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파랑새를 찾아 헤매는 우리가 궁극으로 안주해야 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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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04 17:17 조회 9,187회 댓글 0건본문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 줍니다.’라는 유명한 광고카피가 있었다. 모 회사가 지은 아파트 브랜드 광고였는데, 일반인들이 이 광고가 선전하는 값비싼 아파트의 화려함에 눈이 부실 때 프랑스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사회학자 홍세화 씨가 강하게 비판했던 생각이 난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인격적인 품성, 교양의 수준이 아니라 오직 아파트의 브랜드가 갖는 경제력만으로 평가되는 한국의 천박한 현실이 너무나 개탄스럽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 샐러리맨들에게 집 장만은 평생을 두고 치러야 하는 숙명적 과제다. 입지조건이 좋은 집, 명문대 진학을 위한 교육환경이 잘 갖추어진 집, 시장가치가 있는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징표가 된다. 부동산 가격의 흐름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팔고 사기를 되풀이하면서 평수를 늘려 경제자산을 부풀리는 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데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되는 중요한 항목이 된 지 오래다. 이 부분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쓴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순거주나 소유, 재산증식의 가치로 바라보는 집,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해 주는 매체로서의 집, 과시나 자랑의 수단이 되어 버린 집, 물리적 가옥만 있을뿐 가정이나 가풍, 주거문화는 전혀 없는 집, 이제 아파트는 더 이상 집이 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집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부의 가치로 환산되는 주거 소유에 대한 집착의 강도가 더할수록 오히려 심신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잃어버린 역설적 상황이 된 것이다. 현대인이 외로운 방황을 끝내고 편안히 정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집에 이르는 길은 안정된 삶을 찾아가는 상징이며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숙명적 과제와 직결된다. 이책은 결국 소박하나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집에 닿는 전제로 집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부제인 ‘집으로 문화 읽기’와 ‘건축으로 세상 읽기’는 책의 내용과 방향을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조상들이 살았던 전통적인 집과 마을을 오늘날의 아파트와 비교하면서 시대변화에 따른 공간구조의 변화가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와 시를 통해 사람들이 꿈꾸었던 집이 곧 행복한 삶의 구현체임을 보여 주며 오늘날 상업성 때문에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행복의 허상을 꼬집는다.
‘집과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2부는 부엌을 중심으로 생겨난 집의 원형을 밝히면서 집과 여성의 사회적학적인 관계를 조목조목 따진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여성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집이 유지되었으면서 정작여성은 그 집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역사와 가옥 구조를 보여 준다. 오늘날 아파트에서 인기 있는 드레스 룸이나 파우더 룸이 언뜻 여성을 우대하는 공간 같지만 실제로 여성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에서 소외시키며 여성을 비하하는 일면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3부에서는 우리나라만의 대표적 주거형태인 아파트에 대해 다룬다. 아파트가 다른 나라와 달리 성공한 이유와 끝없이 높아만 가는 주상복합아파트의 인기에 숨겨진 의도를 파헤친다.
아파트라는 획일적 공간을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삶의 내용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 직업이나 취미, 개성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지듯이 개인의 삶을 드러내는 문화가 삶의 공간 속에 구현될 때 모두 다르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비싼 가구들로 온통 치장하고 멋진 공간을 구성했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4부에서는 백화점, 성당과 사찰, 학교 등의 공공건물들에 내포된 보이지 않는 억압과 폭력성에 대해 성찰한다. 권력자들이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도구로 건축을 이용했음을 보여 준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도심에 즐비한 위풍당당한 대기업 사옥들은 중세나 근세의 성당이나 궁전을 대체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나 똑같은 교실 안의 교탁과 책상의 배치에서도 공간이 주는 폭력성을 살펴볼 수 있다. 교탁을 향해 반듯하게 줄이 맞춰진 획일적 배치는 교사의 일방적인 권력만이 허용되며 교사와 학생의 자연스러운 토론과 협의가 이루어지는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교실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대학입시라는 인생의 중차대한 일정을 앞에 두고 점수를 저울질하는 입시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다. 특별히 고3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인문계 학생들도 입시 족쇄에 묶여 십대 후반 자신들이 누려할 할 삶이 송두리째 유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생명이 계절의 순리에 맞춰 생명성을 키워가듯이 사람에게도 생명의 주기로서 무엇인가를 알아가야 하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대 후반기는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눈떠가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학과와 직업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오직 점수에 매달리며 점수에 미래를 맞춰버리는 비극적인 코미디 때문에 진정한 행복에 닿기까지 학생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어렸을 때 주머니를 뒤지면 쓸데없는 잡동사니만 가득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행복을 가리는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온갖 매체에서 화려하고 미끈하게 뽑은 행복의 이미지들이 마치 행복의 본질인 양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어린 학생들이 화려한 이미지의 허상을 걷어내고 실체를 파악하며 자신의 진정한 행복에 눈떠가는 과정은 마치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세계를 헤매던 지난한 과정과 유사하다.
또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우리 집에 닿기 위해 역사와 문화 속에서 온갖 집을 성찰하고 자신의 집에 이르는 길과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온갖 고생을 겪으며 파랑새를 찾는 데 실패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들의 집 정원에서 파랑새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행복의 본질은 집을 중심으로 우리 일상에 존재함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점에 소박한 집이 있다. 나 또한 언제나 현관문을 열어두고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집, 햇빛과 바람과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집한 채를 짓고 싶은 소망의 간절함이 언제고 부르고 있다.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그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나 인격적인 품성, 교양의 수준이 아니라 오직 아파트의 브랜드가 갖는 경제력만으로 평가되는 한국의 천박한 현실이 너무나 개탄스럽다는 것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 샐러리맨들에게 집 장만은 평생을 두고 치러야 하는 숙명적 과제다. 입지조건이 좋은 집, 명문대 진학을 위한 교육환경이 잘 갖추어진 집, 시장가치가 있는 집을 소유한다는 것은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았다는 징표가 된다. 부동산 가격의 흐름에 따라 시의적절하게 팔고 사기를 되풀이하면서 평수를 늘려 경제자산을 부풀리는 것 또한 현대를 살아가는 데 뛰어난 사람으로 평가되는 중요한 항목이 된 지 오래다. 이 부분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집』을 쓴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단순거주나 소유, 재산증식의 가치로 바라보는 집,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대변해 주는 매체로서의 집, 과시나 자랑의 수단이 되어 버린 집, 물리적 가옥만 있을뿐 가정이나 가풍, 주거문화는 전혀 없는 집, 이제 아파트는 더 이상 집이 되지 못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집 없이 떠돌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부의 가치로 환산되는 주거 소유에 대한 집착의 강도가 더할수록 오히려 심신이 온전히 쉴 수 있는 집을 잃어버린 역설적 상황이 된 것이다. 현대인이 외로운 방황을 끝내고 편안히 정착할 수 있는 자신만의 집에 이르는 길은 안정된 삶을 찾아가는 상징이며 동시에 자신의 행복을 어떻게 찾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숙명적 과제와 직결된다. 이책은 결국 소박하나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행복한 집에 닿는 전제로 집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을 담아내고 있다. 부제인 ‘집으로 문화 읽기’와 ‘건축으로 세상 읽기’는 책의 내용과 방향을 정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이 책은 총 4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에서는 조상들이 살았던 전통적인 집과 마을을 오늘날의 아파트와 비교하면서 시대변화에 따른 공간구조의 변화가 그곳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보여 준다. 그리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노래와 시를 통해 사람들이 꿈꾸었던 집이 곧 행복한 삶의 구현체임을 보여 주며 오늘날 상업성 때문에 이미지로만 남아 있는 행복의 허상을 꼬집는다.
‘집과 여성’이라는 제목으로 묶인 2부는 부엌을 중심으로 생겨난 집의 원형을 밝히면서 집과 여성의 사회적학적인 관계를 조목조목 따진다. 지난 수천 년 동안 여성의 끊임없는 희생으로 집이 유지되었으면서 정작여성은 그 집의 중심에서 소외되었던 역사와 가옥 구조를 보여 준다. 오늘날 아파트에서 인기 있는 드레스 룸이나 파우더 룸이 언뜻 여성을 우대하는 공간 같지만 실제로 여성을 생산적이고 창의적인 일에서 소외시키며 여성을 비하하는 일면을 갖고 있음을 지적한다. 3부에서는 우리나라만의 대표적 주거형태인 아파트에 대해 다룬다. 아파트가 다른 나라와 달리 성공한 이유와 끝없이 높아만 가는 주상복합아파트의 인기에 숨겨진 의도를 파헤친다.
아파트라는 획일적 공간을 벗어나기는 어렵지만 삶의 내용까지 똑같을 수는 없다. 직업이나 취미, 개성에 따라 삶의 내용이 달라지듯이 개인의 삶을 드러내는 문화가 삶의 공간 속에 구현될 때 모두 다르게 드러날 수밖에 없다. 비싼 가구들로 온통 치장하고 멋진 공간을 구성했다고 해서 행복한 삶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 4부에서는 백화점, 성당과 사찰, 학교 등의 공공건물들에 내포된 보이지 않는 억압과 폭력성에 대해 성찰한다. 권력자들이 피지배층을 억압하고 통제하는 도구로 건축을 이용했음을 보여 준다. 그런 이유로 오늘날 도심에 즐비한 위풍당당한 대기업 사옥들은 중세나 근세의 성당이나 궁전을 대체한 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어느 곳을 가나 똑같은 교실 안의 교탁과 책상의 배치에서도 공간이 주는 폭력성을 살펴볼 수 있다. 교탁을 향해 반듯하게 줄이 맞춰진 획일적 배치는 교사의 일방적인 권력만이 허용되며 교사와 학생의 자연스러운 토론과 협의가 이루어지는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교실은 흡사 전쟁터를 방불케 한다. 대학입시라는 인생의 중차대한 일정을 앞에 두고 점수를 저울질하는 입시생들의 얼굴에는 피곤함이 가득 묻어 있다. 특별히 고3만 그런 것이 아니다. 일반적인 인문계 학생들도 입시 족쇄에 묶여 십대 후반 자신들이 누려할 할 삶이 송두리째 유보당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생명이 계절의 순리에 맞춰 생명성을 키워가듯이 사람에게도 생명의 주기로서 무엇인가를 알아가야 하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십대 후반기는 자신의 내면의 욕구에 눈떠가며 자신의 행복을 위해 미래의 학과와 직업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런데 오직 점수에 매달리며 점수에 미래를 맞춰버리는 비극적인 코미디 때문에 진정한 행복에 닿기까지 학생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무엇인지 생각해 보면 가슴이 아려온다.
어렸을 때 주머니를 뒤지면 쓸데없는 잡동사니만 가득 나오는 것처럼 우리의 행복을 가리는 것들이 주변에 널려 있다. 온갖 매체에서 화려하고 미끈하게 뽑은 행복의 이미지들이 마치 행복의 본질인 양 끊임없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어린 학생들이 화려한 이미지의 허상을 걷어내고 실체를 파악하며 자신의 진정한 행복에 눈떠가는 과정은 마치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세계를 헤매던 지난한 과정과 유사하다.
또 작가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우리 집에 닿기 위해 역사와 문화 속에서 온갖 집을 성찰하고 자신의 집에 이르는 길과도 통한다고 볼 수 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가 온갖 고생을 겪으며 파랑새를 찾는 데 실패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 자신들의 집 정원에서 파랑새를 발견했다는 사실은 행복의 본질은 집을 중심으로 우리 일상에 존재함을 은유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정점에 소박한 집이 있다. 나 또한 언제나 현관문을 열어두고 이웃과 소통할 수 있는 집, 햇빛과 바람과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집한 채를 짓고 싶은 소망의 간절함이 언제고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