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아픕니다> 꿈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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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학교도서관저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15-05-13 10:51 조회 15,115회 댓글 0건본문
평화징검돌 03
어린 아재의 오월 이야기 나는 아직도 아픕니다
최유정 글 / 이홍원 그림
양장ㆍ컬러ㆍ본문 56쪽|크기 250×250mm|값 19,800원|ISBN 979-11-85928-05-0 77810 |펴낸 날 2015년 5월 18일
끝나지 않은 오월, 어린 아재의 아픈 이야기
다음 세대에게 ‘오월 광주’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다시 오월입니다. 서른다섯 번째 ‘광주의 오월’. 한 세대가 훌쩍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광주의 오월, 오월의 광주는 정치적 성향이 어떻든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입니다. 그 상처는 종종 무지와 몰이해의 손톱에 긁혀 극심한 통증을 일으키곤 하지요. 무지와 몰이해의 극단에 이른바 ‘일베’ 류의 조롱과 모독이 있다 할 수 있을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대개 ‘오월 광주’를 남의 일로 여기는 이들이거나, 먼 역사의 일로 아는 세대들일 겁니다. 부실하게 기술된 ‘지나간 역사’로만 오월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지와 몰이해가 계속되는 한, 상처는 영원히 아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부단히 ‘오월’을 이야기해야만 합니다.
무엇을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까요?
이 책,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오월 광주를 말하는 이 그림책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 상처 입은 타자의 고통을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만이 그 상처를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치유하는 길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하얀 운동화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울던 사내
책 속의 주인공 ‘아재’는 오월의 폭력에 친구들을 잃고 형제를 잃었습니다.
저수지에서 물놀이를 하던 중 느닷없이 쏟아진 총성, 날아온 총탄에 친구들이 피 흘리며 쓰러졌습니다. 선연히 번져오는 핏물, 훅 끼쳐오는 피비린내, 친구가 생전 처음 얻어 신었다는 하얀 운동화에 죽음의 증거처럼 점점이 박힌 핏방울들……. 열두어 살 어린 나이에 눈앞에서 벌어진 그 끔찍한 광경을 어찌 잊을 수 있었을까요. 난리통에 안부가 걱정되어 할머니 치마폭을 붙잡고 찾아간 형을, 어두운 지하도에서 발견된 차디찬 시신으로 만났습니다. 머리에 총탄을 맞아 일그러진 얼굴, 피범벅이 된 하얀 운동화……. 사랑하는 가족을 처참한 주검으로 만난 그 고통의 순간을 어떻게 지울 수 있었을까요.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공포,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는 슬픔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아재의 평생을 쫓아다녔습니다. 눈을 감으면 덮쳐오는 괴물 때문에 잠을 이룰 수 없었습니다. 신으려 하면 떠오르는 친구의 참혹한 모습 때문에 하얀 운동화는 신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앞에 서면 다시금 밀려들 고통 때문에 형의 무덤조차 찾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아재가, 아내의 강권에 못 이겨 찾아간 병원에서 한 남자를 만납니다. 자신과 똑같이 괴물에게 쫓겨 다니는 남자. 죽은 형과 비슷한 연배의, 왠지 남 같지 않은 동병상련의 그 남자에게 아재는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어린 시절의 그 아픈 이야기, 평생을 따라다닌 괴물의 이야기. 그런데 남자는 그 이야기를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남자는 그 자리를 아주 떠나지 못합니다.
이야기가 지닌 치유의 힘
남자를 만나 이야기를 쏟아내고 돌아온 아재는 얼마만인지도 모를 깊은 잠이 들고, 잠 속에서 긴 꿈을 꿉니다.
고향 마을, 저수지 가에서 피 묻은 하얀 운동화를 끌어안고 서 있는 어린 아재, 정호를 시커먼 괴물이 덮쳐 옵니다. 정호는 넘어지고 구르며 달아나 간신히 할머니가 기다리는 우물가에 다다르지만, 괴물은 커다란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듭니다.
바로 그때,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괘안타, 괘안타. 내 강아지야.” “무서버 말고 눈을 떠라! 그래야 이기제. 똑바로 봐야 이기제!” 할머니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을 괴물에게 끼얹습니다. “암것도 아니다. 똑바로 보면 암것도 아니여.” 할머니 말에 정호는 눈을 크게 뜨고 괴물을 향해 있는 힘껏 우물물을 끼얹습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십 년 동안 자신을 괴롭히던 괴물이었습니다. 네 번, 다섯 번, 여섯 번……. 두레박 가득 담긴 물을 끼얹으며 어린 정호가 울먹입니다. “미안혀다, 재호야. 니 총 맞아 죽을 때 나는 무서버서 물에서 나가지도 못했어야. 니 신발도 못 챙겼당께. 미안혀다, 정말 미안혀다…….” “성님, 미안혀라. 성님 묻어 주고 나서 한 번도 찾아가지 못했당게라. 거 가면 옛날 일이 나를 붙들고 안 놔줄깝서. 미안혀요. 두고두고 미안허요…….”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괴물이 진물처럼 녹아내리는 것입니다. 팔이 사라지고 다리가 사라지고 몸뚱이도 스르르 사라집니다. 정호는 그 모습을 잠시도 놓치지 않고 끝까지 지켜봅니다. “애썼구먼, 내 강아지.” 할머니가 정호를 안고 등을 쓰다듬어 줍니다. 머리통을 쓸어 주고 어깨를 매만져 줍니다. 정호는 할머니 품속에서 잠이 듭니다.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자꾸 흘러나옵니다.
꿈을 꾸고 난 후에 아재는 비로소 삶의 의욕을 되찾습니다. 아내가 차려온 밥상에 허기를 느끼고, 김이 오르는 국을 그릇째 후루룩 마십니다. 그리고 햇빛이 좋은 어느 날, 아재는 그 동안 절대 신지 않던 흰 운동화를 꺼내 신고 집을 나섭니다.
삼십여 년 동안 언저리만 맴돌았을 뿐 한 번도 가지 못한 형의 무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거대한 괴물에 맞서는 용기
바로 그 시각, 남자는 몇 시간째 지하도 앞을 서성이고 있습니다. 아재를 만난 뒤 남자는 하루도 편히 잘 수가 없었습니다. 아재의 이야기, 남자가 견딜 수 없으나 견뎌야 했던, 아재가 겪은 피해의 이야기는 곧 남자가 겪은 가해의 이야기였으니까요.
삼십여 년 전, 그 오월에 남자는 지하도에서 죽어가는 청년에게 총을 쏘았습니다. 남자는 그때 자신을 윽박지르던 괴물의 목소리를 잊지 못합니다. “너 죽을래? 쏘란 말이야! 네가 죽지 않으려면 당장 이 새끼에게 총을 쏘란 말이야!” 남자는 이제 그 괴물을 찾아가 말하려 합니다. “난 아니야! 난 절대 너 같은 괴물이 아니라고!”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그때의 거대한 공포와 맞서야 하니까요. 평생의 죄책감을 고스란히 마주해야 하니까요. 고함소리, 총소리, 군화를 적시는 핏물, 피범벅인 채 쓰러진 청년을…….
그러나 남자는 끝내 계단을 내려갑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한 발 한 발.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마주하고 힘겹게 외칩니다. “나는 안 그랬어. 나는 괴물이 아니란 말이야!” 몸을 가누지 못하고 주저앉아, 머리를 감싸 쥐고 눈물을 흘리며. 그러자 아재의 얼굴이 떠오릅니다. 웃통을 벗은 아이들의 모습도, 쪽진 할머니, 선하게 웃는 청년의 얼굴도……. 남자의 가슴이 아립니다. 아리다가 저며 옵니다. 쥐어뜯기는 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삼키고 삼킨 울음을 흘려낸 뒤에야, 남자는 깨닫습니다. 이제 사라지지 않는 기억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일어나 발길을 옮깁니다. 그 역시 번번이 그 앞에서 망설이다 돌아섰던 망월동 묘역으로.
아직도 바람 끝이 매운 시절
이야기를 쓴 최유정 작가는 몇 해 전, 광주트라우마센터에서 하얀 운동화를 끌어안고 하염없이 우는 늙은 사내를 만났습니다.
80년 5월에 시위를 하다가 붙잡혀 수년간 감옥살이를 한 그는, 잡혀갈 때 신었던 피범벅 운동화가 떠올라 그 뒤로 하얀 운동화를 도저히 신을 수 없었다고 했다지요. 그는 몇 달간의 치유 끝에 30년 만에 처음으로 자기 이야기를 원 없이 털어놓았고, 그제야 끌어안고 있던 하얀 운동화를 조심스레 신기 시작했다 합니다. 그 오월에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손가락질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이젠 어깨를 쫙 펴고 외출도 할 것이라고 슬프디 슬픈 표정으로 말했다지요. 그런 사람이 어찌 그 늙은 사내뿐일까요.
80년 당시에 이 이야기의 배경 사건인 ‘송암동 학살’의 피해자 고 방광범 군과 똑같이 중학교 1학년이었던 광주 출신의 작가는 그 늙은 사내를 만난 뒤에야, 그 동안 잊은 듯 무덤덤했던 ‘그해 오월’이, 잊은 것이 아니라 애써 외면해 온 것임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휴교 통보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경험한 총 든 군인들의 검문, 자식들을 구석방에 몰아넣고 겹겹이 이불을 뒤집어씌우던 엄마아빠의 굳은 얼굴, 도청에서 들려오는 총소리, 엄마 몰래 대문을 열고 내다본 트럭 위의 시체들, 확성기로 들려오는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 그저 무섭기만 했던 그 기억들이 되살아날까봐, 그때의 공포와 다시 마주치게 될까봐, 그저 기억 뒤에 숨으려고만 해 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얀 운동화의 늙은 사내를 만난 뒤, 공포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것이, 기억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이, 공포를 이기고 기억을 의미 있게 하는 길임을 깨달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깨달음을 작가로서 세상과 나누기 위해, 다음 세대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이야기를 썼습니다.
아직도 바람 끝이 매운 시절입니다. 여전히 오월을 묻어 버리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주를 잊으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는 여전히 하얀 운동화의 늙은 사내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재 황정호 씨가 있고, 지하도의 남자가 있고, 승기와 광식이와 재호와 숱한 청년들을 가슴에 묻은 가족들이 허다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월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주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오월 광주를 기억하고 이야기하는 이 책이 부디 상처 입은 모든 분들을 쓰다듬는 할머니의 손길이 되길 바랍니다. 아픈 역사를 바로 비추고 진실의 꽃을 피우는 한 두레박 우물물이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작가 소개
글쓴이 최유정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광주에서 1967년에 태어났습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시발점이 된 전남대학교를 다니면서 작가의 꿈을 키웠습니다. 2007년 중편동화 《친구》로 제5회 푸른문학상 ‘새로운 작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해, 이듬해 장편동화 《나는 진짜 나일까》로 제6회 푸른문학상 ‘미래의 작가상’을 잇따라 수상했습니다. 지은 책으로 《숨은 친구 찾기》, 《아버지, 나의 아버지》, 《사자의 꿈》, 《박관현 평전》등이 있습니다.
그린이 이홍원
동국대학교와 대학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1980년대부터 20여 차례 개인전을 열고 160여 차례 그룹전에 참가하는 등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 오고 있습니다. 1994년, 충북 청주 산골마을로 들어가 폐교를 고쳐 창작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재미있어서 의미로운 예술’을 추구하며 새소리 바람 소리와 함께 작업하고 있습니다.