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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새책 생채기를 보듬으며 사는 것, 그것이 삶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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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4 22:36 조회 6,682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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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중간 중간 자꾸만 먹먹해지는 가슴을 어루만졌다. 작가의 살아 꿈틀거리는 표현에 아득한 어린 시절 기억들이 자꾸만 꼼지락거리며 머릿속에서 기어 나와 가슴을 흔들어댔다. 오랜만에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었고, 다 읽은 책을 한참이나 덮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지나간 시간들은 너무 아득해, 형체는 고사하고 어렴풋한 느낌만, 그것도 한참을 헤집어야 저 구석에서 겨우 나타나는데, 작가는 시간을 고스란히 재생해내고 재생된 시간은 곧 과거의 공간까지 살려내어 1970년~1980년의 시대를 손에 닿을 듯 생생하게 펼쳐놓고 있다. 이 글의 주인공 수희처럼 언론이 철저하게 통제되었던 그 시절에 성장한 나는, 불안들이 존재하는 것이 삶인 줄 알았다. 진실은 물론이고 불안의 실체를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글을 읽는 내내, 나는 보일 듯 말 듯한 얇은 막을 뚫고 들여다볼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 막 건너편에서 불안의 냄새에 마음 조이며 성장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조작이야. 이걸 누가 믿겠어? 그 시대를 산 내가, 아니 우리가 이걸 몰랐다는 게 말이 돼?”_291~292쪽

이렇게 부르짖던 수희처럼 나는 얇은 막 속의 진실을 알아가며 어른이 되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베일 속으로만 숨는 진실에 직면한다.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엔 나처럼 나를 중심으로 가족이 있고 학교가 있고 친구들이 있고 사람들이 있는 걸까? 사는 것이 생채기를 더해가는 것임을 다들 언제쯤 깨닫는 걸까? 그리 기구한 운명의 소유자가 아니라도 사는 것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인정하고 느끼고 있는 걸까? 이 책은 마흔도 훌쩍 넘긴 나를 다시 열세 살 불안한 그 시절로 데려다 놓고 세차게 흔들어 놓는다. 심부름을 잘하는 수희는 심부름시키는 이들의 비밀을 공유할 정도로 영악하고 똑 부러진 아이다. 수희는 말이 없고 생각이 깊은 아버지와 씩씩한 어머니, 어머니의 삶의 힘인 오빠와 예쁘고 착한 장녀인 강희언니, 새침데기 둘째 언니와 함께 사는 늘 아침이 분주한 평범한 집 막내다.

대놓고 경수오빠만을 위하는 엄마가 집안에 있다면 조기청소 하굣길에 나타나 끊임없이 여자들을 괴롭히는 백기호 같은 남자아이가 득세하는 곳이 학교다. 어린 수희는 같은 반의 힘없는 여자아이를 폭력과 힘으로 농락하는 백기호를, 등화관제가 있던 저녁 몽둥이로 혼내주는 용기를 낸다. 그 사건 이후 다리를 절며 힘의 권력에 비켜 비루하게 살아가는 백기호를 바라봐야 하는 큰 생채기를 얻지만 이는 어쩌면 21세기식 폭력의 땅에서 성장해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고, 진실을 비켜가지 않으려는 수희의 삶의 자세다. 그 당시 팽배한 남성적 질서는, 언니를 철저하게 배신하고도 세상 속에서 기득권을 누리며 잘 살고 있는 배도연으로 표현된다.

수희의 큰언니 강희는 사랑하는 사람의 배신으로 마른 꽃처럼 영혼이 고갈되어가고 자살 실패 후 정신병원 생활을 반복하지만 그 당시 남성적 질서는 건재하다. 수희는 고등학교에 올라가 영어선생으로 만난 배도연을 향한 복수를 계획하고 실천하면서 잔인한 얼음꽃을 삼키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다. 성장기 소녀에게 사랑이란 모호하고 가슴 설레는 경험이 아닌, 변해가는 육체만큼이나 야릇하고 불안한 그림자다.

큰언니의 처절한 불행조차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더 이상 평범한 가족의 비밀이 되지 못한다. 영부인의 갑작스런 죽
음이 1970년대의 영웅이 약속한 이상국가라는 영원한 로망이 무너졌음을 암시하듯, 대학생이 된 오빠 경호마저 광주에서 죽
고, 덮어버릴 수 없는 진실은 세상에 조금씩 고개를 내민다. “대통령이 사라지고, 그가 사라지고, 미선이가 사라지고, 진
성이가 사라진 교정은 을씨년스럽고 황량했다. 사라진 자리는 폐허가 되어버렸다.”_278쪽

광주 5.18이라는 유인물을 학생들에게 나누어준 사회선생이 사라진 학교에서, 모두가 사라진 폐허가 된 자리에서 수희는 사
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어 절규한다.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다.
“나도 이제 사람들이 사는 세상으로 들어가고 싶어. 이 폐허에서 나를 내보내줘.”_287쪽

88 서울올림픽이 전 국민을 열광 속으로 몰아넣고 있을 때 강희 언니가 돌아왔다. 언니는 돌아와 밥을 하고, 너무 뚱뚱해져 늙은 하마 같은 엄마는 넋두리를 그치더니 밥을 먹기 시작한다. 엄마와 수희와 언니는, 오빠가 좋아하던 창란젓과 언니가 좋아하던 깻잎장아찌를 놓고 밥을 비운다. 생채기를 보듬으며 사는 것이 삶임을 깨닫는 시기가 다 다를 뿐, 우리는 이렇게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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