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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새책 [청소년 문학 깊게 읽기]가난과 병고의 삶, 세상을 보듬는 이야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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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no_profile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2-11-05 17:21 조회 5,779회 댓글 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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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권정생 지음|창비|361쪽|2012.05.25|13,000원
고등학생|한국|에세이

대학교 2학년 때인가. 나는 사서가 될 꿈에 한창 부풀어 있었다. 보통은 대학교 1학년 때 실컷 논다고 하는데 나는 뒤늦게 배운 공부가 좋았다. 재수 끝에 서울 4년제, 원하는 학과에 가서 뿌듯하기만 했다. 학교 밖에서도 독서와 관련된 강의를 부지런히 찾아다니곤 했다. 하루는 독서지도사 자격증이 궁금해 학원에 등록했다. 한 무리의 아주머니 틈 속에 앳되고 어리바리한 학생은 나밖에 없었다. 아동문학론 강사는 한국의 주요 작가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했다. “권정생 작품은 아이들에게 어울리지 않아요. 기독교 세계관을 지녀서인지 죄책감을 느끼게 해요. 순진한 아이들이 벌써 주눅 들게 하다니 심한 거 아닐까요?”

아동문학에 관해서라면 금시초문이던 나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그게 권정생 작가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이윽고 알게 된 그의 대표작 『강아지똥』도 편견 때문인지 아니면 유명세 때문인지 마음에 크게 와 닿진 않았다. 그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작가는 유명을 달리했다. 그를 기리고 추모하는 사람이 많았고, 기념행사도 쉽게 눈에 띄었다. 심지어 내가 만나는 교사나 비평가도 그를 많이 그리워하고 좋아했다. 이렇게 권정생에 대한 엇갈린 평가 속에서 나는 그의 진가를 내 눈으로 확인하리라 별렀지만 정작 다른 책을 보느라 미뤄두기만 했다.

『빌뱅이 언덕』은 권정생이 등단 이후 1975년부터 2006년 사이에 써온 산문을 모아 엮어낸 책이다. 절판된 책에서 가려 뽑은 원고와 새로 찾은 글, 미발표된 시와 짧은 동화도 수록됐다. 크게 3부로 나뉘었는데 1부는 어린 시절에 대한 일화, 2부와 3부는 현대 사회에 대한 성찰을 시기별로 배치했다. 이 책의 제목 빌뱅이 언덕은 작가가 살던 곳이다. 1983년, 그는 빌뱅이 언덕 바로 밑에 『몽실 언니』의 계약금으로 두 칸짜리 오두막을 지어 살았다. 마을에서 가장 후미지고 번지도 없는 빌뱅이 언덕은 홀로 외롭게 살았던 그의 모습과 비슷했다.

권정생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가난과 병마이리라. 그는 일본에서 태어났고 해방 후 귀국했지만 6.25 전쟁으로 가족이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결핵과 갖가지 병으로 평생을 고생했다. 지금은 결핵이 약으로 간단히 치료된다고 하지만 옛날엔 피를 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이 책엔 그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았는지 절절히 나타난다. 병을 고치고자 찾은 기도원에서 자신과 다를 바 없는 신세인 문둥이 환자를 차마 외면하지 못한 점, 동생의 결혼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병든 자신이 집을 떠나야 했던 것, 굶주림과 외로움 속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죽은 형님에 대한 상상은 가난이 이토록 끔찍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애처롭다.

몇 권의 동화책을 대신할 순 없겠지만 이 책을 통해 그간 권정생의 삶과 주요 사상을 빠르게 읽어나가는 기분이었다. 특히 그는 우리 사회의 약자에 대해 늘 가슴 아파했고, 평화와 통일을 간절히 염원했으며, 지독한 가난에 처해있으면서도 가난의 참 의미에 대해 천착했다. 「가난이라는 것」에선 종교를 자기편으로 유리하게 끌어당기며 경쟁과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인간에 대해 대안을 제시한다. 또 다른 글에선 가난해야만 공존할 수 있으며 겸손과 순종이 가능하다고 지적한다.
“모두가 원래의 위치로 돌아가 가난을 지켜야 한다. 가난만이 평화와 행복을 기약한다. 가난이란 바로 함께 사는 하늘의 뜻이다.” (241쪽)

“민주주의도 가난한 삶에서 시작되고, 종교도 예술도 운동도 가난하지 않고는 말짱 거짓거리밖에 안 됩니다.” (361쪽)
또한 그는 자라나는 다음 세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시를 잃어버린 아이들」에선 도시의 폐해를 고스란히 받는 농촌의 청소년을 보며 탄식한다. 모두 도시화에 휩쓸려 그가 우려해 마지않는 아이다움을 잃은 지 오래다. 「그릇되게 가르치는 학부모들」과 「자연과 더불어 크는 아이들」을 보면 이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아이들이 직접 쓴 단순하고 솔직한 글을 통해 도대체 잘 산다는 게 무엇이며, 우리가 어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통렬히 느낄 수 있다.

게다가 마을 교회 종지기로 일하는 기독교 신자이면서도 종교에 대해 따끔한 소리를 멈추지 않았다. 「처음으로 하느님께 올리는 편지」를 보면 아직도 전쟁이 멈추지 않는 세계와 아무 말이 없는 신에 대한 분노가 전해진다. 마치 아이가 좀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엄마를 조르듯 애원하고 화내며 힘없고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달라고 부르짖는다. 또한 갓 부임한 「김 목사님께」에선 예수 믿으면 부자가 돼야 하고 약자는 돌아보지 않는 기독교의 변질에 대해 가난한 예수의 모습을 잊지 말라는 준엄하게 당부한다.

어린 시절, 거리 청소부였던 아버지가 쓰레기 더미에서 주워온 헌책을 보며 동화에 눈을 뜬 그는 당신에 대한 나의 오랜 선입견을 깨뜨려주었다. “나의 동화는 슬프다. 그러나 절대 절망적인 것은 없다.”(17쪽) 슬픔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면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고달프고 원통한 것뿐이다. 서러운 사람이 서러운 이야기를 들려주면 한결 위안이 된단다. 그는 가슴에 맺힌 이야기를 들려주듯 동화를 썼는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말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는 나 또한 목까지 끓어오르는 슬픔을 글로 털어놓으면 얼마간 진정이 되고, 다른 이가 마음을 다해 고백하는 글을 읽으면 위로를 받기 때문이리라.

이 책을 보며 왜 사람들이 권정생 작가를 존경하고 추앙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말과 삶이 일치한다는 이유만은 아닐 것이다. 늙고 병든 몸으로 살면서도 세상을 보는 눈은 뜨겁고 예리했다. 오히려 병든 세상을 향해 무서워하지 않고 분명한 세기로 자신의 목소리를 전했다. 아직도 모르는 것 천지인 내가 알고 느껴야 할 게 너무 많다. 이제 나는 이전과 다른 마음가짐으로 그의 글을 찾아보려고 한다. 그것이 앞으로도 좋은 책과 작가에 대한 바른 안목을 지녀야 하는 나의 할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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