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자신을 반성하기 시작한 건축적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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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1 00:25 조회 7,848회 댓글 0건본문
교통사고를 당해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했던 보르도의 프랑스인은 독특한 엘리베이터를 건축가 렘 쿨하스에게 선물받았다. 사방이 뚫린 3미터×3.5미터 크기의 엘리베이터가 3층 건물이
동식 바닥의 일부가 되면서 새로운 전망과 자유를 얻었다. 건축콘서트는 이러한 상상력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건축가의 일이 작은 도면 위에 그리는 스케치에서 시작된다
는 여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 상상력과 건축이라는 본무대의 테마를 예고한다. 건축가를 ‘창조자’라 부르는 의미는 단순한 건물의 구축이 아닌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주체임을 상기시킨다. 이 책에 소개된, ‘상상의 스케치’를 실현한 건축물들은 놀랍다. 피터쿡과 콜린 파우니어의 합작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예술 전시장 <쿤스트하우스 그라츠>는 딱딱하고 반듯한 선이 가득한 도시 속에 숨을 불어넣어주며, 영국 서폴크에 위치한 <슬라이딩 하우스>는 건물의 외부와 내부를 뒤바꾸는 마술을 펼쳐 보인다. 모든 상상력이 아름답지는 않다.
영국의 실험적인 건축그룹 아키그램의 <워킹도시>나 단위 캡슐 주거를 건물에 적용한 메타볼리즘의 움직임은 신기하긴 했으나, 다이애나 윈 존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타나는 따뜻한 상상력은 아니었다. 더불어 어두운 전망이 보이지 않는 건물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다. 각종 미래 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2050년 쯤에는 지표면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속도인데, 이 역시 예측하기 힘들고, 영화처럼 벌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사실 이러한 위험은 모두 우리의 책임이다. 이 노아의 방주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유토피아를 꿈꾼 그동안의 삶에 일침을 가하는 성찰과 자기 반성의 상상일지 모른다. _72쪽
어느새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로 대체되었으며 환경과 법규, 제도가 건축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제한하긴 하지만, 건축가는 집이 지어질 땅의 기운을 읽고,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의 의지를 비추어 그것이 엮일 공간을 만들어내는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 건축 계획, 건축 설계, 구조 계획, 공사 감리 따위의 일을 한다.”는 원초적이고 사전적인 건축가의 의미는 채 한 장을 넘기지 못해, “모든 작업이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14쪽)로 치환된다. 대중문화와 소비사회가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실제 상품의 가치대신 기호화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대이다. 나치의 이상화에 동조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나 열악했던 파리의 기존 주거를 버리고 새로운 주거 단지의 개념을 제시했던 르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 설계, 그리고 힐자이버의 <이상도시> 계획안은 엘리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폭력적인 설계 방식의 문제와 건축가의 윤리의식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두계건축연구소 모임의 일원인 12명의 저자들은 디스토피아적 전망으로 가득 찬 미래사회에 대한 건축학도적인 예감을 외면하지 않는다. ‘건축 콘서트’라는 제목에 걸맞게 릴레이 형태의 독주가 이어지지만 건축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다섯 장의 테마를 제시하고 있다. 많은 사진들이 담겨 있어 글의 이해를 충분히 돕고 표지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를 상쇄시키지만, 사진의 크기가 작고 중반부가 도입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서술되어 단조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건축의 대안적인 제시방법은 각각 오늘과 미래의 장에서 ‘에코 건축’과 ‘인터랙션’으로 실마리를 얻는다. 생태중심개념을 바탕으로 ‘환경친화 건축’을 추구하는 에코-건
축은 자연환경과 인간이 공존, 공생을 추구하기 위한 귀결점이며, 인터랙션이란 아래 정의된 바와 같이 단순한 디지털 기기의 발전이 아닌 관계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인터랙션의 사전적 의미는 상호작용이다. 인터랙션 디자인은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사람 사이의 원활한 상호 커뮤티케이션을 창출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인터랙션 디자인은 테크놀로지와 테크놀로지의 연결이 아닌, 사람과 테크놀로지의 연결을 꾀한다. _264쪽
모나코에 있는 열대 파라다이스를 모티브로 삼아 절반은 물에 잠겨있고 도시 전체가 녹지로 덮여있는 릴리패드의 조감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나 나는 그런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나와 지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터치 기능이 보편화된 스크린과 휴대폰의 노크는 이제 우리의 마음속을 향해 자기 반성의 상상을 연주해야겠다.
동식 바닥의 일부가 되면서 새로운 전망과 자유를 얻었다. 건축콘서트는 이러한 상상력으로 연주를 시작한다. 건축가의 일이 작은 도면 위에 그리는 스케치에서 시작된다
는 여는 글의 마지막 부분이 상상력과 건축이라는 본무대의 테마를 예고한다. 건축가를 ‘창조자’라 부르는 의미는 단순한 건물의 구축이 아닌 상상력을 실현시키는 주체임을 상기시킨다. 이 책에 소개된, ‘상상의 스케치’를 실현한 건축물들은 놀랍다. 피터쿡과 콜린 파우니어의 합작이라는 오스트리아의 예술 전시장 <쿤스트하우스 그라츠>는 딱딱하고 반듯한 선이 가득한 도시 속에 숨을 불어넣어주며, 영국 서폴크에 위치한 <슬라이딩 하우스>는 건물의 외부와 내부를 뒤바꾸는 마술을 펼쳐 보인다. 모든 상상력이 아름답지는 않다.
영국의 실험적인 건축그룹 아키그램의 <워킹도시>나 단위 캡슐 주거를 건물에 적용한 메타볼리즘의 움직임은 신기하긴 했으나, 다이애나 윈 존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하울의 움직이는 성>에 나타나는 따뜻한 상상력은 아니었다. 더불어 어두운 전망이 보이지 않는 건물처럼 우리 앞에 놓여있다. 각종 미래 연구소의 보고서에 의하면 2050년 쯤에는 지표면의 상당 부분이 실제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을 것이라고 한다. 문제는 속도인데, 이 역시 예측하기 힘들고, 영화처럼 벌어지면 어쩌나 걱정이 앞선다. 사실 이러한 위험은 모두 우리의 책임이다. 이 노아의 방주에 대한 새로운 상상은 유토피아를 꿈꾼 그동안의 삶에 일침을 가하는 성찰과 자기 반성의 상상일지 모른다. _72쪽
어느새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가치로 대체되었으며 환경과 법규, 제도가 건축가의 자유로운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제한하긴 하지만, 건축가는 집이 지어질 땅의 기운을 읽고,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의 의지를 비추어 그것이 엮일 공간을 만들어내는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그리하여 “건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 건축 계획, 건축 설계, 구조 계획, 공사 감리 따위의 일을 한다.”는 원초적이고 사전적인 건축가의 의미는 채 한 장을 넘기지 못해, “모든 작업이 해피엔딩이 되기를 바라는 대책 없는 낭만주의자”(14쪽)로 치환된다. 대중문화와 소비사회가 지배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사회는 실제 상품의 가치대신 기호화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뮬라시옹’의 시대이다. 나치의 이상화에 동조했던 ‘알베르트 슈페어’나 열악했던 파리의 기존 주거를 버리고 새로운 주거 단지의 개념을 제시했던 르코르뷔지에의 <빛나는 도시> 설계, 그리고 힐자이버의 <이상도시> 계획안은 엘리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폭력적인 설계 방식의 문제와 건축가의 윤리의식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홍익대학교 건축대학 두계건축연구소 모임의 일원인 12명의 저자들은 디스토피아적 전망으로 가득 찬 미래사회에 대한 건축학도적인 예감을 외면하지 않는다. ‘건축 콘서트’라는 제목에 걸맞게 릴레이 형태의 독주가 이어지지만 건축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오가며 다섯 장의 테마를 제시하고 있다. 많은 사진들이 담겨 있어 글의 이해를 충분히 돕고 표지의 어둡고 무거운 이미지를 상쇄시키지만, 사진의 크기가 작고 중반부가 도입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서술되어 단조로운 느낌을 주기도 한다. 미래를 준비하는 건축의 대안적인 제시방법은 각각 오늘과 미래의 장에서 ‘에코 건축’과 ‘인터랙션’으로 실마리를 얻는다. 생태중심개념을 바탕으로 ‘환경친화 건축’을 추구하는 에코-건
축은 자연환경과 인간이 공존, 공생을 추구하기 위한 귀결점이며, 인터랙션이란 아래 정의된 바와 같이 단순한 디지털 기기의 발전이 아닌 관계의 발전을 꾀하는 것이다. 인터랙션의 사전적 의미는 상호작용이다. 인터랙션 디자인은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사람 사이의 원활한 상호 커뮤티케이션을 창출하는 예술이다. 따라서 인터랙션 디자인은 테크놀로지와 테크놀로지의 연결이 아닌, 사람과 테크놀로지의 연결을 꾀한다. _264쪽
모나코에 있는 열대 파라다이스를 모티브로 삼아 절반은 물에 잠겨있고 도시 전체가 녹지로 덮여있는 릴리패드의 조감도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나 나는 그런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를 나와 지구의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다. 터치 기능이 보편화된 스크린과 휴대폰의 노크는 이제 우리의 마음속을 향해 자기 반성의 상상을 연주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