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책 , “나는 누구인가”에 대 한 답을 제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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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2-21 22:48 조회 7,310회 댓글 0건본문
아마도 뭉크를 모르시는 분은 없을 겁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인 에드바르 뭉크의 작품 <절규>가 유명하기 때문이지요. 뭉크는 1893년에 완성한 <절규>에서 괴기스러울 정도로 뒤틀린 한 인물을 묘사합니다. 이를 두고 평자들은 겉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내면의 분열과 좌절 등을 묘사했다고 말합니다. <절규>를 기반으로 변형시킨 작품만 해도 50점이 넘는 것을 보면 뭉크는 이 작품에 애착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그런 점에서 내면세계에 대한 진지한 탐구, 잠재의식에 관한 끊임없는 관심, 자아에 대한 발견 등은 뭉크가 그림을 통해 한평생 탐구하고자 했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지에 대한 논쟁이 없지 않으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꽤나 진중한 주제여서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그 무엇입니다. 뭉크는 수많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 즉 자아에 접근해갔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미완성인 제10번을 포함해 모두 11개의 교향곡을 통해 작곡가 스스로는 물론 청중의 자아와 내면에 말을 걸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결국 자아와 내면, 즉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다시, 그것을 통해 온전한 삶의 자리를 영위해 갔습니다. 숱한 미술작품과 음악작품에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깃들어 있다면, 인간 정신의 온전한 발현체인 책과 텍스트에는 얼마나 많은 물음과, 또 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을까요!
루소, 더불어 함께 사는 인간을 향한 꿈
격동의 세기였던 18세기, 그 중에서도 격랑이 일었던 프랑스에서 사상계의 이단아로 이름 높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사회계약론』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입니다. 루소는 『에밀』의 제1부 첫 문장에서 인간의 좌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 루소가 설정한 인간의 좌표는 암울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부정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인류에게 닥친 모든 위기는 기실 인간이, 아니 내가 만들어낸 자연의 역습인 셈입니다.
루소는 이런 인간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주장합니다. “식물은 재배에 의해 성장하고, 인간은 교육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죠. 루소가 주장한 교육의 방법은 자연의 교육, 사물의 교육, 인간의 교육입니다. 그러나 자연과 사물의 교육은 인간의 역량 밖의 일인지라 인간의 교육만이 유일하고도 적절한 방법이죠. 하지만 그것마저도 인간 스스로 주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책과 가족, 또래로부터 고립되는, 즉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천성적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교육만이 인간의 본래 좌표를 되찾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같은 루소의 철학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지극히 이상적인 루소의 교육관은 당대 귀족들에게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 뒤를 잇는 루소의 주장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아마도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연인은 수의 한 단위의 정수整數의 경우처럼,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는 독립적인 실체이다.
분모에 의해 그 값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분수의 분자처럼, 사회인의 가치는 사회적 유기체라는 전체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킬 수 있고,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박탁하여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으며, 자아를 하나의 공통된 단위, 즉 사회 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제도이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을 더 이상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유기체와 같은 단위의 부분으로 생각하게 되고, 전체 속에서만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혹자는 루소를 개인주의교육을 부추기는 주범이라 말하지만, 실상 루소가 말한 인간의 좌표,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에 다름 아닙니다.
만 인의 진정한 사람다움을 추구한 다산 정약용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시원始原을 묻는 질문과 대답에 있어 서양 철학보다는 동양의 사상이 훨씬 더 웅숭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먼저 공자를 살펴보죠.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 같이 말합니다. “사람다움이란 자기가 서고 싶은 대로 주위 사람을 세우고, 자기가 이르고 싶은 대로 주위 사람을 이르게끔 한다. 가까운 일상에서 유추를 끌어낼 수 있으면 그것이 사람다움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를 “상갓집의 개”로 낮춰보기도 하지만, 난세인 춘추전국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덕’에 기초한 정치, ‘인’에 바탕을 둔 위정자의 자기개조를 부르짖었던 공자입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평생 인仁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앞세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노자는 사람다움에 대해 애초부터 조금은 부정적입니다. “천지는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고 만물을 풀로 만든 강아지로 여긴다. 성인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백성들을 모두 풀로 만든 강아지로 여긴다. 천지 사이는 사랑이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그냥 불어서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와 같을 뿐이다.” 어릴 적 즐겨보던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의 투덜이 스머프가 생각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물론 노자의 지적은 지도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보면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 일갈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사람다움이 꼭 부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백성을 사랑하는 성인이 없다”고 지적한 것은 그러한 성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간절한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천지 사이에 털끝만큼도 없는 사랑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것이 노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의 핵심은 아닐까, 하고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퇴계와 율곡, 다산 등 석학들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퇴계는 『근사록』에서 “가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이야기했고, 율곡은 “안으로는 차분하게 내 안, 즉 마음에서 진리를 찾고 밖으로는 생기 있게 활발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움직임을 잘 살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퇴계와 율곡은 비록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사람다움의 길은 내 안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다산 정약용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했을까요? 다산이 학문을 닦은 목적을 어떤 이는 “건강하고 공정한 사회의 회복”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신분의 차별은 물론 빈곤의 양극화가 유별났던 조선 시대에서 정약용은 “깨끗하고 고결한 (사대부) 개인의 구원만큼이나 힘겹고 시끄럽고 더러운 사회(민중)의 구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에게 사람다움이란 사대부만의 것이 아니라 반상의 구분 없이 이뤄져야 하는 궁극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실학적 학풍은 학문적 지향일 뿐 아니라 만인萬人의 진정한 사람다움을 추구한 휴머니즘이라고 추켜세워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마침 동양의 모든 고전을 속속들이 다 뒤지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정리된 한 권의 책이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신정근 교수가 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라는 시리즈의 명칭처럼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명징한 답을 전해줍니다. 물론 “인仁”의 3천 년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인仁을 추구하는 주체가 인人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자 연, 참 나를 만나는 공간
시절이 하수상하니 귀향 혹은 귀농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심정으로 귀향과 귀농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참 나를 찾기 위해 귀향·귀농을 선택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보면 21세기를 산다고는 볼 수 없는 도인풍의 사람들이 등장하죠. 경쟁이 일상화된 도시의 생활과 는 달리 그들의 삶에는 평화와 애덕이 넘칩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경쟁이 없다는 것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또 경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고요하게 집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시에 산다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편견이지만, 루소나 스피노자가 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로서의 인간에 그들의 삶의 조건이 훨씬 가까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연으로의 귀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입니다. 극도의 상업주의와 산업주의에 반대하며 월든 호숫가 숲속에 손수 오두막집을 짓고 2년간 홀로 생활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는 그곳에서 직접 노동함으로써 최소한의 비용으로 삶을 꾸렸고, 그 외의 모든 시간은 독서와 사색, 자연과의 교감에 할애합니다. 단순하고 자족적이며 독립적인 삶은 소로 자신의 내면과 독대하는 시간이었고, 이후 ‘자발적 고립’의 삶의 모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연으로의 회귀와 자아 성찰에서 놓치면 안 될 부부가 있죠. 바로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입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에 대학교수라는 든든한 뒷배를 초개와 같이 버린 부부는 버몬트와 메인의 숲속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개척합니다.
세계대전, 대공황 등으로 이미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미국, 아니 그와 같은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는 자각은 자급자족으로 이어졌고, 결국 땅에 뿌리박은 삶, 조화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삶은 현실에 뿌리박은 진정한 영성적 삶이었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천착한 삶이었습니다. 물론 이 땅에도 그와 같은 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이름 모를 숱한 현자들이 자연과 벗하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묻고 답하며, 물질만능과 경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로 살아갑니다. 제가 윤구병 선생이 변산에서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를 새해가 되면 꼭 읽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고 전, 오늘을 새롭게 할 인류의 자양분“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온전한 한 인격으로, 자신만의 물음과 대답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대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대답에도 이단과 사이비가 버젓이 주인인 양 행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책, 그 중에서도 고전으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고전은 “세상 누구나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전은 오늘 새롭게 읽어야 할 인류의 자양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고전의 세계를 누비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지 않으시렵니까? 물론 그 답도 여러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말인지에 대한 논쟁이 없지 않으나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꽤나 진중한 주제여서 쉽사리 접근하기 어려운 그 무엇입니다. 뭉크는 수많은 그림을 통해 자신의 내면, 즉 자아에 접근해갔고,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는 난해하기로 유명한, 미완성인 제10번을 포함해 모두 11개의 교향곡을 통해 작곡가 스스로는 물론 청중의 자아와 내면에 말을 걸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삶은 결국 자아와 내면, 즉 “나는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과정이며 다시, 그것을 통해 온전한 삶의 자리를 영위해 갔습니다. 숱한 미술작품과 음악작품에도 “나는 누구인가”
라는 물음이 깃들어 있다면, 인간 정신의 온전한 발현체인 책과 텍스트에는 얼마나 많은 물음과, 또 그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을까요!
루소, 더불어 함께 사는 인간을 향한 꿈
격동의 세기였던 18세기, 그 중에서도 격랑이 일었던 프랑스에서 사상계의 이단아로 이름 높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인간 불평등 기원론』, 『에밀』, 『사회계약론』 등의 저작으로 유명한 장 자크 루소입니다. 루소는 『에밀』의 제1부 첫 문장에서 인간의 좌표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조물주는 모든 것을 선하게 창조했으나, 인간의 손길이 닿으면서 모든 것은 타락하게 된다.” 루소가 설정한 인간의 좌표는 암울하지만,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보면 부정할 수만은 없어 보입니다. 인류에게 닥친 모든 위기는 기실 인간이, 아니 내가 만들어낸 자연의 역습인 셈입니다.
루소는 이런 인간이 바로서기 위해서는 ‘교육’이 절실하다고 주장합니다. “식물은 재배에 의해 성장하고, 인간은 교육을 통해 형성”되기 때문이죠. 루소가 주장한 교육의 방법은 자연의 교육, 사물의 교육, 인간의 교육입니다. 그러나 자연과 사물의 교육은 인간의 역량 밖의 일인지라 인간의 교육만이 유일하고도 적절한 방법이죠. 하지만 그것마저도 인간 스스로 주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루소는 책과 가족, 또래로부터 고립되는, 즉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 천성적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교육만이 인간의 본래 좌표를 되찾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같은 루소의 철학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인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지극히 이상적인 루소의 교육관은 당대 귀족들에게 배척을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말에 뒤를 잇는 루소의 주장을 유심히 살펴본다면, 아마도 고개를 주억거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자연인은 수의 한 단위의 정수整數의 경우처럼, 자기 자신 혹은 자신의 동료하고만 관계를 맺고 있는 독립적인 실체이다.
분모에 의해 그 값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분수의 분자처럼, 사회인의 가치는 사회적 유기체라는 전체와 맺는 관계에 따라 결정된다. 훌륭한 사회제도란 인간의 본성을 최대한 변형시킬 수 있고, 인간으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를 박탁하여 상대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으며, 자아를 하나의 공통된 단위, 즉 사회 속에 융합시킬 수 있는 제도이다. 그 결과 개인은 자신을 더 이상 하나의 개체가 아니라 사회적 유기체와 같은 단위의 부분으로 생각하게 되고, 전체 속에서만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혹자는 루소를 개인주의교육을 부추기는 주범이라 말하지만, 실상 루소가 말한 인간의 좌표, 즉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불어 함께 사는 존재”에 다름 아닙니다.
만 인의 진정한 사람다움을 추구한 다산 정약용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의 시원始原을 묻는 질문과 대답에 있어 서양 철학보다는 동양의 사상이 훨씬 더 웅숭깊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먼저 공자를 살펴보죠. 공자는 『논어』에서 다음 같이 말합니다. “사람다움이란 자기가 서고 싶은 대로 주위 사람을 세우고, 자기가 이르고 싶은 대로 주위 사람을 이르게끔 한다. 가까운 일상에서 유추를 끌어낼 수 있으면 그것이 사람다움으로 나아가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공자를 “상갓집의 개”로 낮춰보기도 하지만, 난세인 춘추전국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내며 ‘덕’에 기초한 정치, ‘인’에 바탕을 둔 위정자의 자기개조를 부르짖었던 공자입니다. 그래서인지 공자는 평생 인仁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앞세웠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공자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도 볼 수 있는 노자는 사람다움에 대해 애초부터 조금은 부정적입니다. “천지는 그 무엇을 사랑하지 않고 만물을 풀로 만든 강아지로 여긴다. 성인은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백성들을 모두 풀로 만든 강아지로 여긴다. 천지 사이는 사랑이라곤 털끝만큼도 없고 그냥 불어서 바람을 일으키는 풀무와 같을 뿐이다.” 어릴 적 즐겨보던 만화 <개구쟁이 스머프>의 투덜이 스머프가 생각나는데,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물론 노자의 지적은 지도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다시 한 번 돌아보면 결국 모든 사람을 향한 일갈에 다름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노자의 사람다움이 꼭 부정적이라고만은 할 수 없습니다. 노자가 “백성을 사랑하는 성인이 없다”고 지적한 것은 그러한 성인의 탄생을 기다리는 간절한 바람이기 때문입니다. 천지 사이에 털끝만큼도 없는 사랑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그것이 노자가 말하는 사람다움의 핵심은 아닐까, 하고 혼자서 생각해 봅니다. 퇴계와 율곡, 다산 등 석학들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썼습니다. 퇴계는 『근사록』에서 “가엽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사람답게 사는 길”이라고 이야기했고, 율곡은 “안으로는 차분하게 내 안, 즉 마음에서 진리를 찾고 밖으로는 생기 있게 활발하게 움직이는 자연의 움직임을 잘 살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퇴계와 율곡은 비록 표현 방식은 다르지만, 사람다움의 길은 내 안에서 시작한다는 것을 에둘러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럼 다산 정약용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어떻게 답했을까요? 다산이 학문을 닦은 목적을 어떤 이는 “건강하고 공정한 사회의 회복”이라고 표현한 바 있습니다. 신분의 차별은 물론 빈곤의 양극화가 유별났던 조선 시대에서 정약용은 “깨끗하고 고결한 (사대부) 개인의 구원만큼이나 힘겹고 시끄럽고 더러운 사회(민중)의 구원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정약용에게 사람다움이란 사대부만의 것이 아니라 반상의 구분 없이 이뤄져야 하는 궁극의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다산의 실학적 학풍은 학문적 지향일 뿐 아니라 만인萬人의 진정한 사람다움을 추구한 휴머니즘이라고 추켜세워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마침 동양의 모든 고전을 속속들이 다 뒤지지 않아도 될 만큼 잘 정리된 한 권의 책이 새롭게 선보였습니다. 성균관대 동양철학과 신정근 교수가 쓴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입니다. ‘오래된 질문을 다시 던지다’라는 시리즈의 명칭처럼 “인간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명징한 답을 전해줍니다. 물론 “인仁”의 3천 년 역사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지만, 인仁을 추구하는 주체가 인人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좋은 자료임에 틀림없습니다.
자 연, 참 나를 만나는 공간
시절이 하수상하니 귀향 혹은 귀농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소나기는 피해가자’는 심정으로 귀향과 귀농을 선택한 사람들도 있지만,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서 참 나를 찾기 위해 귀향·귀농을 선택한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를 보면 21세기를 산다고는 볼 수 없는 도인풍의 사람들이 등장하죠. 경쟁이 일상화된 도시의 생활과 는 달리 그들의 삶에는 평화와 애덕이 넘칩니다.
왜 그럴까요? 물론 경쟁이 없다는 것만으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남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또 경쟁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내면에 고요하게 집중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시에 산다고 자신의 내면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은 편견이지만, 루소나 스피노자가 말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상태로서의 인간에 그들의 삶의 조건이 훨씬 가까운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자연으로의 귀의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입니다. 극도의 상업주의와 산업주의에 반대하며 월든 호숫가 숲속에 손수 오두막집을 짓고 2년간 홀로 생활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 그는 그곳에서 직접 노동함으로써 최소한의 비용으로 삶을 꾸렸고, 그 외의 모든 시간은 독서와 사색, 자연과의 교감에 할애합니다. 단순하고 자족적이며 독립적인 삶은 소로 자신의 내면과 독대하는 시간이었고, 이후 ‘자발적 고립’의 삶의 모본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자연으로의 회귀와 자아 성찰에서 놓치면 안 될 부부가 있죠. 바로 스코트와 헬렌 니어링 부부입니다. 부유한 집안 출신에 대학교수라는 든든한 뒷배를 초개와 같이 버린 부부는 버몬트와 메인의 숲속에서 자신들만의 삶을 개척합니다.
세계대전, 대공황 등으로 이미 자정능력을 잃어버린 미국, 아니 그와 같은 세계에서는 살 수 없다는 자각은 자급자족으로 이어졌고, 결국 땅에 뿌리박은 삶, 조화로운 삶을 추구합니다. 영성이라는 말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그들의 삶은 현실에 뿌리박은 진정한 영성적 삶이었고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그 해답을 찾기 위해 천착한 삶이었습니다. 물론 이 땅에도 그와 같은 현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지금도 이름 모를 숱한 현자들이 자연과 벗하며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묻고 답하며, 물질만능과 경쟁으로 타락한 세상에서 오아시스와도 같은 존재로 살아갑니다. 제가 윤구병 선생이 변산에서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한 『가난하지만 행복하게』를 새해가 되면 꼭 읽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고 전, 오늘을 새롭게 할 인류의 자양분“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온전한 한 인격으로, 자신만의 물음과 대답을 가져야 합니다. 하지만 온전한 대답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종교뿐만이 아니라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과 대답에도 이단과 사이비가 버젓이 주인인 양 행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죠. 그래서 우리는 더더욱 책, 그 중에서도 고전으로 마음을 돌려야 합니다. 고전은 “세상 누구나 읽었다고 자부하지만 누구도 읽지 않은 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전은 오늘 새롭게 읽어야 할 인류의 자양분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지금, 고전의 세계를 누비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지 않으시렵니까? 물론 그 답도 여러분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사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