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새책 녹록지 않은 삶도 역사의 주인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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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3-09-30 18:04 조회 5,916회 댓글 0건본문
남정미 서울 염리초 사서
인간의 삶 속에 어찌 기쁨과 희망만 자리할 수 있으리.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사노라 겪어 낸 슬픔과 기쁨들이 켜켜이 쌓여 한 사람의 일생을 이루고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삶의 아픔과 기쁨을 주체치 못했던 이 땅의 주목 받지 못하는 민중들은 일을 하면서도 쉬면서도 노래를 잊지 않았는데 지은이 없이 절로 생겨난 그 노래들을 우리는 ‘민요’라 부르며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조선의 시인 조수삼의 한시 ‘추재기이(秋齋紀異)’. 원숭이를 훈련시켜 빌어먹는 거지, 소설 낭독꾼 전기수, 성대모사에 뛰어났던 박뱁새 등 당시 낮은 계층 71명의 삶을 노래했던 이 시 속에는 백가지 새를 등장시켜 자신의 아픔과 슬픔, 기쁨까지도 풀어냈던 <백조요>의 앞 못 보는 노래꾼이 등장한다. ‘둥그렁 뎅 둥그렁 뎅’ 하는 이 시의 후렴구는 사연을 알고 다시 불러보면 그 삶이 내 삶인 양 더할 나위 없이 서러워지는 노래인데 통영의 한 걸인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백조요>를 한문학자의 원문풀이를 곁들여 그림책으로 꾸몄다.
표지 그림 속 대청마루에 늘어선 사대부들을 흥겹게 만들고 있는 통영 동이의 춤사위가 제법 신명난다. 기운 옷을 입은 채 한 가락 뽑고 있는 오라버니 옆에서 역시 기운 옷의 누이가 동냥질로 노랫값을 받아내고 있는데 빈 바가지에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결코 각박하지 않다. 우리네 삶이다. 자기가 잘 하는 일에 신명을 더해 일하면 배 고프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의 잔칫상 음식들은 배고픈 사람들의 차지로도 넉넉하게 돌아갔던 우리 옛 삶. 각각의 처지에 만족하며 욕심 없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에 아득바득 오르려고 하지도 않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연연하며 억지스럽게 애쓰지도 않았으며 더 많이 가지려고 남을 속여 가며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 여유는 삶 속에서 멋들어진 민요 가락을 뽑아낼 수 있게 했고 노래 뿐 아니라 시, 그림 등 다양한 놀이 문화로 지금껏 전해져 온다.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할 줄 아는 ‘고수’의 삶, 이들의 삶이 어찌 매양 넉넉할 수 있을까. 하나만을 고집하며 외곬으로 사는 덕에 그들은 요령을 피울 줄도 모르고 속도전에서조차 처진다. 치열하면서 느릿하게 이루어지는 그 삶을 작가는 흙을 개어 여러 번 덧칠하는 그림 형식으로 표현해 공을 들였다. 특히 속표지에 강조된 투박하면서 거칠게 그려진 온갖 새 그림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나름의 사연을 간직하고 발돋움하며 날아오르는 <백조요>의 주인공들이다. 넉넉지 않은 삶 속에서 여유를 갖고 자신이 가진 것을 함께하며 더 큰 기쁨을 얻었던 우리 조상들 모습이다.
책 속 통영동이 역시 그 기쁨에 치중했다. 남의 집 잔칫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흥에 겨워 신이 난 채 너스레를 떨다가 기어이 누이마저 잃고 만다. 사랑하는 누이를 잃어 울다 울다 눈이 먼 통영동이의 슬픈 모습은 검은 바탕에 흐릿하게 그려져 막막함을 더한다. 어둠 속을 휘젓고 있는 통영동이 발사위는 ‘둥그렁 뎅 둥그렁 뎅’ 민요가락과 어우러지는데 이야기 첫 대목에서의 흥겨움은 사라지고 애달프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들린다. 잃어버린 누이를 찾기 위해 지팡이 하나 손에 쥐고 너른 충무땅을 헤매는 통영동이를 그린 이는 흙 재료를 이용해 다듬어지지 않은 민중 특유의 토속적 느낌으로 표현했다. 흙 바탕 속 여러 마리 새 그림은 눈까지 먼 통영동이가 온전치 못한 몸으로라도 노래노래 부르며 오래오래 살아주길 바라는 그린 이의 간절함이다.
해피엔딩에 익숙한 어린이들이 결말이 나지 않은 이 글의 뒷부분을 어떻게 상상할까 궁금하다. 통영동이의 슬픈 노랫가락을 듣고 바랐던 누이가 찾아왔을 수도 있고 끝끝내 오누이는 만나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수도 있다. 모두가 정답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생긴 대로 잘 하는 대로 둥그렁 뎅 둥그렁 뎅 얼사절사 잘 넘어가’야 하는 그림책이니 말이다. 그러나 소외되고 그늘진 곳의 몇몇 사람들 역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라는 것은 우리 어린이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행복한 결말의 동화책만 손에 쥐어 주어서도 안 되고 어둡고 그늘진 세계도 맛보여 주어야 옳다. 경험이 부족한 어린이도 상징적인 그림에 흥미를 갖게 마련이고 그 안에 숨은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리지는 못한다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드러나지 않는다 해서 역사를 무시하고 허투루 여겼다간 ‘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냐’는 질책을 훗날 다음 세대로부터 듣게 될 수도 있다.
잃어버린 누이동생을 위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 땅 곳곳을 누비며 백 가지 새 노래를 불렀다는 통영동이 이야기는 어두운 흙빛 바탕의 흑백 그림으로 결말조차 확실하지 않게 그려진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추천되어야 한다.
인간의 삶 속에 어찌 기쁨과 희망만 자리할 수 있으리. 자신의 능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불행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람은 살아야 하고 사노라 겪어 낸 슬픔과 기쁨들이 켜켜이 쌓여 한 사람의 일생을 이루고 한 시대의 역사를 만들기도 한다. 삶의 아픔과 기쁨을 주체치 못했던 이 땅의 주목 받지 못하는 민중들은 일을 하면서도 쉬면서도 노래를 잊지 않았는데 지은이 없이 절로 생겨난 그 노래들을 우리는 ‘민요’라 부르며 지금껏 이어오고 있다.
조선의 시인 조수삼의 한시 ‘추재기이(秋齋紀異)’. 원숭이를 훈련시켜 빌어먹는 거지, 소설 낭독꾼 전기수, 성대모사에 뛰어났던 박뱁새 등 당시 낮은 계층 71명의 삶을 노래했던 이 시 속에는 백가지 새를 등장시켜 자신의 아픔과 슬픔, 기쁨까지도 풀어냈던 <백조요>의 앞 못 보는 노래꾼이 등장한다. ‘둥그렁 뎅 둥그렁 뎅’ 하는 이 시의 후렴구는 사연을 알고 다시 불러보면 그 삶이 내 삶인 양 더할 나위 없이 서러워지는 노래인데 통영의 한 걸인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백조요>를 한문학자의 원문풀이를 곁들여 그림책으로 꾸몄다.
표지 그림 속 대청마루에 늘어선 사대부들을 흥겹게 만들고 있는 통영 동이의 춤사위가 제법 신명난다. 기운 옷을 입은 채 한 가락 뽑고 있는 오라버니 옆에서 역시 기운 옷의 누이가 동냥질로 노랫값을 받아내고 있는데 빈 바가지에 먹을 것을 나눠주고 있는 아주머니의 표정은 결코 각박하지 않다. 우리네 삶이다. 자기가 잘 하는 일에 신명을 더해 일하면 배 고프지 않을 정도의 먹을 것은 누구나 얻을 수 있었고 많이 가진 사람들의 잔칫상 음식들은 배고픈 사람들의 차지로도 넉넉하게 돌아갔던 우리 옛 삶. 각각의 처지에 만족하며 욕심 없이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오르지 못할 나무에 아득바득 오르려고 하지도 않았고 가지지 못한 것에 연연하며 억지스럽게 애쓰지도 않았으며 더 많이 가지려고 남을 속여 가며 인색하게 굴지 않았다.
그 여유는 삶 속에서 멋들어진 민요 가락을 뽑아낼 수 있게 했고 노래 뿐 아니라 시, 그림 등 다양한 놀이 문화로 지금껏 전해져 온다. 해야 할 일을 즐기면서 할 줄 아는 ‘고수’의 삶, 이들의 삶이 어찌 매양 넉넉할 수 있을까. 하나만을 고집하며 외곬으로 사는 덕에 그들은 요령을 피울 줄도 모르고 속도전에서조차 처진다. 치열하면서 느릿하게 이루어지는 그 삶을 작가는 흙을 개어 여러 번 덧칠하는 그림 형식으로 표현해 공을 들였다. 특히 속표지에 강조된 투박하면서 거칠게 그려진 온갖 새 그림은 한 마리 한 마리가 나름의 사연을 간직하고 발돋움하며 날아오르는 <백조요>의 주인공들이다. 넉넉지 않은 삶 속에서 여유를 갖고 자신이 가진 것을 함께하며 더 큰 기쁨을 얻었던 우리 조상들 모습이다.
책 속 통영동이 역시 그 기쁨에 치중했다. 남의 집 잔칫상에서 자신도 모르게 흥에 겨워 신이 난 채 너스레를 떨다가 기어이 누이마저 잃고 만다. 사랑하는 누이를 잃어 울다 울다 눈이 먼 통영동이의 슬픈 모습은 검은 바탕에 흐릿하게 그려져 막막함을 더한다. 어둠 속을 휘젓고 있는 통영동이 발사위는 ‘둥그렁 뎅 둥그렁 뎅’ 민요가락과 어우러지는데 이야기 첫 대목에서의 흥겨움은 사라지고 애달프기 그지없는 모습으로 들린다. 잃어버린 누이를 찾기 위해 지팡이 하나 손에 쥐고 너른 충무땅을 헤매는 통영동이를 그린 이는 흙 재료를 이용해 다듬어지지 않은 민중 특유의 토속적 느낌으로 표현했다. 흙 바탕 속 여러 마리 새 그림은 눈까지 먼 통영동이가 온전치 못한 몸으로라도 노래노래 부르며 오래오래 살아주길 바라는 그린 이의 간절함이다.
해피엔딩에 익숙한 어린이들이 결말이 나지 않은 이 글의 뒷부분을 어떻게 상상할까 궁금하다. 통영동이의 슬픈 노랫가락을 듣고 바랐던 누이가 찾아왔을 수도 있고 끝끝내 오누이는 만나지 못한 채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수도 있다. 모두가 정답이다. 자신의 생각대로 ‘생긴 대로 잘 하는 대로 둥그렁 뎅 둥그렁 뎅 얼사절사 잘 넘어가’야 하는 그림책이니 말이다. 그러나 소외되고 그늘진 곳의 몇몇 사람들 역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주인공이라는 것은 우리 어린이들이 깨달았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행복한 결말의 동화책만 손에 쥐어 주어서도 안 되고 어둡고 그늘진 세계도 맛보여 주어야 옳다. 경험이 부족한 어린이도 상징적인 그림에 흥미를 갖게 마련이고 그 안에 숨은 의미를 정확히 알아차리지는 못한다해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드러나지 않는다 해서 역사를 무시하고 허투루 여겼다간 ‘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냐’는 질책을 훗날 다음 세대로부터 듣게 될 수도 있다.
잃어버린 누이동생을 위해 보이지 않는 눈으로 이 땅 곳곳을 누비며 백 가지 새 노래를 불렀다는 통영동이 이야기는 어두운 흙빛 바탕의 흑백 그림으로 결말조차 확실하지 않게 그려진 이야기지만 그렇기 때문에 추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