동이 가능합니다. 여러 사람의 의견을 실시간으로 모으고 공유할 수 있어서 수업이 한층 더 풍부해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비경쟁 토론에서 온라인 도구를 활용하면 앞서 설명한 질문 선정 역시 수월하게 할 수 있습니다. 패들렛(Padlet)에서 ‘좋아요’를 누르거나 알로(Allo)에서 ‘스티커’를 붙이는 등 직관적인 방식으로 의사를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온라인 도구 활용해 발표하기
발표는 모둠 내에서 토론한 내용을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개인의 생각을 청중 앞에서 표현하는 과정입니다. 발표 역시 온라인 도구를 활용하면 다양한 시청각 자료에 쉽게 접근하고 이를 공유할 수 있어 내용 전달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읽고 ‘타인이 설득해도 헤어지지 않을 만큼 사랑에 빠질 진정한 사랑이란?’이란 질문으로 토론한 적이 있습니다. 이때 한 학생이 온라인 도구를 활용해 모네의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1876) 작품을 보여 주며 발표를 이어갔습니다. 학생에게 진정한 사랑이란 모네 그림의 열정적인 피사체가 되었던 카미유와 같이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서로의 꿈을 실현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노력이었습니다.
비경쟁 토론: 나와 타인을 인식하는 연습
에리히 프롬(Erich Pinchas Fromm)의 책 속 한 구절을 통해 비경쟁 토론의 가치를 정리하려 합니다. 아끼는 대목인지라 저의 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생각이 더해지거나 덜어질까 무서워 문장을 그대로 옮기겠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인식할 수 있을 때에만 타인을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의식적 헌신이 곧 자신의 사적 공간을 포기한다거나 타인의 사적 공간을 침해한다는 뜻은 아니다. 사랑은 인식이지만, 또 인식이기 때문에 타인에 대한 존중이기도 하다. 우리가 자신에게 투명하다면 타인의 불투명은 인간의 가능성 안에서 투명해질 것이다.”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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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타인과 접촉을 통해 ‘나’를 인식합니다. 타인에게 분노나 애정 등 여러 감정을 느낄 때면 왜 그러한 감정이 찾아왔는지 고민합니다. 그렇게 타인을 통해 인식한 자아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과정에서 타인을 다시금 인식하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힘을 얻습니다. 비경쟁 토론은 ‘인식’을 위한 의도적 과정입니다. 이러한 의도적 인식이 학교 현장에서 이루어진다면 사회 구성원들은 타인을 존중하고 자신에게 투명해지는 쪽으로 걷게 될 것입니다. 문해력 수업이 비경쟁 토론으로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