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 새책 진리와 욕망 사이에서 길 잃은 임금, 인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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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4-03-19 15:05 조회 5,480회 댓글 0건본문
김광재 학교 밖 독서지도
설흔 작가는 생각하기를 좋아한다. 조선 시대 사람들에게 관심도 많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하기에는 ‘다르게’라는 방법이, 사람들에게는 ‘평범하지 않음’이란 조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작가는 2007년 『연암에게 글쓰기를 배우다』(박현찬 공저, 위즈덤하우스)를 시작으로 일 년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출간했다. 그중 조선 최고의 문장가로 알려진 이옥을 다룬 『멋지기 때문에 놀러 왔지』(창비, 2011)가 대표작이다. 2012년에는 김시습을 소재로 한 『살아있는 귀신』과 책이 사람을 읽는다는 설정으로 조선 시대 사람들과 책이 주인공인 『책의 이면』까지 출간했다. 『그래도 죽지마』(시본 도우드, 생각과느낌, 2010)라는 번역 책도 있다. 이렇듯 부지런한 작가의 바람은 더 많은 조선 시대 사람들 이야기를 작품으로 완성하는 것이라니 어쩌면 해마다 ‘설흔 작가다운’ 소설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겠다. 올해는 조선 12대 임금 ‘인종’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인종의 이름은 이호! 이야기는 이호의 독백에 가깝고 일기를 닮았다. 세자 재위 25년을 합쳐 어언 서른 살이 되었지만, 이호는 자신의 역사를 죽음의 역사로 정의한다. 태어나서 열흘도 안 돼 어머니 장경왕후가 돌아가셨고 결혼 전에는 장인이, 그리고 친누이 효혜공주와 이복형 복성군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연산군을 폐하고 왕이 된 아버지 중종은 “조광조처럼 되어서는 아니 될 것이야. / 널 위해 복성군을 죽였다. / 우애! 우애를 잊지 마라.”라고 하면서 승하하셨다. 이호에게 남은 건 임금을 이기려 드는 신하들과 의붓어머니 문정왕후와 이복동생 경원대군. 이호는 “하늘의 도를 세워서 음과 양이라 하고, 땅의 도를 세워서 부드러움과 강함이라 하고, 사람의 도를 세워서 인과 의라 한다.”(99쪽)라는 스승 조광조가 남긴 『근사록』을 읽으며 어진 임금이 되려고, 문정왕후와 경원대군과 가족이 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이호는 늘 배가 고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자식의 도리를 다하느라, 임금이 되어서는 자신을 인내하느라 먹지를 못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호에게 관심이 생긴 건 『조선왕조 인종실록』에 실린 수레바퀴와 허기, 조광조가 『근사록』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무엇 때문이거나, 장경왕후 혹은 문정왕후와 경원대군 때문이라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도 그중 하나도 제대로 된 이유는 없다고 한다. 흔쾌히 작가의 꼬임에 넘어가 보니 수레바퀴는 권력 혹은 욕망으로, 두 어머니는 인정 욕구로 읽힌다. 이중 이호는 어머니에게 더 집착했고 세자였으나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한 채 평생을 배고픔과 외로움에 시달린다. 이호가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의 배고픔에 시달리는 동안 경원대군은 든든한 어머니의 보호 아래 왕자의 삶을 누린다. 이만하면 이야기는 어머니의 막강한 힘 덕분에 경원대군이 성군이 되는 걸로 끝나야 하지만, 경원대군 역시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끝나고 2년 후, 34살의 나이로 죽고 만다. 13대 임금 명종 이야기다.
어머니 정을 모르고 평생 어머니를 그리워한 이호와 평생 어머니의 울타리 아래에서 살아야 했던 경원대군은 언뜻 평행선으로 보이지만, 실은 욕망의 결핍과 넘침이 보여 주는 곡선이다. 이때 이호는 자신이 갈 길을 몰라 실패했고 스스로 죽음을 택했다는 게 설흔 작가의 해석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사람은? “진리보다는 욕망을 추구하는 자가 권세를 소유하기 마련”(197쪽)이라는 문정왕후로 보이지만, 그도 실패했다. 이호에게는 진리인 게 문정왕후에게는 욕망이었으니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진리와 욕망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게 가능한 것일까? 작가는 진리는 배고픔으로 욕망은 수레바퀴로 표현해 진리에 이르는 길의 험난함과 욕망의 덧없음을 보여 준다. 온통 욕망뿐인 세상에서 오랜만에 ‘진리’에 붙잡혀 있으려니 힘들고 낯설다. 진리를 생각할 시간이 있으면 욕망에 다가서기 위해 더 빠르게 달려야 한다는 조바심도 생긴다. 하지만, 내 수레바퀴를 세워 점검해야겠다. 책을 읽는 내내 끊임없이 생각을 끌어내어 잘 만들어진 이야기의 힘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