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아이러니, 내 독서력 길러준 저 불온한 시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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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8 14:47 조회 6,603회 댓글 0건본문
얼마 전 주말 어머니 집에 갔다. 결혼하기 전에 내가 쓰던 방은 어머니가 컴퓨터를 사용하는 방으
로 쓰신다. 책장에는 내가 남긴 책들이 아직도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젊은 날의 독서 편력을 다시 훑
어보는 맛에 찬찬히 책장을 둘러보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시집들, <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리뷰> 같은 계간지가 약간 바랜 채 꽂혀 있었다. 커다랗게 박여 있는 20여 년 전 연도들이
책의 나이와 연륜을 말하고 있다. 과거 독서 편력기를 반추하면서 책장을 둘러보던 중 한쪽 구석에
서 제목을 알 수 없는 책들을 열 권 남짓 발견했다. 책의 겉을 포장지로 한 번 싼 후 그 위에 비닐을
덧씌워 놓아서 제목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소중한 책이길래 이렇게 잘 싸 놓았나…. 한 권을 꺼내
펼쳐 보았다.
책표지를 포장지에 꼭꼭 싸서읽던 그때 그 시절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내지에는 깨알 같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생일을 축하한다, 투쟁!” 이런 맥락의 두 줄쯤의 덕담이 씌어 있었다. 마음이 타임머신을 타고 20여 년 전으로 날아갔다. 동아리 친구들이 생일 선물로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에서 사준 책.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군부독재가 서슬 퍼렇던 80년대 중반, 지하철역에서 학교 앞까지 가는 버스가 고개를 넘어갈 때쯤 버스 안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교문으로 향했다. 교문 앞에 전경버스가 서 있고, 불심검문을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면 버스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사회과학책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일면식도 없는 여학생의 핸드백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가방에서 꺼내 바지춤에 꽂아 넣는 학생도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랑이 꽃핀 친구도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게 어려웠던 당시,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늦은 밤, 은밀한 세미나를 하고 집에 가다가 친구와 불심검문에 걸렸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가방에서 발견된 것은 그들이 의심할 만한 책이었다. 의대생의 가방에서는 발견될 이유가 없는 제목. 경찰이 무전으로 그 책의 불온성 여부를 물어보려는 찰나, 마침 내 눈에 친구들이 적어준 생일 선물 문구가 들어왔다. “이 책 선물 받은 거예요. 어떤 미친 놈이 생일 선물로 불온서적을 선물하겠어요? 여기 여자 아이들 사인도 있죠?” 책장을 펼쳐 경찰에게 내보였다.
경찰은 책을 다시 빤히 보고 또 내 얼굴을 바라보다 귀찮다는 듯이 그냥 가라고 했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종류의 책을 보다 사복경찰에게 잡혀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던 시절. 책을 아끼는 마음도 컸지만 보안을 이유로 책을 포장해서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 지금껏 그 책이 내 책장 한구석에 자리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가린 채 다소곳이. 그 때만큼 치열하게, 자발적으로 읽은 적이 있을까 다른 책을 꺼냈다. 녹두에서 나온 『세계철학사』(세칭 세철 1,2,3). 밑줄을 참 많이도 그었고, 이런저런 노트나 요약도 많이 해 놓았다.
왜 거기에 밑줄을 그었는지 지금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꽤 치열하게 읽었던 모양이다. 당시 인문사회과학책은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전공을 불문하고 읽어야 했던 야전 교과서였다. 일본어를 중역하고 문맥도 어색한 데다,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겨우 한두 살 많은 선배의 강독을 통해 이해하기란 뻑뻑한 빵을 잼 하나 바르지 않고 물 한 모금 없이 우겨넣는 모양새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때만큼 치열하고 자발적으로, 또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읽었던 때가 있을까? 전문의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그렇게 열심히 또 재미있게 책을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종의 각인효과라고 할까? 나와 비슷한 시대를 경험한 이들이 지금 독서시장의 중추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들은 자발적 독서 훈련이 되어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도 말할 정도니 말이다. 교육정책이 아닌 열악한 사회환경이 책이라도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지금도 꾸역꾸역 책을 사들이고 읽어대며 아내의 눈총을 받곤 하는 원초적 경험이다.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는 지금, 책을 읽는 것이 ‘일’이긴 하지만, 그전에 즐거운 놀이다. 욕심껏 주문만 해 놓고 읽지 못한 책이 쌓여가는 것에 죄의식과 부채감만 커지는 것이 사실이나, ‘취미는 독서예요’라는 클리쉐cliche적인 말을 무조건반사같이 말할 수 있는 것, 또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 같이 몇백 페이지가 넘는 인문서를 어떻게든 파들어가려는 뚝심과 맷집은 아마 그 시절 포장지에 싸서 보던 책들을 통해 훈련된 ‘독서력’ 덕분이리라.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에 따르면, 중년이 되면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하고 기억력도 감퇴하지만 상대적으로 유연성이 좋아지고, 연관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능력은 도리어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요새 즐겨 읽는 책은 김용석의 『철학정원』, 이택광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분야가 충돌하여 새로운 통찰을 주는 것들이다.
로 쓰신다. 책장에는 내가 남긴 책들이 아직도 여러 권 꽂혀 있었다. 젊은 날의 독서 편력을 다시 훑
어보는 맛에 찬찬히 책장을 둘러보았다.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오는 시집들, <창작과비평>, <문학과
사회>, <리뷰> 같은 계간지가 약간 바랜 채 꽂혀 있었다. 커다랗게 박여 있는 20여 년 전 연도들이
책의 나이와 연륜을 말하고 있다. 과거 독서 편력기를 반추하면서 책장을 둘러보던 중 한쪽 구석에
서 제목을 알 수 없는 책들을 열 권 남짓 발견했다. 책의 겉을 포장지로 한 번 싼 후 그 위에 비닐을
덧씌워 놓아서 제목을 알 수 없었다. 얼마나 소중한 책이길래 이렇게 잘 싸 놓았나…. 한 권을 꺼내
펼쳐 보았다.
책표지를 포장지에 꼭꼭 싸서읽던 그때 그 시절
블라디미르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내지에는 깨알 같은 글들이 적혀 있었다. “생일을 축하한다, 투쟁!” 이런 맥락의 두 줄쯤의 덕담이 씌어 있었다. 마음이 타임머신을 타고 20여 년 전으로 날아갔다. 동아리 친구들이 생일 선물로 학교 앞 사회과학서점에서 사준 책.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군부독재가 서슬 퍼렇던 80년대 중반, 지하철역에서 학교 앞까지 가는 버스가 고개를 넘어갈 때쯤 버스 안 학생들의 시선은 모두 교문으로 향했다. 교문 앞에 전경버스가 서 있고, 불심검문을 하고 있는 것이 포착되면 버스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사회과학책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일면식도 없는 여학생의 핸드백에 넣어달라고 부탁하기도 하고, 가방에서 꺼내 바지춤에 꽂아 넣는 학생도 있었다. 그 와중에 사랑이 꽃핀 친구도 있었다.
평범한 삶을 사는 게 어려웠던 당시,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어떤 늦은 밤, 은밀한 세미나를 하고 집에 가다가 친구와 불심검문에 걸렸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 가방에서 발견된 것은 그들이 의심할 만한 책이었다. 의대생의 가방에서는 발견될 이유가 없는 제목. 경찰이 무전으로 그 책의 불온성 여부를 물어보려는 찰나, 마침 내 눈에 친구들이 적어준 생일 선물 문구가 들어왔다. “이 책 선물 받은 거예요. 어떤 미친 놈이 생일 선물로 불온서적을 선물하겠어요? 여기 여자 아이들 사인도 있죠?” 책장을 펼쳐 경찰에게 내보였다.
경찰은 책을 다시 빤히 보고 또 내 얼굴을 바라보다 귀찮다는 듯이 그냥 가라고 했다. 공공장소에서 그런 종류의 책을 보다 사복경찰에게 잡혀가는 일도 비일비재하던 시절. 책을 아끼는 마음도 컸지만 보안을 이유로 책을 포장해서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 지금껏 그 책이 내 책장 한구석에 자리 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을 가린 채 다소곳이. 그 때만큼 치열하게, 자발적으로 읽은 적이 있을까 다른 책을 꺼냈다. 녹두에서 나온 『세계철학사』(세칭 세철 1,2,3). 밑줄을 참 많이도 그었고, 이런저런 노트나 요약도 많이 해 놓았다.
왜 거기에 밑줄을 그었는지 지금 봐서는 알 수 없었다. 아마도 꽤 치열하게 읽었던 모양이다. 당시 인문사회과학책은 대부분의 대학생들에게 전공을 불문하고 읽어야 했던 야전 교과서였다. 일본어를 중역하고 문맥도 어색한 데다,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내용을 겨우 한두 살 많은 선배의 강독을 통해 이해하기란 뻑뻑한 빵을 잼 하나 바르지 않고 물 한 모금 없이 우겨넣는 모양새와 같았다. 그렇지만 그때만큼 치열하고 자발적으로, 또 일종의 사명감을 가지고 책을 읽었던 때가 있을까? 전문의 시험을 준비할 때에도 그렇게 열심히 또 재미있게 책을 읽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종의 각인효과라고 할까? 나와 비슷한 시대를 경험한 이들이 지금 독서시장의 중추를 이끌고 있다고 생각한다. 혹자들은 자발적 독서 훈련이 되어 있는 마지막 세대라고도 말할 정도니 말이다. 교육정책이 아닌 열악한 사회환경이 책이라도 읽지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만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것이 지금도 꾸역꾸역 책을 사들이고 읽어대며 아내의 눈총을 받곤 하는 원초적 경험이다.
정신과 의사로 일하며 책을 내기 위해 글을 쓰는 지금, 책을 읽는 것이 ‘일’이긴 하지만, 그전에 즐거운 놀이다. 욕심껏 주문만 해 놓고 읽지 못한 책이 쌓여가는 것에 죄의식과 부채감만 커지는 것이 사실이나, ‘취미는 독서예요’라는 클리쉐cliche적인 말을 무조건반사같이 말할 수 있는 것, 또 제레미 리프킨의 『공감의 시대』, 매트 리들리의 『이성적 낙관주의자』 같이 몇백 페이지가 넘는 인문서를 어떻게든 파들어가려는 뚝심과 맷집은 아마 그 시절 포장지에 싸서 보던 책들을 통해 훈련된 ‘독서력’ 덕분이리라. 『가장 뛰어난 중년의 뇌』에 따르면, 중년이 되면 한 가지 일에 집중을 하고 기억력도 감퇴하지만 상대적으로 유연성이 좋아지고, 연관되지 않아 보이는 것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능력은 도리어 강해진다고 한다. 그래서 요새 즐겨 읽는 책은 김용석의 『철학정원』, 이택광의 『영단어 인문학 산책』, 레베카 코스타의 『지금, 경계선』처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분야가 충돌하여 새로운 통찰을 주는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