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며 성장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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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09 22:03 조회 6,123회 댓글 0건본문
주류에 대한 반항을 이야기할 때 흔히 사용하는 개념이 바로 “내가 삐딱한 것인지 세상이 삐딱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는
가?”라는 것이다. 확실히 삐딱함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정상과 이상의 경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일견 삐딱해 보이지만 약간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정상적인 것인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사회의 관용 능력, 지식 수준에 따라서 어떤 기준을 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 기준에서 어긋난 것을 어긋났다고 부르는 것 또한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런 것 자체를 필요로 할 줄 아는 더 성숙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만큼은 제대로 공감한다면 말이다. 결국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여러 다른 기준들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며 세상과 함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장 과정인 셈이다.
거창한 설명으로 시작했지만, 이런 생각들을 훨씬 편리하게 풀어 놓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삐딱하다는 추상적 비유를, 정말로 기울어진 것으로 비유한다든지 말이다. 사회의 여러 일면을 압축해 놓은 가상의 도시공간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다른 기준이라는 개념은 과학과 환상의 경계에서 공존하는 서로 다른 지구들의 모습으로 풀어낼 수 있다. 그 결과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성장에 관한 멋들어진 우화가 완성된다. 그런 작품이 바로 『기울어진 아이』인 것이다.『기울어진 아이』는 『어둠의 도시』(여기서 어둠은 ‘악’이 아니라, ‘모호함’의 의미로 사용된다.) 연작의 일부인데,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20세기 초반 유럽풍 현대 도시만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펼쳐지는 각종 이야기 중 하나다. 국가의 개념 없이, 각 도시들은 자체적인 사회 구조와 스타일을 지니고 내부 행정 또는 도시 사이의 마찰 구도를 이룬다.
그런 여러 도시 가운데 하나에서, 호기심 가득한 여주인공 마리는 가족여행와중에 놀이기구를 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이 기울어진다. 대단한 변신을 거친 것이 아니라, 그냥 기울어져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가족들은 그녀를 ‘고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시골 기숙사학교로 내치는데, 그녀는 그곳에서도 다시금 다른 ‘보통’ 사람들과 다르기에 겉돌게 된다. 결국 몰이해 속에탈출을 감행하여, 더 많은 몰이해를 겪다가 결국 이질성이 하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곳인 서커스단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과학자를 찾아가 자신이 기울어진 이유가 자신만 다른 행성의 중력장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고, 그 행성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 경험을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성장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장에 대한 은유, 여러 세계의 만남, 공간으로 묘사된 사회적 구조와 개인들의 관계 맺음 등 다양한 의미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다. 그렇게까지 파고들기 귀찮은 독자들은 기이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환상 모험을 보며 시각적 완성도에 경탄을 하는 정도로 만족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임에 대한 우화다. 중력이라는,가장 의식하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현상이 다르게 작용하여 이질적 존재가 되어버린 주인공 마리가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자신을 받아들인 마리를 세상이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왜 그녀에게 중력이 다르게 작용한 것인지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 있겠다는 것을 증명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받아들임은 시작된다. 기이함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경이와 불안 사이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결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기울어짐은 사라지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힘을 얻는다. 기울어진 아이에서, 기울어짐은 물론 그 이상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우아한 - 돌려 말하면 딱딱할 수 있는 - 주제만 내세울 만화인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각적 탁월함이다. 화려한 양식미의 아르누보/아르데코풍 도시 공간을 만드는 세밀한 그림체, 산업혁명 시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미래 기술을 만들어낸 듯한 문명의 모습, 서로 다른 세계들의 교차를 사진과 펜 선을 번갈아가며 시각적으로 직접 표현하는 연출 등이 멋스럽다. 캐릭터 중심이라기보다 공간과 세계관 자체가 주인공인 듯한 매력적인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다(사실 그나마 『기울어진 아이』가 좀 더 캐릭터 중심적이고, 연작의 다른 작품들은 한층 더 공간 설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준다). 주류 장르만화에서 기대할 만한 격렬한 드라마나 화려한 활극 액션과는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낯설어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공간이 주는 느낌에 온전히 몰입하고 경이를 경이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세만 살짝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혹은 짧게, 많이 또는 적게 각자 ‘기울어진 아이’였던 시절이 있거나 현재 그런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다른 관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더 많은 다른 관점들이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는 온전한 성장을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부정하고 움츠러들 것인가? 현실에서는 작품 속 주인공만큼 범우주적 모험을 거치며 깔끔하게 일이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화를 흥미롭게 읽고 무언가 남은 것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성장을 가꿀 수 있지않을까 한다.
가?”라는 것이다. 확실히 삐딱함의 기준을 누가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서 정상과 이상의 경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일견 삐딱해 보이지만 약간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너무나 당연하게 정상적인 것인 경우도 적지 않다. 물론 사회의 관용 능력, 지식 수준에 따라서 어떤 기준을 정할 수밖에 없으며, 그 기준에서 어긋난 것을 어긋났다고 부르는 것 또한 딱히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좀 더 다름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고, 그런 것 자체를 필요로 할 줄 아는 더 성숙한 세상을 만들어야 할 필요성만큼은 제대로 공감한다면 말이다. 결국 정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 여러 다른 기준들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만들며 세상과 함께하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성장 과정인 셈이다.
거창한 설명으로 시작했지만, 이런 생각들을 훨씬 편리하게 풀어 놓는 것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삐딱하다는 추상적 비유를, 정말로 기울어진 것으로 비유한다든지 말이다. 사회의 여러 일면을 압축해 놓은 가상의 도시공간을 만들어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다른 기준이라는 개념은 과학과 환상의 경계에서 공존하는 서로 다른 지구들의 모습으로 풀어낼 수 있다. 그 결과 다른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성장에 관한 멋들어진 우화가 완성된다. 그런 작품이 바로 『기울어진 아이』인 것이다.『기울어진 아이』는 『어둠의 도시』(여기서 어둠은 ‘악’이 아니라, ‘모호함’의 의미로 사용된다.) 연작의 일부인데, 현실과 가상의 모호한 경계에 위치한 20세기 초반 유럽풍 현대 도시만으로 구성된 세계에서 펼쳐지는 각종 이야기 중 하나다. 국가의 개념 없이, 각 도시들은 자체적인 사회 구조와 스타일을 지니고 내부 행정 또는 도시 사이의 마찰 구도를 이룬다.
그런 여러 도시 가운데 하나에서, 호기심 가득한 여주인공 마리는 가족여행와중에 놀이기구를 타다가 어느 날 갑자기 몸이 기울어진다. 대단한 변신을 거친 것이 아니라, 그냥 기울어져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가족들은 그녀를 ‘고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시골 기숙사학교로 내치는데, 그녀는 그곳에서도 다시금 다른 ‘보통’ 사람들과 다르기에 겉돌게 된다. 결국 몰이해 속에탈출을 감행하여, 더 많은 몰이해를 겪다가 결국 이질성이 하나의 능력이 될 수 있는 곳인 서커스단에 들어간다. 그러다가 과학자를 찾아가 자신이 기울어진 이유가 자신만 다른 행성의 중력장에 놓여 있음을 알게 되고, 그 행성을 찾아 떠난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러 경험을 하며, 자신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성장을 하게 된다. 그 과정에서 성장에 대한 은유, 여러 세계의 만남, 공간으로 묘사된 사회적 구조와 개인들의 관계 맺음 등 다양한 의미들이 촘촘히 심어져 있다. 그렇게까지 파고들기 귀찮은 독자들은 기이한 세계에서 벌어지는 환상 모험을 보며 시각적 완성도에 경탄을 하는 정도로 만족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받아들임에 대한 우화다. 중력이라는,가장 의식하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현상이 다르게 작용하여 이질적 존재가 되어버린 주인공 마리가 스스로를 받아들이는 것이고, 자신을 받아들인 마리를 세상이 받아들이는 이야기다. 왜 그녀에게 중력이 다르게 작용한 것인지 완전히 이해를 하지 못하더라도, 그럴 수 있겠다는 것을 증명하고 인정하는 것에서 받아들임은 시작된다. 기이함에 대처하는 일반적인 방식인 경이와 불안 사이에서, 있는 그대로 인정한다는 결론을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론에 도달했을 때 기울어짐은 사라지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힘을 얻는다. 기울어진 아이에서, 기울어짐은 물론 그 이상도 받아들이고 또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는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이런 우아한 - 돌려 말하면 딱딱할 수 있는 - 주제만 내세울 만화인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시각적 탁월함이다. 화려한 양식미의 아르누보/아르데코풍 도시 공간을 만드는 세밀한 그림체, 산업혁명 시대를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미래 기술을 만들어낸 듯한 문명의 모습, 서로 다른 세계들의 교차를 사진과 펜 선을 번갈아가며 시각적으로 직접 표현하는 연출 등이 멋스럽다. 캐릭터 중심이라기보다 공간과 세계관 자체가 주인공인 듯한 매력적인 이질감이 느껴질 정도다(사실 그나마 『기울어진 아이』가 좀 더 캐릭터 중심적이고, 연작의 다른 작품들은 한층 더 공간 설정이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준다). 주류 장르만화에서 기대할 만한 격렬한 드라마나 화려한 활극 액션과는 방향성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낯설어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공간이 주는 느낌에 온전히 몰입하고 경이를 경이 자체로 받아들이는 자세만 살짝 갖춘다면 더할 나위 없는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대부분 오래 혹은 짧게, 많이 또는 적게 각자 ‘기울어진 아이’였던 시절이 있거나 현재 그런 시절을 살아가고 있다. 자신의 다른 관점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더 많은 다른 관점들이 받아들여지도록 노력하는 온전한 성장을 할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를 부정하고 움츠러들 것인가? 현실에서는 작품 속 주인공만큼 범우주적 모험을 거치며 깔끔하게 일이 풀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만화를 흥미롭게 읽고 무언가 남은 것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더 편안한 마음으로 자신의 성장을 가꿀 수 있지않을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