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 스키로 우정을 쌓은 희준과 주섭
그러나 두 친구의 우정은 이데올로기 갈등과 만나고 마는데…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948년, 한반도는 온통 총선거 열풍이었다. 그토록 염원했던 해방 후, 선거를 통해 우리 손으로 자주독립 정부를 만들고자 했던 기대감이 최절정이었던 그해. 하지만 1948년은 한국 현대사에서 이데올로기 대립이 극심했던 해이기도 했다. 남한 단독 선거와 남북한 총선거라는 두 의견이 거세게 충돌했고, 결국 이 갈등은 2년 후 비극적인 전쟁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희준과 주섭, 두 친구도 이 아픈 역사를 피할 수 없었다. 공산주의가 싫어서 북에서 피난을 온 희준과 해방 후 일본에서 온 주섭. 남산 스키장에서 우연히 만난 둘은 같은 배재중학교 학생임을 알게 되고, 스키를 통해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총선거에 대한 의견 대립의 소용돌이 속에서 둘의 우정도 금이 간다.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서라도 하루빨리 우리 정부를 만들어야 한다는 희준과 또다시 식민지가 되지 않으려면 남북한 통일 정부가 필요하다는 주섭. 두 친구는 사랑하는 가족까지 시대의 격랑 속에 희생되면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서로를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된 이들은 과연 우정을 지킬 수 있을까?
한국 현대사 속에서 가장 아쉬운 선택, ‘1948년’
“우리는 왜 분단되고 싸워야 했을까?”
역사의 현장에서 ‘인간’과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다
“미국이랑 그 하수인들이 판을 치는데 선거가 제대로 치러지겠어?”
“그럼 북조선은? 소련이랑 그 하수인들이 다 차지하고 있잖아. 자기편이 아니면 괴롭혀서 쫓아내고.”
…
“우리 가족이 그렇게 해서 내려왔어. 아버지가 평생 농사짓던 땅이랑 집 다 놔두고 말이야.” 희준의 침울한 표정을 본 주섭이 대답했다. “미안, 몰랐어.” - 본문 80쪽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전쟁은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빼앗았고,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은 부상과 가족과의 이별, 가난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한국전쟁의 비극은 71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은 신분과 이데올로기를 뛰어넘어 너 나 할 것 없이 해방을 염원했고, 독립운동가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왜 그토록 기다린 해방의 기쁨과 새로운 나라에 대한 희망을 뒤로한 채 분단과 전쟁을 겪어야만 했을까?
한국추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하고, 역사 미스터리와 역사 인문서, 청소년 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활약 중인 정명섭 작가는 이 물음에 어쩌면 ‘1948년에 남과 북이 결정한 선택 때문일지 모른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당시엔 이 선택이 한국전쟁과 현재까지 이어지는 대립으로 향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아쉬운 선택 중 하나임이 틀림없다. 바로 ‘5·10 총선거’다.
1948년, 국제연합(유엔)은 남북이 함께 참여하는 총선거를 준비했고, 사람들은 비로소 선거를 통해 우리 손으로 뽑은 정부를 세울 수 있다는 기대감에 들떴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결국 38선 남쪽인 남한에서만 선거를 치렀고,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리고 이를 빌미 삼아 북한이 따로 정부를 수립하면서 양측은 돌이킬 수 없는 분단의 길로 향했다. 이후 남북한은 통일만이 유일한 살길임을 알면서도 양보 없는 이데올로기 다툼을 계속했고, 결국 1950년 비극적인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1948, 두 친구》는 바로 이 시기를 배경으로 배재중학교를 다니던 두 친구의 이야기를 담았다. 해방 후 함경북도 청진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온 희준과 일본 오사카에서 귀국한 주섭. 둘은 남산 스키장에서 처음 만나서 스키를 통해 우정을 쌓는다. 하지만 서울이라는 낯선 곳에서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즐거움도 잠시, 총선거를 앞두고 치열했던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희준과 주섭에게도 들이닥친다.
“우리는 왜 적이 되어야 할까?”
인간은 이데올로기를 통해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는가?
“그래도 죽기 전에 너희들을 봐서 다행이다. 이것들아, 싸우지 마.”
“지금 우리 걱정할 때야?” 희준의 말에 그는 힘없이 웃었다.
“나 없으면 맨날 치고받을까봐 걱정이니까 그렇지. 하나는 북쪽에서 왔고, 하나는 일본에서 와서 여기가 낯설잖아. 안 그래?
-본문 160쪽
“사회주의든 뭐든 결국 사람을 잘살게 만들려는 거잖아. 근데 그것 때문에 서로 멱살잡이에 주먹질을 해. 그걸로도 부족하면 이제 총질을 하고 칼을 휘두르겠지. 안 그래?” - 본문 124쪽
정명섭 작가는 희준과 주섭, 그의 가족들을 통해 ‘인간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런데 작가는 왜 북한과 일본에서 온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그것은 우리 민족을 분단과 전쟁으로 몰고 간 원인이 바로 외부에서 온 이데올로기이기 때문이다. 덕분에 독자들은 낯선 존재들의 시선으로 1948년을 바라보면서, 당시 어떤 일이 있었고 왜 그런 결정들을 내려야만 했는지 우리를 둘러싼 가혹한 역사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1948년 5·10 총선거를 앞두고 남한에서는 거대한 두 목소리가 충돌하고 있었다. 북한이 38선 북쪽으로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이 들어오는 것을 금지했기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남한만이라도 단독 선거를 해서 우리의 정부를 만들자는 의견과, 그러면 나라가 쪼개지게 되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남북이 함께 총선거를 하자는 의견이 대치한 것이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이 갈등에서 희준과 주섭, 그의 가족들도 예외가 되지 못했다. 공산주의가 싫어 북한을 떠나온 희준은 남한 단독 선거를 찬성하고, 미군 주도로 선거를 치르면 서구 열강의 식민지가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는 주섭은 남북이 똘똘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희준과 주섭은 이데올로기와 우정의 길 위에서 논쟁과 화해를 반복하다가, 사랑하는 가족이 시대의 격랑 속에 희생되면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다.
《1948, 두 친구》는 평범한 두 가족이 이데올로기 다툼 속에서 아파하고 희생되는 모습을 통해, 우리 민족이 어렵게 되찾은 나라에서 분단과 전쟁을 겪게 되는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신념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아마도 보다 인간답게, 보다 잘 살기 위한 바람이 그 뿌리일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맹신하면서, 다른 생각을 말하는 이들을 배척한다. 상대를 존중하며 서로의 생각을 논의하고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막고, 다투고, 전쟁을 일으켜 안타까운 희생을 치르게 된다.
서로의 우정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던 희준과 주섭. 이데올로기에 의해 평범한 삶의 행복을 잃고, 결국은 이데올로기 전쟁터 한가운데서 만나게 되는 두 친구를 통해 작가는 묻는다. “인간에게 이데올로기는 어떤 의미이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꼬락서니를 보니 어제 둘이 한판 붙었구만. 누가 이긴 거야? 친구들끼리 싸우면 이기는 쪽은 없어.” - 본문 150쪽
우리는 1948년의 두 친구를 통해 무엇을 생각해봐야 할까? 우리는 이데올로기보다 더 높은 가치, 바로 인간의 존엄을 지켜나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 파괴와 희생의 이데올로기가 아닌, 대화와 상생의 이데올로기를 가지고서 말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삶에서 만나는 다양한 가치관들, 다양한 사람들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가 평화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까지, 격량의 시간을 살았던 많은 이들의 꿈과 노력이 있었다. 바로 두 친구의 우정 이야기가 그것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며, 오늘을 사는 10대들에게 더 나은 평화를 위한 물음과 가능성을 남겨준다.
21세기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기 위해 1948년의 대한민국은 엄청난 희생을 겪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기억하고 알아야 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현재의 우리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희생과 도전이 필요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작가 정명섭
대기업 회사원과 바리스타를 거쳐 지금은 청소년문학과 역사를 넘나들며 사실과 상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팩션 작가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소외되었던 사실을 발굴하거나 익숙한 것들에서 낯선 모습을 발견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 햇빛처럼 선명하게 기록된 역사 속에서, 그 빛을 받아 밤을 비추는 달과 같은 이야기를 찾는 중입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은밀하거나 사라진 공간을 말할 때 이야기는 특히 빛이 난다고 믿습니다.
중편소설 《기억, 직지》로 2013년 ‘제1회 직지소설문학상 최우수상’을 수상했습니다. 《조선변호사 왕실소송사건》으로 2016년 제21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NEW 크리에이터상’을 받았습니다. 청소년문학 《미스 손탁》은 ‘2019년 원주 한 도시 한 책 읽기’에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2020년 《무덤 속의 죽음》으로 한국추리문학상 대상을 수상했습니다. 한국 미스터리작가모임과 무경계 작가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저수지의 아이들》 《온달장군 살인사건》 《왜란과 호란 사이 38년》 《유품정리사》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조선 사건 실록》 《어린 만세꾼》 《상해임시정부》 《남산골 두 기자》 등이, 함께 쓴 책으로는 《취미는 악플, 특기는 막말》 《일상 감시 구역》 《모두가 사라질 때》 《좀비 썰록》 《어위크》 《그날의 메아리》 《대한 독립 만세》 《로봇 중독》 등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