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합니다! [세계의 십대와 함께 즐기는 문학] 이야기를 옹호하기 위한 이야기꾼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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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30 16:29 조회 6,080회 댓글 0건본문
김영욱 번역가. 작가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옛날에’ 괴테란 대문호가 있었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습작생이 어떻게 해야 선생처럼 위대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품을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괴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독창적인 작가들은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말해야 하는 것을 마치 이전에 단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표현했기 때문에 독창적인 작품이 된다네.” 과연 그 습작생은 괴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던 대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다만 이것만은 믿어주길 바란다. 눈도 정신 상태도 지극히 정상이라 몰랐겠지만, 우리 지구에는 달이 두 개이다.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달. 또 하나는 회전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절대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이바구 달.’ 이제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곳에 있는 도서관 ‘이야기 바다’에서 건져온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01 은둔 속에서 피어난 이야기꽃
“옛날 옛날에 이바구 달이란 곳에 이야기 바다가 있었어요.” 이렇게 계속 쓰자니, 오글거린다. 흠, 어쨌거나, 그 바다 남쪽 깊숙한 곳에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야기들이 거품을 내며 흘러나오는 샘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은 다채로운 빛깔을 띤 수많은 흐름으로 갈라져 한꺼번에 흘러나온다. 하지만 최근에는 바다가 오염되어 이야기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주인공 소년 하룬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린다. 이야기꾼인 아버지의 말문은 막혀 버린다. 착한 아들 하룬은 풀죽은 아버지를 위해, 집나간 어머니도 되찾고, 아버지의 잃어버린 이야기 능력도 되찾아 오기 위해 모험을 나선다…….
여러분 중 십중팔구는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소설가 살만 루슈디가 동화를 썼다고 하면, ‘설마’라며, 의심할 것이다. 『악마의 시』로 유명해지고, 세 번의 부커상 수상이라는 유래 없는 기록을 세운 『한밤의 아이들』 작가의 판타지 동화라고 하면, ‘정말?’ 하며, 확인하려 들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목숨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린 그가 은둔 생활 중에 쓴 작품이라 하면, ‘역시’ 하며,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룬과 바다이야기』는 ‘어떤 새도 노래하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심지어는 자갈을 밟아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과 추위뿐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쓰인 모험 판타지 동화이다.
02 위협받고 있는 이야기
하룬의 질문에 카탐슈드는 자신이 이야기를 끔찍하게 증오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의 세계관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이야기의 세계는 즐기기 위해 존재하지만, 카탐슈드에게 세계는 지배하기 위해, 동시에 지배받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야기에는 그가 절대로 지배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전제하에 작품을 놓고 볼 때, 카탐슈드는 이야기꾼 살만 루슈디에게 ‘파트와(죽음의 선고)’를 내린 이란의 최고 지도자였던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분신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호메이니가 격분한 이야기는 이 동화가 아니라, 1988년에 발표된 소설 『악마의 시』이다. 서양의 평론가들이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슬람교도들은 루슈디가 이 소설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독했다고 여겼다. 그 지경에 이르자 루슈디는 잠적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시작된 은둔과 망명 속에서 루슈디는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상상력의 바다를 봉쇄하려고 애쓰는 독재자를 동화의 캐릭터로 등장시킬 것을 구상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다룬 우화로도 읽히는 이 동화는 실제 자신이 쓴 소설 때문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고 은둔하고 있는 작가의 절규하고픈 심정, 항변하고 싶은 욕망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작품을 다시 보자. 탑에 갇힌 공주를 되찾기 위해 벌어진 전투에서 평소 대화와 토론을 중요시하던 서책 장군이 이끄는 수다족 군대 ‘도서관’은 “이제 모든 것을 충분히 토론했기 때문에” 열심히 싸웠고, “공통된 목표를 가진” 군대로서 단결을 유지하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이에 반해 침묵의 맹세 이후 비밀주의의 관습에 길들어버린 잠잠족의 그림자-전사들은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고 배신하고, 급기야 서로의 등을 찌른다.
위에서 언급한 장면은 기실 신약성경이나 초기 불경이라는 숫타니파타에서 예수나 붓다의 행적을 주로 우화 또는 알레고리로 이야기했던 방식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물론 경전에서의 우화나 알레고리가 듣거나 읽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을 고려한 문학적 장치라면, 이 작품에서의 경우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숨어든 작가가 자신을 박해한 독재자와 그의 독재 정치를 풍자와 해학의 방식으로 조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어디까지나 심층 서사로 깊숙이 내려가 보면 이렇게도 읽힌다는 뜻이니, 『하룬과 이야기 바다』를 펼치기도 전부터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03 ‘성인’ 문학과 ‘아동’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
이 책이 발표된 1990년에 살만 루슈디에게는 열 한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인 ‘하룬’과 같은 중간 이름을 지닌 하룬 자파르는 아버지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침묵법에 의해 말을 잃어버린 잠잠시의 시민들처럼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한 루슈디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야기꾼 라시드에 투영했다.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상상력의 바다를 봉쇄하려는 독재자와 이를 막으려는 아들과 아버지의 영웅모험담은 작가가 봉착한 위기의 현실과 실제 부자 관계를 밑바탕으로 삼고 탄생했다.
세월이 흘러 ‘파트와(죽음의 선고)’가 공식적으로 철회되고, 또 세월이 흘러 환갑마저 지났을 때, 루슈디의 둘째 아들 루카 밀란도 형처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하룬과 이야기 바다』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생긴 형제격인 『루카와 생명의 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생명의 불씨가 점점 꺼져가고 있는 이야기꾼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지식의 산’ 꼭대기에서 타오르고 있는 ‘생명의 불’을 훔쳐 오는 모험담인 후자는 전작 『하룬과 이야기 바다』과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읽히면서도 깊이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 상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관계, 진짜와 가짜의 관계, 인간과 인간을 창조한 신의 관계를 통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살만 루슈디는 작가이기 이전에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는 뛰어난 우르두어(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가 혼합된 언어로,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사용됨) 시인이었고, 아버지는 우르드어 문학과 서구 문학 연구자로서, 밤이면 밤마다 어린 루슈디에게 『아라비안나이트』를 조금씩 고쳐서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게다가 ‘족보의 천재’라고 불릴 만큼 조상의 역사와 민담에 해박했던 어머니의 입심도 대단했다는데, 그런 문화적 유전자 탓일까, 일찍이 루슈디는 작가를 꿈꾸게 되었단다.
루슈디는 『하룬과 이야기 바다』와 『루카와 생명의 불』을 쓴 목적이 ‘성인’ 문학과 ‘아동’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데 있다고 밝히며 이렇게 덧붙였다. “어린이는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이 흔히 책에서 추구하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그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책을 전과는 다르게 보고 전에 느꼈던 만족감 대신(또는 그 만족감과 더불어) 어른스러운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제대로 듣거나 읽은 사람에게 스며든 이야기는 그들의 것이 되어, 언젠가는 발전하고 새롭게 진화하여 다음 세대로 전수된다.
04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야기는 혼란을 일으킬까? 본 작품 속에서 사악한 잠잠족의 교주는 ‘이야기 바다’를 ‘혼란의 바다’라고 비유하며,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백일몽을 꾸고 쓰레기 같은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바깥 세계에서 사람들은 21세기는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들 흔히 이야기한다. 혹 말을 적대시하는 잠잠족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해석한다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 않을까? 온라인 통신상의 댓글 공해와 뜬소문으로 이어지는 시끄러운 헛된 말들의 과잉 전파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들이야말로 ‘오염된 이야기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든다면, 작품 속에서 온종일 쉬지 않고 떠드는 다구어들보다는 침묵을 따르는 잠잠족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봐야 할 것이다. 이야기와 말을 사랑하는 수다족은 언제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시끄럽기 때문에 잠잠족의 침묵 맹세도 내겐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주인공 하룬의 입을 빌려 이 두 종족 간의 싸움을 사랑(바다에 대한 사랑, 공주에 대한 사랑)과 죽음(카탐슈드 교주가 꾀하고 있는 이야기 바다의 죽음과 공주의 죽음)의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잠잠족의 그림자–전사의 춤을 바라보는 하룬의 생각을 통해 침묵도 나름대로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것, 몸짓도 말만큼 고상할 수 있다는 것, 어둠의 생물도 빛의 자식들만큼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여하간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지나친 적대 관계로 상정해놓은 억지스러움도 없진 않다(어쩌겠는가. 이거야말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따르고 있는 옛이야기의 서사적 특징이 아닌가!). 이야기의 샘을 원천 봉쇄하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이야기의 흐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야기의 바다를 망쳐버리는 대혼란이라고 작품은 언급하고 있다. 한데, 오염되기 이전에도 이야기의 바다에는 언제든 사람의 머리를 환상적인 꿈으로 가득 채워줄 수 있는 부드럽고 미묘한 이야기들만이 흐르고 있다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있다. 조선 유교 사회에서는 허구의 이야기가 성품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개화기 이래 산업 시대에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억압해 왔다.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의 플롯을 동화적인 판타지 문법에 접목시켜 팍팍한 개인의 삶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해주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이야기로 풀어간 살만 루슈디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치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언젠가는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들도 자식들을 낳는 식으로,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와 결합하여 또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확실히 믿는다. 결국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혹 청자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꾼이 “이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종료된다. 어렸을 때부터 즐겨 듣던 옛날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요즈음도 변함없이 한결 같다.
『하룬과 이야기 바다』의 말미에서도 이야기 바다는 안정을 되찾고, 볼모로 잡혀간 공주는 구출되어 왕자와 결혼하고, 악당은 줄행랑을 치고, 주인공 하룬과 이야기꾼 아버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마침내 하룬의 소원대로 집 나갔던 엄마가 돌아오는 해피엔딩이다. 작품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현실에서의 해피엔딩은 규칙이 아니라 예외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다. 후기에서 루시디는 이 작품을 창작하던 시절이 그에게 너무나도 어두운 시절이었던 만큼 『하룬과 이야기 바다』는 빛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고 밝혔다. 혼돈과 어둠이 걷혀야 해피엔드가 찾아온다. 다만 “해피엔딩은 언제나 이야기의 가장 끝에 온다.”
태초에 이야기가 있었다. ‘옛날 옛날에’ 괴테란 대문호가 있었다. 어느 날 그를 찾아온 습작생이 어떻게 해야 선생처럼 위대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작품을 쓸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괴테는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독창적인 작가들은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들이 말해야 하는 것을 마치 이전에 단 한 번도 표현한 적이 없었던 것처럼 표현했기 때문에 독창적인 작품이 된다네.” 과연 그 습작생은 괴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던 대로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었을까?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다만 이것만은 믿어주길 바란다. 눈도 정신 상태도 지극히 정상이라 몰랐겠지만, 우리 지구에는 달이 두 개이다. 하나는 우리 눈에 보이는 달. 또 하나는 회전 속도가 너무나도 빨라서 절대 자신의 존재를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았던 ‘이바구 달.’ 이제 여러분이 믿거나 말거나, 그곳에 있는 도서관 ‘이야기 바다’에서 건져온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야기꾼의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 한다.
01 은둔 속에서 피어난 이야기꽃
“옛날 옛날에 이바구 달이란 곳에 이야기 바다가 있었어요.” 이렇게 계속 쓰자니, 오글거린다. 흠, 어쨌거나, 그 바다 남쪽 깊숙한 곳에는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이야기들이 거품을 내며 흘러나오는 샘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은 다채로운 빛깔을 띤 수많은 흐름으로 갈라져 한꺼번에 흘러나온다. 하지만 최근에는 바다가 오염되어 이야기 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주인공 소년 하룬의 어머니는 집을 나가버린다. 이야기꾼인 아버지의 말문은 막혀 버린다. 착한 아들 하룬은 풀죽은 아버지를 위해, 집나간 어머니도 되찾고, 아버지의 잃어버린 이야기 능력도 되찾아 오기 위해 모험을 나선다…….
여러분 중 십중팔구는 인도가 낳은 세계적인 소설가 살만 루슈디가 동화를 썼다고 하면, ‘설마’라며, 의심할 것이다. 『악마의 시』로 유명해지고, 세 번의 부커상 수상이라는 유래 없는 기록을 세운 『한밤의 아이들』 작가의 판타지 동화라고 하면, ‘정말?’ 하며, 확인하려 들 것이다. 사형선고를 받은 목숨에 100만 달러의 현상금까지 걸린 그가 은둔 생활 중에 쓴 작품이라 하면, ‘역시’ 하며, 혀를 내두를 것이다. 『하룬과 바다이야기』는 ‘어떤 새도 노래하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고 심지어는 자갈을 밟아도 전혀 소리가 나지 않는’ 적막과 추위뿐인 현실을 이겨내기 위해 쓰인 모험 판타지 동화이다.
02 위협받고 있는 이야기
하룬의 질문에 카탐슈드는 자신이 이야기를 끔찍하게 증오하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그의 세계관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이야기의 세계는 즐기기 위해 존재하지만, 카탐슈드에게 세계는 지배하기 위해, 동시에 지배받기 위해 존재하는 곳이다. 그러나 이야기에는 그가 절대로 지배할 수 없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전제하에 작품을 놓고 볼 때, 카탐슈드는 이야기꾼 살만 루슈디에게 ‘파트와(죽음의 선고)’를 내린 이란의 최고 지도자였던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분신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호메이니가 격분한 이야기는 이 동화가 아니라, 1988년에 발표된 소설 『악마의 시』이다. 서양의 평론가들이 호평을 아끼지 않았던 것과 달리, 이슬람교도들은 루슈디가 이 소설에서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예언자 무함마드를 모독했다고 여겼다. 그 지경에 이르자 루슈디는 잠적할 수밖에 없었고, 이때부터 시작된 은둔과 망명 속에서 루슈디는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상상력의 바다를 봉쇄하려고 애쓰는 독재자를 동화의 캐릭터로 등장시킬 것을 구상한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한 것이다. 언론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다룬 우화로도 읽히는 이 동화는 실제 자신이 쓴 소설 때문에 목숨의 위협까지 받고 은둔하고 있는 작가의 절규하고픈 심정, 항변하고 싶은 욕망이 탄생시킨 작품이다.
작품을 다시 보자. 탑에 갇힌 공주를 되찾기 위해 벌어진 전투에서 평소 대화와 토론을 중요시하던 서책 장군이 이끄는 수다족 군대 ‘도서관’은 “이제 모든 것을 충분히 토론했기 때문에” 열심히 싸웠고, “공통된 목표를 가진” 군대로서 단결을 유지하며 서로가 서로를 돕는다. 이에 반해 침묵의 맹세 이후 비밀주의의 관습에 길들어버린 잠잠족의 그림자-전사들은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고 배신하고, 급기야 서로의 등을 찌른다.
위에서 언급한 장면은 기실 신약성경이나 초기 불경이라는 숫타니파타에서 예수나 붓다의 행적을 주로 우화 또는 알레고리로 이야기했던 방식과 어느 정도 유사하다. 물론 경전에서의 우화나 알레고리가 듣거나 읽는 사람들의 전반적인 지적 수준을 고려한 문학적 장치라면, 이 작품에서의 경우는 생명의 위협을 피해 숨어든 작가가 자신을 박해한 독재자와 그의 독재 정치를 풍자와 해학의 방식으로 조롱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된다. 어디까지나 심층 서사로 깊숙이 내려가 보면 이렇게도 읽힌다는 뜻이니, 『하룬과 이야기 바다』를 펼치기도 전부터 지레 겁을 먹을 필요는 없다.
03 ‘성인’ 문학과 ‘아동’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
이 책이 발표된 1990년에 살만 루슈디에게는 열 한 살짜리 아들이 있었다. 작품 속 주인공 이름인 ‘하룬’과 같은 중간 이름을 지닌 하룬 자파르는 아버지에게 재미난 이야기를 해달라고 졸랐다고 한다. 침묵법에 의해 말을 잃어버린 잠잠시의 시민들처럼 창작의 권리를 박탈당한 루슈디는 자신의 처지를 이야기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이야기꾼 라시드에 투영했다. 모든 이야기의 원천인 상상력의 바다를 봉쇄하려는 독재자와 이를 막으려는 아들과 아버지의 영웅모험담은 작가가 봉착한 위기의 현실과 실제 부자 관계를 밑바탕으로 삼고 탄생했다.
세월이 흘러 ‘파트와(죽음의 선고)’가 공식적으로 철회되고, 또 세월이 흘러 환갑마저 지났을 때, 루슈디의 둘째 아들 루카 밀란도 형처럼 자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서 『하룬과 이야기 바다』와 다르면서도 비슷하게 생긴 형제격인 『루카와 생명의 불』이 탄생하게 되었다. 생명의 불씨가 점점 꺼져가고 있는 이야기꾼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지식의 산’ 꼭대기에서 타오르고 있는 ‘생명의 불’을 훔쳐 오는 모험담인 후자는 전작 『하룬과 이야기 바다』과 마찬가지로 흥미진진한 모험담으로 읽히면서도 깊이 들여다보면, 삶과 죽음, 상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관계, 진짜와 가짜의 관계, 인간과 인간을 창조한 신의 관계를 통찰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살만 루슈디는 작가이기 이전에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그의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은 선천적으로 물려받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는 뛰어난 우르두어(페르시아어와 아라비아어가 혼합된 언어로,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사용됨) 시인이었고, 아버지는 우르드어 문학과 서구 문학 연구자로서, 밤이면 밤마다 어린 루슈디에게 『아라비안나이트』를 조금씩 고쳐서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게다가 ‘족보의 천재’라고 불릴 만큼 조상의 역사와 민담에 해박했던 어머니의 입심도 대단했다는데, 그런 문화적 유전자 탓일까, 일찍이 루슈디는 작가를 꿈꾸게 되었단다.
루슈디는 『하룬과 이야기 바다』와 『루카와 생명의 불』을 쓴 목적이 ‘성인’ 문학과 ‘아동’ 문학의 경계를 허무는 데 있다고 밝히며 이렇게 덧붙였다. “어린이는 이 책을 읽고 아이들이 흔히 책에서 추구하는 즐거움과 만족감을 얻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아이가 나중에 자라서 그 책을 다시 읽으면, 그 책을 전과는 다르게 보고 전에 느꼈던 만족감 대신(또는 그 만족감과 더불어) 어른스러운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사실 이야기는 듣는 사람의 상황이나 조건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거나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제대로 듣거나 읽은 사람에게 스며든 이야기는 그들의 것이 되어, 언젠가는 발전하고 새롭게 진화하여 다음 세대로 전수된다.
04 끝나지 않은 이야기
이야기는 혼란을 일으킬까? 본 작품 속에서 사악한 잠잠족의 교주는 ‘이야기 바다’를 ‘혼란의 바다’라고 비유하며, 이야기 때문에 사람들이 백일몽을 꾸고 쓰레기 같은 소리를 지껄이게 된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이야기의 바깥 세계에서 사람들은 21세기는 스토리텔링의 시대라고들 흔히 이야기한다. 혹 말을 적대시하는 잠잠족의 입장에서 이 작품을 해석한다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지 않을까? 온라인 통신상의 댓글 공해와 뜬소문으로 이어지는 시끄러운 헛된 말들의 과잉 전파에 무방비로 노출된 우리들이야말로 ‘오염된 이야기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 존재들은 아닐까? 이런 질문이 든다면, 작품 속에서 온종일 쉬지 않고 떠드는 다구어들보다는 침묵을 따르는 잠잠족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여 봐야 할 것이다. 이야기와 말을 사랑하는 수다족은 언제나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시끄럽기 때문에 잠잠족의 침묵 맹세도 내겐 그럴싸하게 느껴진다. 작가는 주인공 하룬의 입을 빌려 이 두 종족 간의 싸움을 사랑(바다에 대한 사랑, 공주에 대한 사랑)과 죽음(카탐슈드 교주가 꾀하고 있는 이야기 바다의 죽음과 공주의 죽음)의 전쟁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잠잠족의 그림자–전사의 춤을 바라보는 하룬의 생각을 통해 침묵도 나름대로 우아하고 아름답다는 것, 몸짓도 말만큼 고상할 수 있다는 것, 어둠의 생물도 빛의 자식들만큼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만, 여하간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지나친 적대 관계로 상정해놓은 억지스러움도 없진 않다(어쩌겠는가. 이거야말로 작가가 이 작품에서 따르고 있는 옛이야기의 서사적 특징이 아닌가!). 이야기의 샘을 원천 봉쇄하고,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고, 이야기의 흐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이야기의 바다를 망쳐버리는 대혼란이라고 작품은 언급하고 있다. 한데, 오염되기 이전에도 이야기의 바다에는 언제든 사람의 머리를 환상적인 꿈으로 가득 채워줄 수 있는 부드럽고 미묘한 이야기들만이 흐르고 있다고 보기에는 석연찮은 점이 있다. 조선 유교 사회에서는 허구의 이야기가 성품을 흐리게 한다는 이유로, 개화기 이래 산업 시대에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을 면치 못한다는 이유로 이야기를 억압해 왔다.
전형적인 모험 이야기의 플롯을 동화적인 판타지 문법에 접목시켜 팍팍한 개인의 삶에 단비 같은 역할을 해주는 이야기의 중요성을 이야기로 풀어간 살만 루슈디는 그 어떤 경우에도 이야기는 영원할 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치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언젠가는 자식을 낳고, 또 그 자식들도 자식들을 낳는 식으로, “모든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와 결합하여 또 다른 이야기로 탈바꿈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고 확실히 믿는다. 결국 이야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책장을 넘기는 순간, 혹 청자의 입장에서는 이야기꾼이 “이후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종료된다. 어렸을 때부터 즐겨 듣던 옛날이야기의 시작과 끝은 요즈음도 변함없이 한결 같다.
『하룬과 이야기 바다』의 말미에서도 이야기 바다는 안정을 되찾고, 볼모로 잡혀간 공주는 구출되어 왕자와 결혼하고, 악당은 줄행랑을 치고, 주인공 하룬과 이야기꾼 아버지는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 되고, 마침내 하룬의 소원대로 집 나갔던 엄마가 돌아오는 해피엔딩이다. 작품에서도 언급되었지만, 현실에서의 해피엔딩은 규칙이 아니라 예외라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드물다. 후기에서 루시디는 이 작품을 창작하던 시절이 그에게 너무나도 어두운 시절이었던 만큼 『하룬과 이야기 바다』는 빛으로 가득 채우고 싶었다고 밝혔다. 혼돈과 어둠이 걷혀야 해피엔드가 찾아온다. 다만 “해피엔딩은 언제나 이야기의 가장 끝에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