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글로 맺은 우정, 다시 글로 빛을 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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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03-17 16:46 조회 7,104회 댓글 1건본문
여고생이라면 한 번쯤 꿈꿔봤을 문학소녀의 꿈.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지루한 야자시간 연습장에 시 한 수 지어놓고 1호 시, 2호 시 번호 매겨가며 늘어나는 자작시에 뿌듯해 했고, 때론 그 시에 곡까지 붙여 가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한 번은 그렇게 만든 노래를 친구에게 불러주고 감상을 묻기도 했다. 모두 같진 않겠지만 청소년기의 예민한 감수성을 글로 풀어내던 그 때. 어떤 친구는 짤막한 글(쪽지)로, 또 어떤 친구는 비밀스런 글(교환일기)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거나 과시했다. 하지만 우리들의 치기어린 우정은 긴 세월, 각자의 바쁜 삶에 묻혀 사그라지고, 그 시절 틈만 나면 상상의 나래를 펼쳐 연습장에 깜지처럼 적어대던 글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이젠 나이 따라 몸 따라 석회석처럼 굳어버린 머리와 가슴에 글 한 줄 채우기도 쉽지 않으니, 천재 문인 이옥과의 대화가 필요한 건 내가 아닌가 싶다.
조선 후기 두 문인의 삶을 통해 글쓰기와 그 글로 맺어진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이렇게 불현 듯 잊고 지낸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들로 말이다.
열린 문틈으로 햇살 한 줄기가 몰래 들어와 두 눈을 꾹꾹 눌렀다. 늦은 봄날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햇살이었다. 햇살의 희롱을 즐기다 마지못해 눈을 떴다. 문가에 꽃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문틈으로 보니 나비 한 마리가 꽃봉오리를 향해 다가서는 중이었다. 꽃은 나비를 반기기라도 하듯 제 몸을 살짝 흔들었다.(9쪽)
다소 생소한 두 문인, 이옥과 김려. 알고 보니 시대를 잘못 만나 외면당했던 걸출한 문인들이다. 비록 소설이지만 뛰어난 두 문인을 조명해서인지 작가의 글도 참 아름답다. 서두는 이렇게 봄날의 여유를 즐기는 김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의 흥취를 깨뜨리며 등장하는 이가 있으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벗, 이옥의 아들 우태이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은 그는 김려의 집에 행패를 부리며 들어와 글 하나를 읊어대니, 그 글이 이옥의 ‘백봉선부’다.
저기 둔덕에 꽃이 있으니, 이름은 봉선이라.
비단처럼 번쩍이고 붉은 모래처럼 무성하여 야들야들 사랑스러워라. 따다가 손톱을 물들이면 연지를 칠하듯 아름답기에, 아침에 뜰에서 꺾여서는 저녁에 화장대 옆에 모셔졌구나. 아아, 서리같이 흰 여인들의 손이 그 가지며 잎을 죄다 뜯어 온전한 구석이 하나 없구나.(11쪽)
한 번도 본 적 없는 벗의 아들, 우태의 입에서 나온 글은 그를 상념에 젖게 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험난했던 유배생활을 회상하게 된다.
조선 후기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던 이옥과 김려. 그들은 당시 새로운 문학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며 둘도 없는 글벗이 된다. 하지만 이 흐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정조는 오히려 이에 반하는 정책(문체반정)을 펴고, 그들을 탄압한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한 이옥. 그런 벗에게 휘말려 유배생활까지 하게 되는 김려.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고통을 당하는 벗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했던 그. 결국 화를 면치 못하지만 그도 자신만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 또한 글과 떨어져 살 수 없고, 자신의 글을 버릴 수 없었던 진정한 문인이었기에.
끝이 없을 것 같던 고통스런 유배 생활 속에 오히려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세우게 된 김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부대끼며 그들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그것이 바로 글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옥이 그랬듯 그것이 진정한 글쓰기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방 안에 틀어박혀 음풍농월하는 거짓된 글 따위는 결코 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어느새 평안한 생활에 젖어 음풍농월하는 관리가 되어버린 그. 이렇듯 때론 삶의 여유가 오히려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잊게 만든다.
우태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시 시련을 안겨 주는 신호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출발, 다시 본원으로 회귀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잊혀져 간 벗에 대한 우정을 상기시키고, 놓아버린 지난 추억과 사람들을 찾게 만들며, 또 다른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등. 그리고 지난 날 글로 고초를 겪는 벗을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봤다면, 이젠 그러한 벗의 아들을 도와줌으로써 한층 변화된 모습으로 성숙하게 된다. 이 속에서 색다른 성장소설의 면모를 봤다면 과장일까?
우리는 성장은 어린이, 청소년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 정신적 성장까지 한정지어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이 책은 어른도 청소년기 못지않은 시련과 고통이 있으며, 그 속에서 아이들처럼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도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고집스런 신념과 열정도 있다는 것을 되새겨 준다. 비록 그 성장이 미약하여 안 보일 수도 있지만, 아니면 퇴화해버려 자신을 다시 원점으로 복귀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들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또한 우정에 대해, 신념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권한다.
조선 후기 두 문인의 삶을 통해 글쓰기와 그 글로 맺어진 우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이 책은 이렇게 불현 듯 잊고 지낸 지난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도 이처럼 아름다운 문장들로 말이다.
열린 문틈으로 햇살 한 줄기가 몰래 들어와 두 눈을 꾹꾹 눌렀다. 늦은 봄날에 어울리는 부드러운 햇살이었다. 햇살의 희롱을 즐기다 마지못해 눈을 떴다. 문가에 꽃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문틈으로 보니 나비 한 마리가 꽃봉오리를 향해 다가서는 중이었다. 꽃은 나비를 반기기라도 하듯 제 몸을 살짝 흔들었다.(9쪽)
다소 생소한 두 문인, 이옥과 김려. 알고 보니 시대를 잘못 만나 외면당했던 걸출한 문인들이다. 비록 소설이지만 뛰어난 두 문인을 조명해서인지 작가의 글도 참 아름답다. 서두는 이렇게 봄날의 여유를 즐기는 김려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그의 흥취를 깨뜨리며 등장하는 이가 있으니,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벗, 이옥의 아들 우태이다. 등장부터 심상치 않은 그는 김려의 집에 행패를 부리며 들어와 글 하나를 읊어대니, 그 글이 이옥의 ‘백봉선부’다.
저기 둔덕에 꽃이 있으니, 이름은 봉선이라.
비단처럼 번쩍이고 붉은 모래처럼 무성하여 야들야들 사랑스러워라. 따다가 손톱을 물들이면 연지를 칠하듯 아름답기에, 아침에 뜰에서 꺾여서는 저녁에 화장대 옆에 모셔졌구나. 아아, 서리같이 흰 여인들의 손이 그 가지며 잎을 죄다 뜯어 온전한 구석이 하나 없구나.(11쪽)
한 번도 본 적 없는 벗의 아들, 우태의 입에서 나온 글은 그를 상념에 젖게 한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보고 싶지 않은 험난했던 유배생활을 회상하게 된다.
조선 후기 성균관에서 동문수학했던 이옥과 김려. 그들은 당시 새로운 문학의 흐름에 맞춰 새로운 글쓰기를 시도하며 둘도 없는 글벗이 된다. 하지만 이 흐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정조는 오히려 이에 반하는 정책(문체반정)을 펴고, 그들을 탄압한다. 그러나 끝까지 자신의 문체를 고집한 이옥. 그런 벗에게 휘말려 유배생활까지 하게 되는 김려. 글쓰기에 대한 확고한 신념으로 고통을 당하는 벗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신에게 화가 미칠까 염려했던 그. 결국 화를 면치 못하지만 그도 자신만의 글쓰기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었다. 그 또한 글과 떨어져 살 수 없고, 자신의 글을 버릴 수 없었던 진정한 문인이었기에.
끝이 없을 것 같던 고통스런 유배 생활 속에 오히려 글쓰기에 대한 신념을 세우게 된 김려. “사람 속으로 들어가 그들과 부대끼며 그들 하나하나를 가슴에 새기고, 그것이 바로 글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옥이 그랬듯 그것이 진정한 글쓰기라고 그는 생각한다. 그리고 ‘방 안에 틀어박혀 음풍농월하는 거짓된 글 따위는 결코 짓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어느새 평안한 생활에 젖어 음풍농월하는 관리가 되어버린 그. 이렇듯 때론 삶의 여유가 오히려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잊게 만든다.
우태의 등장은 그에게 또 다시 시련을 안겨 주는 신호탄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출발, 다시 본원으로 회귀하는 시발점이기도 하다. 잊혀져 간 벗에 대한 우정을 상기시키고, 놓아버린 지난 추억과 사람들을 찾게 만들며, 또 다른 우정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등. 그리고 지난 날 글로 고초를 겪는 벗을 그저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만 봤다면, 이젠 그러한 벗의 아들을 도와줌으로써 한층 변화된 모습으로 성숙하게 된다. 이 속에서 색다른 성장소설의 면모를 봤다면 과장일까?
우리는 성장은 어린이, 청소년에게만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속에 정신적 성장까지 한정지어 생각해버린다. 하지만 이 책은 어른도 청소년기 못지않은 시련과 고통이 있으며, 그 속에서 아이들처럼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도 우정이 있고, 사랑이 있으며, 고집스런 신념과 열정도 있다는 것을 되새겨 준다. 비록 그 성장이 미약하여 안 보일 수도 있지만, 아니면 퇴화해버려 자신을 다시 원점으로 복귀시키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그들도 여전히 자라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아이와 어른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또한 우정에 대해, 신념에 대해, 글쓰기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싶은 모든 사람들에게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