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사려 깊은 번역가의 말 걸기] ‘나무 집’ 시리즈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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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4-04-02 10:56 조회 651회 댓글 0건본문
'나무 집' 시리즈가 끝났다
신수진 번역가
2012년부터 제주에서 인생 후반부를 시작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늘 계획표를 따라 꾸려 왔던 삶에서 탈피해 프리랜서 편집자로, 시민교육 활동가로, 귤밭에서 주말 농부로 일하며 한번 ‘되는 대로’ 살아 보기로 했다. 그러던 중 2014년에 어린이 도서 『13층 나무 집』의 번역 의뢰를 받았다. ‘나무 집이라니. 모든 어린이들의 꿈의 공간이잖아!’ 망설임 없이 덥석 번역을 맡았다.
나무 집’ 시리즈 번역의 고락
막상 책을 읽어 보고 처음 들었던 생각은 ‘아니, 지금 내가 뭘 읽은 거지?’였다. 나는 논리적이지 않은 이야기 전개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사람이다. 『13층 나무 집』은 다음 챕터, 아니 다음 페이지에서조차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안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갑툭튀’ 캐릭터들이 연속으로 등장했다. 이 책이 해외에서 왜 그렇게 큰 인기를 누리는지 좀처럼 납득이 되지 않았다. 내가 썩 흥미로워하지 않는 이야기를 독자들이 재미있게 느끼도록 번역할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지만 사람은 또 자신과는 반대되는 성향에 끌리기도 하는 법이지 않은가. 도전해 보기로 했다.
번역을 시작하며 책이 시리즈로 이어질 거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에는 2권 정도 더 이어져 『39층 나무 집』으로 마무리되겠지, 생각했다. 으하하. 많은 독자가 알다시피 내 예상은 크게 빗나갔다. 초반에는 책이 1년에 1권씩 나오다가 어느 순간부터는 1년에 2권씩 출간되기도 했다. 나무 집의 층이 높아질수록 출판사로부터 ‘최대한 빨리 번역 원고를 넘겨 달라’는 다급한 요청이 이어졌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 정도로 이 시리즈의 인기가 높아져 오래도록 출간이 이어질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어느 순간부터 원서 PDF를 받으면 가장 먼저 맨 마지막 페이지부터 읽었다. 다음 권 예고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130층까지 올라가서도 시리즈가 끝나지 않고 『143층 나무 집』 출간이 예고되어 있는 것을 확인했을 때는 약간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시리즈 출간 중에는 꼼짝없이 출간 일정을 삶의 중심에 놓고 살아야 하니까 말이다. 13×10인 130층에서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다음 희망은 13×13인 169층이구나 했는데, 결국 이 예측이 맞아떨어져 2024년 봄에 시리즈가 마무리된다. 돌아보니 꼬박 10년이 걸린 작업이었다.
어쨌거나 나는 이 시리즈의 인기 덕분에 조카들에게 굉장히 자랑스러운 이모가 되었다. 다른 재미난 책 번역도 꽤 많이 의뢰받아서 이제는 편집자나 시민교육 활동가, 농부보다 번역가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평소에 진지하기 짝이 없고 농담도 잘 못 하는 ‘노잼’ 인간이지만 ‘나무 집’ 시리즈의 저자들 덕분에 중급(?) 정도의 유머 감각은 장착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저자 앤디 그리피스는 1961년생, 그림작가 테리 덴톤은 1950년생으로 이들은 이미 60대, 70대다. 하지만 책은 물론이고 저자 홈페이지와 북토크 영상을 보아도 이들은 항상 어린이처럼 천진난만하고 낙관적이다. 세상을 향한 이런 긍정은 어디서 오는 걸까. 나도 이렇게 유쾌한 할머니로 살 수 있으면 좋겠다.
나와는 다른 마음을 읽어 내기
한때는 주인공 앤디와 테리의 캐릭터에 심각하게 불만을 가지기도 했었다. 기본적인 물리 법칙의 지배를 전혀 받지 않는 나무 집의 세계관이 못마땅했고, 배움과 지식이 별 쓸모없다는 듯 행동하는 주인공들의 무지성적인 면들도 마음에 걸렸다. 앤디는 숫자도 제대로 못 세지만 나무 집 건축을 척척 해내고, 테리는 2차원 그림으로도 복잡한 문제들을 척척 해결한다. 2016년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는 이러다가 어린이책에도 반지성주의가 몰아치는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까지 했다. 만약 내가 그에 일조하는 거라면 어쩌지? 이런 불안감 때문에 번역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항상 고정관념을 깨는 창의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테리와 여성 캐릭터 질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근심을 점점 덜 수 있었다.
그동안 학교를 다니는 데는 관심도 없었던 앤디와 테리, 질은 마지막 권에서 학교에 강제로 끌려간다. 그런데 이들은 학교를 완전히 다른 곳으로 탈바꿈시키고 만다. 이제야 나는 앤디와 테리가 배움에 대해, 지식에 대해 가졌던 불만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학교는 모두가 똑같은 곳에 앉아 똑같은 것을 똑같은 시간표에 따라 배우는 곳이 아니라, 각자 하고 싶고 잘하는 것을 더 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무 집’ 시리즈 주인공 앤디와 테리, 질은 독자들에게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를 뛰어넘는 더 큰 상상을 하고, 친구들을 모아서 멋진 꿈을 이루라’고 말하는 듯하다. 이들의 나무 집은 169층으로 완공되었지만, 독자들의 나무 집은 끝없이 올려 지어지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