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깊게 일기 - 조선족 아이들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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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17 22:55 조회 6,755회 댓글 0건본문
내겐 부모에게 사랑 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있다. 칭찬보다는 꾸지람을 들어왔다. 부모와 같이 밥을 먹고, 얘기도 하지만 왠지 불편하고 쑥스럽다. 상처를 이겨낸 것 같아도 마주 대하기 머쓱하다. 치유서적을 읽고 일기를 쓰며 종교에 의지하지만 때론 격한 감정을 추스를 수 없다. 어쩌면 부모 또한 무뚝뚝한 딸에게 서운함을 느낄 것이다. 어색한 관계를 변화시키고 싶지만 좀처럼 되지 않는다. 그만큼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낫기 힘들다는 뜻이다.
『만주의 아이들』은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의 이야기다. 현재 200만 조선족 중 40만이 한국에 나와 있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만주에 남겨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다. 10년이 넘도록 부모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한국으로 취업 나간 40만 중에서 4분의 1이 이혼을 한 상황이라면? 더는 이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다는 생각, 아이들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작가를 움직였다고 한다. 작가는 길림성 집안·통화·유하·매하구·용정 등 현지에 남은 사람들을 직접 취재했다. 교사와 아이는 학부모(부모)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교사는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빈집들을 보면서 돈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사람들이 저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구나.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기 분신들을 헌신짝처럼 팽개칠 수 있지요?” (30쪽)
“초중생이면 신체와 정신이 얼마나 예민할 때입니까. 생리도 하고 여드름도 나고 이성에 눈을 뜨기도 하고, 대체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적만 묻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힘든 강을 건너고 있는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33쪽)
“아이들이 무슨 방부제도 아니고, 제대로 된 사상과 품성을 갖춘 부모였다면 저렇듯 기약 없이 방치하진 않았을 겁니다. 설령 일류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더라도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학생이 나중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34쪽)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교사가 대변을 한들 당사자의 심정을 100% 느낄 수 없을 게다.
“이 집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저라는 존재성 때문에 무척 힘들었슴다. 부모님을 마주할 때면 배신감이 차올랐슴다.” (144쪽)
“네 살 때 헤어진 아빠를 소학교 5학년이 되어설랑 만나고 나니 되쎄 어색하고 어려웠단 말임다. 부모님과 저희들, 서먹서먹할 때가 더 많단 말임다. 그런 말도 있잖슴까. 몸이 멀리 있으매 마음마저 뒤처진다는. 아무리 부모라도 자꾸 얼굴을 맞닥뜨려야 정도 들고 친근감도 생겨나는 거 아닙네까.” (147쪽)
“친구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뭐란 줄 아세요? 한국은 지구촌에서 당장 사라져야 할 국가라고 했습니다.” (264쪽)
작가는 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서문에서 밝혔듯 조선족 부모의 복잡한 사정과 상황을 헤아려 달라고, 사랑은 영원할 수도 있고 은연중에 이별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우린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우는 존재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어쩌면 어느 노인의 말처럼 ‘한국 취업 바람’은 언젠가는 터질 물꼬였는지 모른다. 자본주의 그늘 아래 힘들게 농사 지어 사는 시절은 끝났으니까. 그럼에도 만주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작가 역시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일에 한국도 얼마간 책임이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 노동자에 가하는 무시와 차별은 잘 알려져 있다.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족들은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노름과 한탕주의에 빠진다. 한국에 다녀온 뒤 병마에 고생하는 이가 늘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인생에 뒤늦게 가슴 치는 자도 허다하다. 이를 인간의 약함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가 조선족에게 빚을 지기 전에 그들은 우리 동포이기도 하다.
얼마 전, 영화 <푸른 강은 흘러라>(강미자, 2008)를 봤다. 열일곱 철이는 두만강처럼 늘 푸르게 살자고 다짐하지만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엄마가 죽고 만다. 갑자기 영화 <황해>(나홍진, 2010)가 떠올랐다. 택시기사 구남이는 청부살인을 의뢰받고 빚도 해결할 겸, 6개월째 소식이 없는 아내를 만나러 황해를 건넌다는 내용이다. 너무 잔인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 기억이 난다. 끔찍한 상상을 했다. 철이는 곧 구남이가 되지 않을까 하고. 앞으로 10년 뒤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는 교사의 말이 가슴을 짓누른다.
성장기에 받은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살아가는데 분명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정체성이든, 인간관계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든지 간에 말이다. 가족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비상구를 찾으려 애써도 무척 힘겨울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만주의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아주 클 거라고 가늠해본다. 그 상태로 자라난 어른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 책을 보는 내내 연민에 빠지고 걱정한다. 많이 외롭고 힘들겠구나. 그저 안쓰러운 마음으로, 어린 나를 돌보는 심정으로 자기와의 싸움 잘 치르길 기도한다.
『만주의 아이들』은 부모를 한국으로 떠나보낸 조선족 아이들의 이야기다. 현재 200만 조선족 중 40만이 한국에 나와 있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만주에 남겨진 아이들이 겪는 고통이다. 10년이 넘도록 부모님의 얼굴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면? 한국으로 취업 나간 40만 중에서 4분의 1이 이혼을 한 상황이라면? 더는 이 상황을 강 건너 불구경할 수 없다는 생각, 아이들을 만나 봐야겠다는 생각이 작가를 움직였다고 한다. 작가는 길림성 집안·통화·유하·매하구·용정 등 현지에 남은 사람들을 직접 취재했다. 교사와 아이는 학부모(부모)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 교사는 말한다.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빈집들을 보면서 돈이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사람들이 저렇게 한순간에 변할 수 있구나. 어떻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기 분신들을 헌신짝처럼 팽개칠 수 있지요?” (30쪽)
“초중생이면 신체와 정신이 얼마나 예민할 때입니까. 생리도 하고 여드름도 나고 이성에 눈을 뜨기도 하고, 대체 이걸 아는지 모르는지 성적만 묻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힘든 강을 건너고 있는지는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말입니다.” (33쪽)
“아이들이 무슨 방부제도 아니고, 제대로 된 사상과 품성을 갖춘 부모였다면 저렇듯 기약 없이 방치하진 않았을 겁니다. 설령 일류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더라도 부모님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학생이 나중에 더 훌륭한 사람이 되어 있지 않을까요.” (34쪽)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교사가 대변을 한들 당사자의 심정을 100% 느낄 수 없을 게다.
“이 집에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저라는 존재성 때문에 무척 힘들었슴다. 부모님을 마주할 때면 배신감이 차올랐슴다.” (144쪽)
“네 살 때 헤어진 아빠를 소학교 5학년이 되어설랑 만나고 나니 되쎄 어색하고 어려웠단 말임다. 부모님과 저희들, 서먹서먹할 때가 더 많단 말임다. 그런 말도 있잖슴까. 몸이 멀리 있으매 마음마저 뒤처진다는. 아무리 부모라도 자꾸 얼굴을 맞닥뜨려야 정도 들고 친근감도 생겨나는 거 아닙네까.” (147쪽)
“친구가 자신의 머리채를 쥐어뜯으면서 뭐란 줄 아세요? 한국은 지구촌에서 당장 사라져야 할 국가라고 했습니다.” (264쪽)
작가는 이들 사이를 중재한다. 서문에서 밝혔듯 조선족 부모의 복잡한 사정과 상황을 헤아려 달라고, 사랑은 영원할 수도 있고 은연중에 이별이 찾아올 수도 있다고, 우린 사랑 때문에 웃고 사랑 때문에 우는 존재들이 아니냐고 하면서. 어쩌면 어느 노인의 말처럼 ‘한국 취업 바람’은 언젠가는 터질 물꼬였는지 모른다. 자본주의 그늘 아래 힘들게 농사 지어 사는 시절은 끝났으니까. 그럼에도 만주의 아이들을 생각하면 작가 역시 씁쓸함을 감추지 못한다.
이 일에 한국도 얼마간 책임이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 노동자에 가하는 무시와 차별은 잘 알려져 있다. 고향으로 돌아간 조선족들은 쉬이 적응하지 못하고, 노름과 한탕주의에 빠진다. 한국에 다녀온 뒤 병마에 고생하는 이가 늘어가고, 돌이킬 수 없는 인생에 뒤늦게 가슴 치는 자도 허다하다. 이를 인간의 약함 때문이라고만 볼 수 있을까. 의도하건 의도하지 않았건, 우리가 조선족에게 빚을 지기 전에 그들은 우리 동포이기도 하다.
얼마 전, 영화 <푸른 강은 흘러라>(강미자, 2008)를 봤다. 열일곱 철이는 두만강처럼 늘 푸르게 살자고 다짐하지만 한국으로 돈 벌러 간 엄마가 죽고 만다. 갑자기 영화 <황해>(나홍진, 2010)가 떠올랐다. 택시기사 구남이는 청부살인을 의뢰받고 빚도 해결할 겸, 6개월째 소식이 없는 아내를 만나러 황해를 건넌다는 내용이다. 너무 잔인해서 눈을 질끈 감아버린 기억이 난다. 끔찍한 상상을 했다. 철이는 곧 구남이가 되지 않을까 하고. 앞으로 10년 뒤 우리 학생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으냐는 교사의 말이 가슴을 짓누른다.
성장기에 받은 상처는 성인이 되어서도 살아가는데 분명 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정체성이든, 인간관계든, 구체적인 삶의 모습이든지 간에 말이다. 가족과 상관없이 자신만의 비상구를 찾으려 애써도 무척 힘겨울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추어 만주의 아이들이 받은 상처가 아주 클 거라고 가늠해본다. 그 상태로 자라난 어른의 삶이 결코 만만치 않을 거라고. 책을 보는 내내 연민에 빠지고 걱정한다. 많이 외롭고 힘들겠구나. 그저 안쓰러운 마음으로, 어린 나를 돌보는 심정으로 자기와의 싸움 잘 치르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